이인엽 목사
[ 창세기 50장 15-21절 ]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세기 50:15-21
성경 속 인물 중에는 우리가 여러번 들어본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지요. 요셉은 야곱의 아내 라헬의 첫번째 아들입니다. 남편인 야곱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지만 자녀를 얻지 못하여 너무도 맘고생을 많이 하던 야곱의 아내 라헬은 요셉을 임신하고 낳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세기 30:23-24
라헬이 지은 요셉의 이름은 하나님이 더 하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내가 만족하였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감사하기는 한데, 기왕 주시는 김에 하나를 더 주세요’ 라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녀까지 얻었는데 감사의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기대되는 대목에서 라헬은 ‘하나 더 주세요’ 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적 없을까요? 그저 감사가 터져나와야 할 순간에, 그저 넘치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다짐해야할 순간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보다는 더 많은 것을 원하며, 더 욕심을 부리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간구한적이 없으십니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 삶에 꽉꽉 차고 넘치는데도 부족한 것을 찾아내 투덜대며 감사보다는 원망으로 애쓰신 적이 없으십니까. 없으시다면 참 다행입니다.
그러나 라헬은 그렇지 못했어요. 감사와 만족함이 없었어요. 그러고 그렇게 조금만 더를 찾던 라헬은 결국 두번째 아들을 갖게 되죠. 하지만 라헬은 이 아이를 순산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창세기 35:16, 19
라헬은 길에서 죽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이르지 못했어요. 베들레헴 가는 길에서 하나 더, 하나만 더를 외치던 라헬은 아이를 하나 더 낳으면서 죽었습니다. 너무나 허무하고 슬픈 라헬은 그렇게 낳은 아들을 “베노니”라 불렀어요. 베노니가 무슨 뜻인 줄 아십니까?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만 더 주세요’ 해서 얻은 아들의 이름을 자신이 죽게 되자 ‘흑흑, 너무슬퍼, 슬픔의 아들이라고 할거야’ 라고 하면서 베노니라고 이름을 지은 겁니다. 이 모습을 본 야곱이 ‘아이 참, 베노니가 뭐냐, 베냐민이라고 하자’ 라고 하지요. 오른손의 아들 베냐민의 이름은 이렇게 해서 지어집니다.
이 베냐민과 함께 친형인 요셉은 에굽에 팔려갈때 까지 대략 7년의 시간을 함께 합니다. 엄마의 생명과 맞바꾼 동생, 어린 요셉에게 그 동생은 얼마나 소중했을까요.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요. 때로 동생을 향한 형의 사랑이, 동생을 향한 누나의 사랑이 엄마의 사랑 못지 않은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됩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사랑했어요. 너무너무 아꼈어요. 7살쯤 된 친동생 베냐민을 두고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참 여러날 그 동생이 걱정되고 참 여러날 그 동생을 위해 눈물흘렸을 겁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요셉이 이렇게 베냐민을 아끼고 사랑한것이 분명한데 요셉이 많은 고난을 넘어 애굽의 총리가 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 형들이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올때까지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을 찾아오지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정말 이상하지요.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학자들은 다양한 의견들을 보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자신의 가족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찾지 않았다는 이유는 그의 첫째 아들의 이름에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창세기 41:51
요셉에게 가족이란 그리워서 찾아야할 대상이 아니라 고난과 고통스러움과 원통함의 대상, 원수와 같은 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려한 원수, 자신을 무시한 원수, 자신을 배신한 원수, 자신을 팔아버린 원수,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원수에 대한 미움은 채색옷을 입히며 자신을 사랑했던 아버지 야곱의 사랑도, 엄마의 목숨과 바꾼 귀여운 동생 베냐민에 대한 사랑도 모두 덮어버렸습니다. 미움이 사랑을 덮었어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이제 잊어버리고 싶은 과거가 된 것입니다.
이쯤되면 요셉의 원한과 미움이 얼마나 컷는지 짐작이 가지 않으십니까?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요셉은 하나님의 축복을 얻었으니까, 미움 정도는.. 원수 정도는.. 한번 죽이려고 한 것 정도는 다 이겨내고 용서할수 있고 그랬습니까?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첫 아들을 낳고서야 ‘그래, 다 잊어버리자. 다 잊어버리자’ 이러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마나 용서할수 없었으면, 아들 이름을 잊어버리자 라고 지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도우시는데..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하시는데.. 내가 이렇게 계속 미워하면 안되는거 아닌가.. 그런데 내 맘대로 되지를 않아, 용서가 되지를 않아, 그 미움이 가시질 않아, 정말 나한테 해도 너무 했잖아. 요셉의 갈등과 고민과 고통이 고스란이 그 첫째 아들의 이름 속에 담겨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요셉은 왜 용서할수 없었습니까.
