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사사기 6:36-40 ]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사사기 6:36 – 40
왕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죠.
제사장도 잘 알려져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사사’는 조금 낯선 단어 아닙니까?
사사의 한자어를 봤더니 선비사 자에다 스승사 자를 썼어요.
선비선생님.
그런데 막상 성경의 사사기를 보면 선비선생같은 사사가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사사의 영문 표기는 Judge 그러니까 판사, 옛날말로 판관입니다.
그래서 카톨릭 성경에는 사사기를 판관기라고 하기도 하죠.
하지만 사사를 칭하는 ‘쇼페트’ 라는 단어가 꼭 (Judge) 판사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사사는 뭔가요?
모세도,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도 자신들이 왕이 되고 자신들의 자녀가 왕권을 이어받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냥 하나님의 일꾼들이었어요. 모세와 여호수아 이후 사무엘이 등장할때까지 약 350여년동안 가나안으로 이주한 이스라엘 백성들, 열두지파를 이끌 강력한 지도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지역적으로 또 일정기간 동안 필요에 따라 이스라엘의 지도자 역할을 한 인물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사사라고 불렀어요. 드보라, 아비멜렉, 입다, 삼손, 사무엘, 그리고 오늘 함께 나눌 기드온 등이 바로 사사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을 사사로 세웠을까요? 당연히 하나님이 세우셨지요. 하나님은 왜 이들을 세우셨을까요?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이미 삶의 기준이 되는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을 지키며 배우며 하나님을 섬길수 있도록 돕는 레위지파를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법을 따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신실하게 살아간다면 그 시대에 사실 특별한 지도자나 왕이 필요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왕중의 왕, 만왕의 왕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이죠.
훗날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사무엘상 8장 7-8절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직접 통치하고 계셨음을 나타내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직접 통치하고 계신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다른 왕을 달라고 하니까 ‘저들이 나를 버렸다’ 라고 말씀하시는거죠.
사무엘은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왕이 생기면 그 왕이 그들을 부리며, 그들을 이용하며, 그들의 많은 것을 빼앗아 갈것이라고 알려주지만,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왕을 달라고 조르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사사의 시대, 이스라엘에 특별한 권력기관이 존재하지 않던 그 시대는 그들을 보호하는 보호자 왕이 없는 시대가 아니라,
그들의 자식들을 종으로 끌고가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들의 재산을 세금으로 거두어 들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들의 자녀들을 데려다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려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시간이었던 거죠.
오직 주시기를 원할뿐 아무것도 빼앗아가려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가장 이상적인 시대였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좋은 것, 가장 훌륭한 것, 가장 가치있는 것을 갖고서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하심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보호하심을 갖고서도 그걸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는 거죠.
돼지목에 진주가 걸린겁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목에 진주를 건 돼지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일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가나안으로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의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죠.
그들이 섬긴 대표적인 우상은 바알과 아세라 였습니다. 주인, 왕이라는 뜻의 바알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어 가나안 땅에 깊게 자리잡은 대표적인 우상이었습니다. 바알은 천둥과 비를 내리게하는 신으로 믿어졌고 풍요의 상징이었습니다. 아세라는 바알과 짝을 이루는 우상으로 풍요를 뜻하는 여신이죠. 사람들은 주로 나무를 깍아 아세라 상을 세웠습니다.
분명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직접 도우심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 왔는데, 이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어요. 풍요를 바라는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다는 겁니다.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자, 여기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가난때문에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 여인은 부잣집의 하녀가 되었습니다. 그집은 아주 부잣집이라 당장 굶어 죽는건 면할수 있었지만, 얼마나 일을 고되게 시키는지 원래부터도 작고 보잘것 없었던 이 여인은 매일 손발이 부르트고 수시로 매맞아 여기 저기가 상처 투성이에, 말한마디 곱게 안하는 주인의 횡포로 이 불쌍한 여인은 죽어야하나 살아야하나.. 하는 눈물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여인은 우연히 주인의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백마를 타고 지나가던 엄청나게 잘생기고 멋진 왕자님을 만났습니다. 그 마을을 지나가던 왕자님은 이 자그마하고 보잘것 없는 한 여인이 상처투성이에다 맨발로 서있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그 여인을 돕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선 따뜻한 말로 왕자님이 그 여인을 위로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고는 그 여인의 주인을 찾아가 이제 그 여인을 자유롭게 풀어주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못된 주인은 감히 왕자의 요청을 거절하고 비싼 몸값을 요구했습니다. 왕자는 그 못된 주인이 괘씸했지만, 몸값을 기꺼이 지불했습니다. 그러나 그 못된 주인은 다시한번 더 비싼 몸값을 요구합니다. 이제 왕자는 더이상 그 못된 주인의 악함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풀어 그 주인 집의 모든 장자들을 잡아 죽입니다.
그제서야 이 악한 주인은 불쌍한 여인을 왕자에게 내어주지요. 왕자는 이 여인을 그의 성으로 데려다가 깨끗이 씻기고 상처를 치유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며 귀한 옷을 입혀 단장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왕자의 아내로 삼습니다.
해피 앤딩이죠. 그 여인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자 그렇다면 이 여인은 그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왕자님과 행복하게 가정을 이루고 잘 살았다가 맞는 답이겠지요. 누가봐도 이 이야기의 결말은 이런게 맞아요.
