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표목사

이용표 목사

[ 요한복음 21장 15-17절 ]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15-17

새로운 한 해가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하면, 해돋이를 보면서 그 해에 이우러지길 바라는 꿈과 소망을 생각하며 새로운 계획을 세우곤 합니다. 여러분은 올 해 어떤 꿈과 계획을 세우셨나요? 사실 나이가 들면서 새해의 꿈과 소망보다는 지난해에 이루지 못한 것들로 인한 아쉬움과 자책의 무게가 더 크고, 그런 것이 해마다 반복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목표와 계획을 세우기가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어차피 이루지 못할 것인데, 새로운 꿈과 계획이 무슨 소용이 있나”라는 자조적인 감정에 빠져드는 것이지요.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렇게 새로운 꿈과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은 새해를 맞이하면서, 변화를 꿈꾸거나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까요? 어떤 일이나 결심을 실행하지 못한 실패의 경험, 또는 무거운 죄책감, 또는 신체적인 장애의 어려움이나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 또는 마음에 있는 상처 등이 원인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며, 새로운 꿈과 목표를 세우거나, 삶의 변화를 위한 결단과 노력을 하는데 어려움을 갖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을 이기게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실패하고 포기했던 자리에서 다시 꿈과 목표를 세우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오늘은 새해 첫 주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팔복 메시지 대신에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도 뼈저린 실패를 경험하고 인생의 변화와 새로운 목표를 꿈꾸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동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광야로 도망을 가서 40년의 세월 동안에 패배감과 좌절감으로 자신 꿈꾸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신약에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저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순간의 잘못으로 씻을 수 없는 패배감과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 경험은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을 것이고, 그로인해 아마도 사도의 삶을 다시 살 수 있다는 용기를 내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먼저 베드로에게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 같은 실패의 경험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 베드로의 마음속 트라우마

  예수님이 잡혀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가졌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예언하셨을 때,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 과정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들이 보낸 사람들에게 잡혀갔을 때, 베드로는 그 뒤를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 집의 마당에 사람들과 함께 불을 피우고 앉아있을 때, 한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라고 부인합니다. 다른 두 사람이 “너도 그 도당이다”, “너도 그와 함께 있었다.”라고 하자 그때마다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데 점점 강도가 세집니다. 처음에는 그냥 모른다고 하더니, 그 다음에는 맹세를 하면서 모른다고 하고, 세 번째는 저주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예수님의 예언대로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이에 나가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심히 통곡합니다. 그가 통곡하는 장면이 나오는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2:60-62] 말씀입니다.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누가복음 22:60-62

  이 말씀에서 우리가 오늘 주목해서 보았으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61절의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저주하고 맹세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자마자 닭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자기가 부인할 것을 예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갑자기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눈을 돌립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과 눈이 딱 마주칩니다. 예수님도 고개를 돌려서 베드로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하필이면 그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 베드로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닭 울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예수님을 봤을 때, 만일 예수님의 뒷모습을 보았다면 어땠을까요? 예수님의 눈을 보는 것과 예수님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동엽 목사님의 사모님이 올린, 서부지역 오프라인 모임이 담긴 유튜브 영상을 보면 이동엽 목사님이 장애인을 볼 때는 그이 눈을 본다고 말씀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눈을 바라보면 장애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보인다고 했었지요. 참 많이 공감이 되는 말씀입니다. 눈은 그 사람의 내면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눈은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거짓 없이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빛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읽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그 순간에 예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예수님은 이미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모진 고문을 당하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는데, 그 시간 동안 마치 형장을 끌려가는 사형수와 같이 죽음의 공포를 겪으시고, 마침내 죽음의 고통과 절망에 직면하시게 됩니다. 그 모든 과정을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 경험하시는데, 그 순간 예수님의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지독한 외로움이 함께 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지만, 동시에 우리와 같은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인간적인 고통과 두려움과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실 수밖에 없고, 그것이 예수님의 눈빛에 고스란히 담겨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런 눈빛을 마주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비열하고 나쁜 짓을 했는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며 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외면한 예수님의 그 눈빛이 오래도록 그의 머릿속에 남았을 것입니다. 그 눈빛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며 배신하고 버린 나쁜 놈이야”라는 생각이 밀려왔을 터이고, 그래서 아마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같은 무기력감이 그를 짓눌렀을 것입니다. 이 경험이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그의 발목을 잡고, 그가 예수님을 위한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마음을 갖게 하였을 것입니다.

