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엽목사

이동엽 목사

[ 신명기 8장3절 ]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3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신 사건은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있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3가지 시험을 자세히 살펴보면 각기 다른 시험을 하고 있는것 같지만 실상은 3 시험 모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바른 이해를 테스트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번째 시험은, 40일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사탄이 등장하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어어든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8장을 인용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신명기 말씀은 신명기8장3절의 말씀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3

여기 신명기 8장에 설명하고 있는 이 내용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사건은 구약성경 출애굽기 16장에 자세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앞 1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서 광야에 들어온 직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첫번째 불만은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불평입니다. 광야에 들어서니 먹을 양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불평이 단지 먹을 것이 없다는 이유로 늘어놓는 불평이 아니었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들의 불평속에는 단지 “배가 고픕니다” 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없습니다” 라는, 그들의 범죄함, 불순종에 대한 핑계가 숨어있는 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신앙을 지키고 싶어도, 먹을 양식이 없어서 못하겠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멀쩡히 잘 있는 우리들을 이런 먹을 것도 없는 광야바닥에 끌고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싶어도 따를 수가 없다라는 핑계와 원망이 그들의 불평속에 녹아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에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좋다 그러면 너희 말대로 너희가 범죄하고 내 말을 듣지 않느 것이, 배고픔이라는 외적인 조건인지, 아니면 너희의 굳은 마음인지 한번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게 된 동기이고, 또한 만나를 주고서 시험하시겠다고 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6장에서 만나를 얻는 사건은 애굽을 벗어나자 마자 일어난 사건이고, 신명기 8장은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후 장면입니다.

원래 광야는 40년 동안 돌아 다니도록 의도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벌을 받아 40년이 된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명기 8장의 “너희가 이 40년 동안에 만나를 먹었다”라는 얘기 속에는, 너희 말대로 배고픔이 해결되면 내 말을 듣는지 보려고 양식을 40년 동안이나 주었는데, 그 기한 내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여 광야를 맴돌지 않았냐? 하는 핀잔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주장하는 ‘사람이 떡문제만 해결되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라는 그 주장이 틀렸다 라는 말씀이 신명기 8장 3절의 “…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 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불순종하는 이유는, 죄짓는 이유는 외부 환경에 있지 않다 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는 얘기는 ‘우리에게 에너지만 공급되면, 필요만 충족되면… 우리는 착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주장은 “너희는 필요가 충족되어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주어진 첫 번째 시험 문제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실패했던 시험 문제 였습니다. 결국 선악과 시험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바라보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바라보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시험에 실패한 것입니다.

두번째 시험

예수님께서 받으신 두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께서 사자들을 보내어 보호하실 것이라는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험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십니다. 이 시험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이해에 대한 시험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어떠한 분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누구인줄로 알고 있는가? 에 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개인적인 시험을 받고 계신 것이 아니라, 아담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인류를 대표하여 실패한 시험을, 다시금 인류의 대표자로서 치루고 계신 것입니다. 구약의 욥기를 보면, 욥기 1장에서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하고 하나님께 도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이해관계 차원에 서 있다는 소리입니다.“ 욥이 하나님께 잘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복주시기 때문이고, 또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는 욥이 하나님께 잘하기 때문 아니냐 하는, 서로 간에 이해관계의 차원에 있는 것 아니야는 것이 사탄의 도전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좋다 그러면 그를 쳐라. 단 생명은 건드리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욥기가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재산을 빼앗기고, 자녀들이 죽고, 나중에는 몸에 병이 들어 아주 처참한 지경까지 낮아집니다. 이를 통해 결국, 욥이 배우는 것은, 하나님이란 분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드려 그에 대한 보상으로 무엇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사탄이 도전하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주고 받는 이해 관계 차원이 아니라.. 그 이상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도덕과 윤리, 법과 질서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관계를 요구하신다는 것이 욥기의 결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결론은 욥기 뿐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두드러진 사상입니다.

로마서 1장 17을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라고 합니다. 구원이라는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복음에 나타나는 의는 율법과는 다릅니다. 율법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입니다.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율법과는 다릅니다. 율법은 옳고 그름, 득과 실, 이해관계를 따지지만, 복음은 그저 은혜를 베풉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는 이해 관계입니다. 저 사람과 친해져서 내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이것이 세상 관계에서의 유일한 법칙입니다. 심지어 부모 자식간에도 정도의 차이만 있지 예외없이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법칙을 적용하셔도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그것이 법이요 일차적인 질서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애시당초 우리를 그런 법적 관계의 대상으로 의도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먼저 주시고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계적으로 조정하시지 않고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해관계의 대상자나, 종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두번째 시험인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시험은 하나님을 이런 이해 차원의, 기계적 차원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라 라는 시험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이시며 또한 우리안에 임재해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이해 관계도 아니고 기계적 관계도 아닙니다. 오직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을 들여다 보면 우리 신앙의 제일 기초와 핵심이 되는 이 부분에서 항상 무너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갖다 드려야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우상처럼 숭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하여, 이런 근본적인 오해를 우리 마음속에서 뽑아 버리라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인 것입니다.

세번째 시험

예수께서 당하신 세번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님을 높은 산에 데리고 가서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 만국을 다 주겠다는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으로 마지막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은, 말하자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일을 마귀가 잘 알고 있기에.. 단 하나의 조건, 자기에게 경배하면 이 목적을 쉽게 이루도록 해주겠다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원하는 목적을 이루어주겠다는 마귀의 유혹과, 이를 물리치시는 시험의 내용 속에서 우리는 이 시험이 가지는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세상을 구하는 일이 예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세상을 구하는 일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일이라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즉 예수님의 진정한 목적은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동원할 때, 우리가 먼저 목표와 내용을 정하고 하나님에게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과 수단으로서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이는 세상 모든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신을 잘 달래서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종교심의 근본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뿌리깊은 죄인 된 속성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마귀의 시험에 예수님의 답변이 바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라”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시험에 늘 무너집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이라는 명분아래 그것을 이룰 수 있다면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이루도록 해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주인,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목적과 방법을 정하시는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라” 이것이 세번째 예수님께서 물리치신 시험의 본질입니다.

말씀을 맺으며..

예수님께서 당하신 세번의 시험, 즉 첫 사람 아담이 실패했던 세번의 시험을 통해 드러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요 모르는 대상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모르는 대상을 어떻게 바르게 섬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도, 무엇을 원하시는 지도 모론 채 어떻게 그분께 순종하며 사랑하고 섬길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에는 온통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무엇을 원하시는 지 알려주는 정보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에 대한 이해가 쌓이게 되면 될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히고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사탄의 유혹, 떡을 만들어 너를 증명해봐라, 뛰어 내려 하나님을 시험해봐라.. 너의 목적을 쉽게 이루어라 하는 세상의 유혹앞에 늘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우릴 대표하여 시험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 그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늘 기도와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하니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평안과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모두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성도여러분 다 되시기 이시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