그런데요 이 여자가요, 그렇게 큰 은혜를 받아놓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성안에서 바람을 핍니다. 다른 남자를 쫓아갑니다. 왕자를 배신합니다. 이 여인의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 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한 이스라엘. 풍요를 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을 넘어서지 못한 이스라엘. 바알과 아세라에 빠져 자신을 구원해준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은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구원하심, 하나님의 도우심보다 당장 오늘의 헛된 것들을 향해 온힘을 다하여 달려가는 타락한 일부 교회와 그렇게도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천지니, 통일교니하는 이단보다 더 무서운 이단은 기복신앙, 맘모니즘 신앙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풍요에 대한 갈망이라는 우상은 마치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다가와 신실한 성도를 무너뜨리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값은 고통과 고난과 죽음이었죠. 하나님은 자신을 배신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주변에 있던 민족들을 통해서 채찍질 하십니다.
그 채찍질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울며불며 여호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죠. 우리같으면 ‘웃기지 마라, 그냥 니 죄값을 받아라..’ 이게 정답인데, 하나님은 안 그러셨습니다. 하나님은 울부짓는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시고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신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사사기 6:1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사사기 6:6
미디안 민족은 이스라엘과 같이 아브라함의 뿌리에서 나온 민족이었습니다. 모세의 처가이기도 했죠. 그런데 지금 이 미디안 민족이 이스라엘의 적이 되어서 끈질기게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못살게 구는 중입니다.
원래 유목민이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살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대주고, 잡초를 쳐가며, 잘가꾸면 수확의 시간이 오지요. 그런데 이 미디안 사람들이 아무때나 쳐들어 오는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사를 짓게 나뒀다가 수확하려고만 하면 쳐들어와서 싹 가지고 가는 겁니다. 얼마나 약올라요,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거의 다 됬는데.. 수확만 하면 잘 살겠는데..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걸 피해 보겠다고 산으로 도망가서 웅덩이도 파고 굴도 파고 해서 거기에 숨어 사는겁니다. 한심하죠. 잘살아 보겠다고 있는짓 없는짓 다해가면서, 여호와 하나님도 배신하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사는데 삶의 형편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겁니다. 안살아지는 겁니다.
그중에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용사중의 용사로 기억하는 기드온은 지금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밀은 넓은 공터에서 소의 힘을 빌리거나 작대기로 쳐가면서 타작을 했죠. 성경에도 타작마당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사기 6:11은 기드온이 타작을 하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사사기 6:11
당시에 포도주틀은 바위를 웅덩이 파듯 파서 만들었는데, 우리 한국에 대중 목욕탕의 온탕 냉탕처럼 그렇게 생겼습니다. 미국으로 생각하면 조금 큰 욕조같은 모습이죠.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들킬까 봐 거기 쪼그리고 앉아서 지금 밀을 타작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먹고 살려고 참 애쓴다..’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애잔하죠. 그런데 이렇게 초라하기 짝이 없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기드온을 이렇게 부르죠.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사사기 6:12
아니, 미디안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 밀 한줌 빼앗길 까봐 조마조마 해가면서 포도주 틀에서 쭈그리고 밀을 타작하는 기드온이 무슨 큰 용사입니까. 바람불면 훅 날아갈 것 같은 비실비실한 사람을 보고, 잔뜩 겁을 먹어 한없이 웅크려져 있는 사람을 보고, ‘큰 용사여..’ 이러면 얼마나 웃깁니까. 그건 거의 놀리는 말 같습니다.
기드온이 당장 반발하지요. ‘용사는 무슨..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요?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 났나이까..’ (사사기 6:13)
오늘날에도 우리가 흔히 듣는 질문 아닙니까.
‘아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요.. 그런데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 거예요?’
‘왜 세상에 전쟁과 기근과 질병이 넘쳐 나는 거예요?’
그 이유에 대해 우린 이미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세상의 고통의 원인은 죄 입니다. 죄가 고통과 고난과 죽음을 가져오지요.
‘어, 난 이런 일 당할정도로 죄를 저지르지는 않은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겁니다. 맞아요, 그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죄는 누군가의 고통과 고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러한 고통과 고난과 연약한 자들의 눈물을 외면하시나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고통받는 당신의 백성을 버리시나요? 원수 마귀의 손에 넘겨주시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사사기 6:13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거라고 말하는 기드온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사사기 6:14
‘아니, 하나님이 있다면 사람들이 왜 이렇게 고생을 해요?’
‘아니, 하나님이 있으면 왜 이렇게 사람들이 아파야 해요?’
‘우릴 버리신 거잖아요..’ 라고 투덜대는 그에게
“그래, 맞다. 그들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니까 네가 가서 도와라. 그러니까 내가 너를 보내는 것 아니냐.”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보면서 하나님이 있기는 어디있어 하고 투덜대면 뭐가 바뀝니까?
“네가 하거라! 네가 도와라! 그래서 내가 너를 보내는 것 아니냐!” 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드온은 이 음성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두번 세번 확인해 가면서 엄청난 일들을 차곡차곡 해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기드온은 바알과 아세라상을 찍어 넘어뜨리고 아세라상으로 장작을 태워 하나님께 수소를 잡아 번제를 드렸습니다.
용감하게 고작 300명의 병사들로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연합군 10만이 넘는 적들과 싸워 이겼습니다. 기드온은 연약하였고 확신할수 없어서 두번 세번 확인해가며 나섰지만 ‘네가 너의 힘으로 그를 도우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아픔을 보십니까?
세상의 슬픔을 보십니까?
누가 그들을 돕겠습니까.
“네가 도우라, 너의 힘으로..”
기드온에게 하신 그 말씀, 오늘도 주께서 연약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믿으시기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