* 베드로를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예수님

  그런 베드로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과 같이 베드로에게 뜬금 없는 질문을 그것도 세 번이나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왜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셨을까요? 베드로를 믿을 수 없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확인해 보시기 위함이었을까요?

베드로는 누구보다 적극적인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하자 그 즉시 무덤으로 달려갔고 가장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갔던 제자입니다. 그의 마음에 트라우마가 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예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세 번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비록 예수님을 외면하고 배반한 큰 죄를 저지르긴 했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다시 살고 싶은 간절함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나는 예수님이 고통과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너무 힘들어 하시는 순간에 그분을 버린 놈이야, 이런 내가 감히 무얼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꿈도 새로운 목표도 새로운 소망도 새로운 계획도 갖지 못하도록 자꾸만 그의 발목을 잡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아픈 마음을 읽어주시는 것입니다. “너의 마음을 내가 다 안다. 너의 아픈 마음을, 너의 실패의 고통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고 싶은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이고 있는 너의 마음을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이제 잊어버리고 힘을 내서 다시 시작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누구에게도 꺼내놓지 못하고, 마음속에 꼭꼭 감춰둔 베드로의 아픈 기억을 꺼내게 하시고, 베드로가 더 이상 거기에 매이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질문을 하실 때마다 “내 양을 먹이라”라는 말씀을 더하십니다. “베드로야! 내 양을 먹이는 것. 그것이 네가 할 일이고, 너에게 어울리는, 너다운 일이야.” “내가 너의 마음을 잘 알아. 그러니까 이제 다시 시작해. 네가 포기했던 그거. 내 양을 먹이는 일, 그거 다시 시작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우리도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예수님

  오늘 말씀을 보면서,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의 일부가 아닌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들에도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다시 실패할 거야’, ‘내가 감히 어떻게…’라는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그 무언가가 우리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실패의 경험들, 벗어날 수 없는 죄책감, 패배의식, 비교의식, 환경과 조건에 대한 좌절감 등등입니다. 또는 나의 마음이 위축되게 만드는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는 ‘나는 누군가에게 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학습된 무력감으로 새해를 맞이해도 무언가를 계획하고 실천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거나, 평소에도 새로운 꿈과 소망을 갖는 일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나 생각은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끄럽고 창피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시 상처를 받을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를 만나주신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똑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안다. 내가 네 마음을 안다. 너의 아픔을 알고, 슬픔을 알고, 고통을 안다. 그래서 내가 홀로 외로이 채찍에 맞았고, 비난과 웃음거리가 되었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으며, 내 몸의 모든 물과 피를 조금씩, 조금씩 흘리는 참혹한 고통을 겪었고, 죽음의 두려움에 시달렸으며, 마침내 죽음까지 경험했던 것이란다. 그래서 너의 아픔을 내가 안다.” “그런데 있잖아?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도 나는 안다. 그러니까 다시 시작해봐.”라고 말씀하십니다.

* 다시 시작하기 위한 질문

  우리가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가?”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시려는 일이 있을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시고 이 땅에 보내신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그리고 그 마음을 예수님께 드리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꿈을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이 생각하지만, 때로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의미가 되고, 위로가 된다면, 그에게 짜증내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언제나 밝은 미소로 대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 우리 각 자, 그리고 우리 믿음의 공동체도 무언가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남을 돕고 있습니다. 비록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조건에 있더라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나도 남을 돕는 일이나, 예배를 돕는 일, 또는 복음을 전하거나, 이웃에게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 또는 누군가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 등등. 무엇이든 꿈꾸고 그것을 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크게 성공하느냐를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찾아 가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보시며 우리가 그것에 집중할 때, 우리에게 있는 지극히 작은 것에 하나님의 능력을 더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올 한 해 우리 좋은친구교회 성도들이 각자 그런 꿈을 꿈과 동시에, 우리 공동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같은 꿈을 꾸고 이루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