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엽 목사
[ 창세기 3장7절 ]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세기 3:7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후에 최초로 한 행동이
무화과 나무잎으로 치마를 엮어 몸을 가리는 행동이었다고
말합니다
벗은 몸이 서로에게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부끄러움, 수치심은 남을 전제로 하는 감정입니다
나는 남들보다 못생겼다
나는 남들보다 키가 작다, 뚱뚱하다, 말을 잘 못한다
이게 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이유죠
나와 남이 다른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데
그 다른 것을 올바르지 않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부끄러움, 수치심의 감정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면
이는 우리의 삶 가운데 2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열등감이다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은 자꾸만
숨기려고 하거나 포장하려합니다
키가 작아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은
키가 커 보이려 남몰래
키높이 구두를 신어보기도 하고
뱃살이 늘어져 챙피한 사람은
뱃살을 감추려 일부러
펑퍼짐한 옷을 입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이옷 무지 편해..’ 라고
묻지도 않는 말을 자꾸만 하죠
말을 잘 못하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말없는 척
근엄한 척 해보기도 합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 가난이 참 챙피했었습니다
좁은 집 단칸방에 다섯 식구가 사는 것도 챙피했고
버짐이 편 창백한 얼굴이 너무 창피했습니다
집이 가난한 것이 내 잘못도 아닌데 괜히 챙피했습니다
그래서 가난의 티를 안내려고
무진장 애를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어디 사는 지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집에가는 길을 일부러 뱅뱅돌아
반대방향으로 갔다가 친구들이 사라지면
그때야 비로소 혼자 집에 오곤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버짐이 핀 창백한 얼굴이 창피해서
엄마 립스틱을 몰래 볼에 문질러
볼그작작한 볼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가난해 보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기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청소년기를 보냈던 나에게
지끔까지 남아있는 기억은
늘 숨기고 감추었던 것이 들킬까봐
조마조마 했던 불안과 두려움의 기억뿐입니다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대한 두번째 반응은
믿기 힘들겠지만 우월감과 교만함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열등감의 또 다른 이름이 우월감과 교만함이기 때문입니다
열등감이나 우월감이 있는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자존심이 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존심이 강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남 모를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습니다
저는 자존심이 무척 강합니다
별거 아닌 말 한마디에 자존심이 상해 감정이 폭발하기도 합니다
얾마 전에도 직장에 출근한 아내의
‘아이들 밥 챙겨주었느냐’는 전화에
내가 집에서 애들 밥 챙겨 주는 사람이냐고
뜬금없이 버럭 소리를 지른 적이 있었습니다
아내로서는 집에 있는 내가 아이들 밥챙겨주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여
아무 생각없이 한 말인데
늘 마음 한구석에는 밖에서 일하는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경제 문제를 시원스레 해결해 주지 못하는
미자립교회 목사로서의 자존심이 뒤엉켜
버럭하고 화를 내는 방법으로 표출되고 만것이죠
제가 만약 대형교회의 자존감이 충만한 목사였다면
애들 밥 챙겨주었느냐는 아내의 전화에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존심은 자존감과는 다릅니다.
비슷하게 생긴 단어지만 이둘은
다르다 못해 정반대의 개념이라고 보면 됩니다
자존감이 올라가면 자존심은 내려갑니다
반면에
자존감이 내려가면 내려 갈수록
자존심은 세 집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끄러움, 수치심의 감정은
남, 타인을 전제로한 감정이다
수치심,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때
두 가지 반응을 하게 되는데…
첫번째로는 열등감에 휩싸여
수치심을 유발하는 원인을
숨기려 든다, 감추려든다
감추것이, 열등감이 들킬까봐 불안해 하고 두려워한다
두번째로는
수치심을 유발하는 원인을
다른 모습으로 포장하고 과장해 우월감에 휩싸인다
포장된 모습이 들킬까봐 역시 불안해 하고 두려워한다
결국 부끄러움, 수치심의 감정은
그것이 열등감으로 나타나든
우월감으로 나타나든 동일하게
불안과 두려움, 고통의 감정으로 귀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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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에는 인류의 창조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본래 한 몸이었습니다
아담이 잠든사이에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해
하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잠에서 깨어나 하와를 처음 본 아담의 첫마디는
나의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로다
이말은 곧
‘너는 바로 나이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서로 벌거벗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한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후
다른 말로 원죄를 지은 후
눈이 밝아져 서로가 벗을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만들어 입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자신의 벗은 몸이 수치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원죄란
나와는 다른
‘남’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가지게 된 사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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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벌거 벗은 채로 엄마에게서 태어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몸인 것처럼
아이와 엄마는 한몸입니다
서로 벌거 벗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서로 벌거벗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관계가 또하나 있습니다
바로 부부관계입니다
성경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관계, 혹은 남편과 아내 관계로 묘사하는 것은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온전히 하나인 관계에 대한
메타포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릴적 엄마따라 목욕탕 갔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순간부터
엄마따라 목욕탕에 가려하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자의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의식이란 무엇일까요?