야곱의 자녀 중 거의 막내에 가까웠던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특별히 사랑하는 라헬의 아들이었습니다. 라헬에 대한 사랑은 고스란히 요셉으로 이어져 야곱은 정말 어이없는 편애를 하였습니다. 딴 아들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그냥 요셉만 좋은거예요. 부모의 편애는 당하는 자녀의 입장에서는 씻을수 없는 상처가 되는 겁니다. 야곱의 그 주책스러운 편애는 요셉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히는 것으로 정점을 찍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창세기 37:3-4
영어성경에 ornate robe (화려한 예복) 이라고 해석되어 있는 채색옷은 어떤 옷이었길래 형들은 그옷을 입은 야곱을 보고 더욱 미움이 커졌을까요. 그 당시에 옷이라는 것, 특히나 목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입는 옷이 뭐 그리 대단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긴 직사각형의 천의 중간에 구멍을 뚫어서 머리를 내놓고 양 옆을 꿰매 입는 옷, 말하자면 헐렁한 민소매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채색옷으로 해석된 요셉이 입었던 옷은 알록달록한 옷이라기 보다는 긴 소매가 너풀거리는 그런 옷이었다고 하죠. 그런 옷은 당시에 왕족이나 입는 옷이었습니다. 그런 옷을 입고 양떼를 치거나 일을 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요셉은 우리 집안의 왕자다, 요셉에게는 아무일도 시키지 않겠다는 상징을 가진 옷이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그 옷을 입혀준거죠.
아버지는 아버지라고 치고, 요셉도 철이 없어서 자신이 꾼 꿈을 형들에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창세기 37:6-8
형들은 결국 기회를 봐서 요셉을 죽이려 했습니다. 르우벤의 반대와, 유다가 죽이지 말고 그냥 팔아버리자고 하지 않았으면 아마도 요셉은 거기서 죽었을 겁니다. 얼핏보기에 이 성경구절들은 형들의 살해 동기가 단지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철없는 요셉의 교만함에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엄마가 나보다 동생을 사랑해서 명품 옷을 사주면 동생을 몰래 끌어내서 엄마 안보는데서 죽입니까? 동생이 잘난척하고 꿈얘기를 하면 잡아다가 인신매매범에게 동생을 팔아넘깁니까? 나는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동생은 얄밉게 팽팽 놀고 있으면 깊은 웅덩이에 아무도 모르게 던져놓고 옆에서 느긋하게 도시락을 까먹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되는 이야기죠. 그러나 그때 당시로 생각하여도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의 악함을 이기지 못하고 요셉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요셉은 수백 수천번을 생각했을 겁니다. 그게 나를 죽일만큼 큰일이었을까. 그게 나를 팔아버릴만큼 미운 일이었을까.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했나 형들한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형들은 너무 악했다, 형들은 너무 잔인했다, 형들은 나의 원수이다’ 입니다. 만약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요. 요셉은 당시 가장 거대한 나라인 애굽의 총리입니다.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사람을 보내 원수를 갚는 것이 뭐 그리 어려웠을까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형통함의 은혜를 누리는 요셉은 자신의 혈육을 대상으로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그저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잊어버림은 용서가 아니지요. 이 땅의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4
그러나 요셉이 원수를 용서하기 힘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원수를 용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날 죽이려 했던 원수는 그만두고 내게 조금 잘못한 사람, 날 조금 기분 나쁘게한 사람, 날 조금 무시한 사람을 용서하고 미워하지 않는 것도 쉬운일이 아닙니다. 원수까지는 가지도 못한다고요.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얼마나 부담되는 내용입니까.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따른다고 해도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내용은 받아들이기에 매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잘 하실수 있으십니까. 전 솔직히 별로 자신 없습니다. 저도 차라리 요셉처럼 용서보다는 안보고 잊어버리는 쪽을 선택할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더 심각한 이야기를 하시죠. 예수님이 직접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인 주기도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태복음 6:12
우리가 이 주기도문을 얼마나 많이 외워요. 적게는 일주일에 한번, 많게는 매주 수십번을 외우는 기도문이 아닙니까. 이 기도가 아무 힘이 없는 주문과 같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럼 하나님이 들으시는 이 기도문의 내용 중에 이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내 죄를 사하여 달라는 간구, 하나님이 들으시고 이루어주시는 이 간구는 다르게 말하면 내가 나에게 죄 지은 자, 나의 원수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예수를 믿고 따르는 성도에게 용서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인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왠만하면 사이좋게 지내라…’ 이런 말이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용서, 원수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정말 우리는 할수 없을 것 같은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을까요. 우리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용서하기 힘들어 했던 요셉은 원수인 형들을 어떻게 용서할수 있었을까요.
자신을 죽이려한 원수인 형들을 잊어버리고 살기로 다짐한 요셉에게 어느날 그 의기 양양하던 형들이 기죽은 모습으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앞에 섭니다. 그들은 외국인 이었기에 총리의 허락없이 맘대로 식량을 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 겁니다. 요셉은 단박에 형들을 알아보았죠. 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어요.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창세기 42:7
요셉은 이들을 정탐꾼으로 몰아세웠어요. 그리고 시므온을 인질로 잡고 막내인 베냐민, 그러니까 요셉의 친동생을 데려오는 것으로 결백을 증명하라고 윽박지릅니다. 당연히 형들은 이 총리가 요셉인 것을 몰랐지요. 이 난감한 상황앞에서 형들은 자기들끼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창세기 42:21-22
이 말을 들은 요셉은 웁니다. 만감이 교차 했겠지요. 그날의 참담함이 떠올랐을 겁니다. 그들의 자복과 후회를 보면서 원수에 대한 미움으로 단단해져 있던 마음이 조금은 녹아내립니다. 요셉은 자리를 비켜서서 눈물을 흘렸어요. 그러나 아직 용서할수는 없었습니다. 원수들은 보통 사과를 하지도 않지만, 정작 원수에게 사과를 받는다 해도 마음이 잘 열리지도 않죠. 죄에 대한 후회와 자복으로는 요셉의 마음을 바꿀수 없었습니다. 결국 형들은 다시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 총리 요셉에게 나오죠. 요셉은 자기 동생인 베냐민을 보고 다시 한번 웁니다.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그가 무사함을 보고, 그가 자기처럼 형들에게 당하지 않은 것을 보고 요셉은 또 다시 웁니다. 사랑하는 동생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요셉의 마음은 움직였을 테지만 하지만 아직도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요셉임을 그들에게 밝히지 않지요.
용서는 이렇게 쉽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자신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을 잘 따른다고 하면서 지내다 보면 맘에 안들고 미운사람을 만나는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그러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요. 맘에 안들고 미운사람이 원수입니까.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는겁니까. 요셉이 그냥 형들이 맘에 안들고 미워서 형들을 용서하지 못했을까요. 맘에 안들고 미운 사람을 용서 못한다면 그건 요셉의 형들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건 자랑할 일도 아니예요. 원수는 그 정도의 사람이 아니죠. 원수는 나를 죽이려는 사람입니다. 원수는 나를 망하게 하려는 사람입니다. 원수는요 내 가진 것을 다 빼앗아 가는 사람입니다.
보통사람은 살면서 원수를 몇명 만나기도 어려운 거예요.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특별히 모자라서 형들을 용서하지 못한게 아닙니다. 누구라도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 일을 시키세요, 예수님. 예수님, 나 원수를 용서할 힘 없어요.. 나 그렇게 좋은사람 아닙니다.. 나보러 어떡하라고 그걸 하라고 하십니까.. 나 안되요.. 원수는 그만두고 미운 사람 용서도 힘들어요.. 주여, 어떡하라고 그 일을 시키십니까.. 어떡하라고…
요셉은 용서할수 없었어요. 베냐민을 남겨두려는 요셉의 계략에 형들이 걸려들었습니다. 꼼짝없이 베냐민을 남겨둬야 할 상황이 되었죠. 그 앞에 유다가 나섭니다.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
창세기 44:32-34
유다의 대속 앞에서 요셉이 무너져 내립니다. 요셉은 자신이 요셉임을 밝힙니다. 형들과 요셉 사이에 있던 벽이 허물어져 내립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요셉은 원수를 용서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달리심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우리는 사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입니다. 원수된 우리를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대신 달리셨습니다. 원수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며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줍시다. 그리하여 날마다 외우는 주기도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를 당당히 외치며 구원의 길, 천국의 길로 나아가 봅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로마서 5:10
로마서 5장 10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잊지 마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빚진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빚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야 할 이유가 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 진리가 여러분의 영과 여러분의 마음으로 동의되어 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