자신을 남들과는 구별된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여기는 의식입니다
즉 나와 남을 구분짓는 의식을 말합니다
남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
감정이 발생하게 됩니다
남이 나를 좋게 봐줄 때는 기쁨이라는 감정이
남이 나를 미워할 때는 슬픔이라는 감정이
남이 나를 무시할 때는 분노라는 감정이 올라옵니다
모두 혼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입니다
기쁨과 슬픔, 놀람, 분노, 즐거움..
결국 타인과 관계속에서 느끼는 나의 감정입니다
우리는 이런 감정들 중에서
기쁨이나 즐거움등
나에게 좋은 것만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감정은 결국 하나의 감정의 변종이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즐거움, 행복은 사랑의 감정입니다
반면 슬픔과 두려움 불안감은 사랑이 배제된 감정입니다
결국 모든 감정은 사랑이라는 한가지 감정의 변종인 셈입니다
우리는 좋은 감정만을 골라서 누릴 수 가 없습니다
모두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아예 감정 자체를 포기하든지 해야지
내가 좋아 하는 감정만 골라서 느낄 수 가 없다라는 말입니다
감정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부정하는 일일테니
결국 우리는 모든 감정을 긍정해야만 합니다
기쁨과 함께 슬픔이라는 감정을 긍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함께 미움이라는 감정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는
기쁨과 슬픔이, 사랑과 분노가
마치 동전의 앞뒤면 처럼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장애인이 많습니다
장애는 고통이며 불편함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장애를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합니다
주차장에는 장애인을 위한 주차공간이 별도로 마련되고
계단 출입구에는 경사로를 의무적으로 만들게 하여 장애인을 배려합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선진국일수록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성숙할 수록
제도화되고 또한 잘 받아들여 집니다
장애인을 비롯한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언제나 끊임없이 고려되고 개선되어야 합니다
약자에 대한 사랑과 배려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배려함이
(나와는 구분되는)
남을 전제로한 배려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어떠한 선행을 하더라도
내가 남에게 베푸는 행위는
누군가에게는 우월감으로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열등감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배려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사랑의 완성이란
우리가 이땅에서 확인할 수 있는 천국의 모습
이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구원의 모습입니다
그 ‘사랑의 완성’이란 다름아닌
나와 남을 한 몸으로 여기는 지체의식, 한몸의식의 회복입니다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마음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마음입니다
내 몸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라는 뜻일 겁니다
마치 죄짓기 전의 아담이 하와를 보는 것처럼
내 살중에 살이요 뼈중에 뼈로다
너는 곧 나이다
라고 여기라는 뜻일 겁니다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여길때
우리는
나와 너로 구분이 됩니다
그러나 장애인을 장애인이 아닌
나의 지체로 여길 때
장애인은 나에게 더이상 장애인이 아니게 됩니다
그저 나의 팔과 나의 발이 다르듯이
나와 다른 모습을 가진 나의 지체일 뿐입니다
저는 사랑의 보다 본질적인 이름은
‘하나’ 라고 생각합니다
이 하나는 ‘하나됨’이라는 연합의 개념하고는 다릅니다
서로 다른 둘이 합쳐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한몸, 하나임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앎이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완성을
여렴풋이나마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남을 구분하는 개체의식이
우리에게 부끄러움, 수치심의 감정을 가지게 하고
그러한 부끄러움의 감정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면
역으로
니와 남을 구분하는 개체의식에서 벗어나
서로가 한몸, 한가족, 한공동체 임을 깨달아
서로에게 하나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 구원받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에는 교만도, 열등감도, 우월감도 없습니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도움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땅가운데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분들 되시기를
성탄을 즈음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