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목사

이인엽

[ 출애굽기 3장 3-6절 ]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출애굽기 3:3-6

어느날 우리가 자주 다니던  뒷산에 올라갔는데 그 산에 오래된 소나무 한그루에 불이 붙었어요.

근데 그 얇은 솔잎이 타들어가지 않는 모습을 본다면 어떨까요. 원래 우리말에 불구경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냥 불이나도 구경거리가 되는데 불이 붙었지만 타들어가지 않는 나무를 본다면 그냥 지나치기는 좀 어려울것 같죠.

신비한 모습,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지루하던 모세는 이 신비한 광경을 만났습니다. 일상적이지 않은 광경, 정상적이지 않은 일들은 구경거리가 되지요. 40년을 그저 지루하게 지내오던 모세가 신비한 광경을 만납니다.

…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출애굽기 3:2-3

모세는 불붙은 떨기나무를 보러 나옵니다. 이렇게 신기한 광경을 구경삼아 보러오는 모세를 하나님이 부르시고 만나주십니다. 이것이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시작한 처음의 모습입니다. 

모세는 아무런 계획도 없었고, 모세는 하나님을 위해 일할 생각도 없었고, 모세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신의 형제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생각도 없었고, 모세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거나, 하나님을 백성에게 전하는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있었다 하더라도 미디안 광야 40년동안 다 없어졌겠지요. 더더군다나, 칼 한자루 없이 애굽을 누르고 가나안으로 민족을 이끌어 나갈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그냥 지루했어요. 그냥 너무 지루해서 불구경 간거에요. 그런데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때로 이렇게 아무런 예고없이 그렇게 우리에게 갑자기 맡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는 이렇습니다.

오늘날, 그리고 2천 여년의 시간동안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콜링(calling) 을 받아왔고 그 부르심에 따라 하나님의 일, 즉 예수를 믿으며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여 왔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목사만 하나님의 콜링(calling) 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게 아니죠. 아이가 자라서 성숙해지면 자신도 아이를 낳고 아이를 가르치듯이 성도도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지면 내가 뭘 또 하나님께 받을까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굴 도와 하나님의 일을 할수 있을까를 기대하게 되는거 아닙니까.

바로 이런 고민 안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마음속에 울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콜링(calling)을 확인하게 되는거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은 때로 너무 천천히 그리고 일상처럼 다가와서 그것이 부르심인지 조차 잘 인식하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콜링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콜링의 모습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모세는 어떤 모습으로 콜링을 받았습니까. 인간적인 계획도 없었고 신앙의 성장을 위한 체계적인 준비과정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갑자기 나타나셔서 갑자기 일을 맡기셨어요.

불구경 나온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내겠다. 

그러니까 너는 이제 가라. 바로한테 가라.

이스라엘 백성들 데리러 바로한테 가라.”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지독한 지루함으로 멍해져있는 모세라 하더라도 이건 너무 기승전결이 없는 말이죠. 연결이 안되는 말이에요. 따를수가 없는거에요.

모세가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계속 마음에 저기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마음을 주셔요. 그리고 어느날 마음을 깊게 울리는 말씀을 듣게 되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가라, 가서 구하라…” 이런 음성을 들으면, 뭘 망설이겠습니까. 가겠죠, 아무리 위험해도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가겠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구요. 방금전까지 모세는 그냥 양을 치고 있었어요.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강하게 거부합니다. 모세가 못한다고 펄쩍 뜁니다.

‘제가 할일이 아닌것 같은데요.

저는 못하겠는데요.

저는 할 마음이 없어요.

저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데요.’

모세의 입장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한편 아무리 갑작스럽다 하더라도, 그래도 만유의 주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부르시는데 이 정도로 거부하면, 하나님 입장에서도 “그래 관둬, 하지마, 너 말고 사람이 없냐, 하겠다는 사람 많다, 그래 그냥 평생 양이나 치거라” 이러시는게 맞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왜 하기 싫다는 모세를 쓰시려고 하는 걸까요.

못하겠다고 우기는 모세,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달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출애굽기 3:12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겠노라,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한다는 말을 전하면 사람들이 너를 믿으리라, 바로는 반대하겠지만 내가 기적을 일으켜서 그 마음을 돌리리라. 이제 가라 모세야, 걱정말고 가라.”

그렇지만 모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을 안듣습니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출애굽기 4:1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모세가 부르심을 거부합니다. ‘사람들이 내 말을 믿을리가 없어요’ 하면서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에게 모세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뱀으로 만드시고 다시 지팡이로 돌려 놓으십니다. 또한 그의 손은 문등병이 걸렸다 낳게 하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믿지않는 자들에게 이 기적을 보여주라 하시죠. 그래도 안 믿으면 나일강물을 퍼서 땅에 부을 때 피로 변하는 기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설득앞에 모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출애굽기 4:10

이 말의 원어를 보면, ‘난 그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달변가가 아니에요’ 라는  뜻입니다. 참 답답하지요. 계속 못하겠다고 우기는 모세. 계속 일을 맡기시려는 여호와 하나님. 왜, 하나님은 왜 굳이 모세를 쓰시려고 하는 걸까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또 다시 약속하십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출애굽기 4:12

“달변가가 아니라고 걱정하지마. 나 여호와 하나님이 네가 할말을 다 알려줄게. 걱정하지 말고 가거라.”

계속되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모세가 대답합니다.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출4:13). ‘내가 뭐라고, 내가 뭘할수 있다고 나를 보내시려 합니까’

모세의 끈질긴 거부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노하십니다. “…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하시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하나님 (출애굽기 34:6) 이신데도 불구하고 모세의 거듭된 거부에 하나님께서 노하십니다.

그러나 그 노함가운데에서도 모세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형 아론을 기억나게 하시며 그를 모세의 조력자로 세우실것을 약속하십니다. 끈질긴 모세의 거부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것이 나와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  

이사야 43:1-3

하나님의 선택!

우리의 지혜로는 전혀 알 길이 없는 하나님의 선택의 이유. 그러기에 선택받은 자로서 그저 은혜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어떠했건 간에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선택하셨고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떠하든 간에 여호와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셨고 선택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시길 소망합니다.

이제 자신의 의지를 꺽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인 모세는 자신의 장인 이드로를 찾아갑니다.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출애굽기 4:18

그 큰 일을 겪고서 제대로 말도 못하죠. 엄청난 부르심과 임무를 갖고 가는데, 형제들 살아있나 보러 간다니요. 모세가 본인의 사명을 확신하지 못한건지, 아니면 장인 이드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지.. 성경은 잘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못해 부르심을 받아들인 모세의 발걸음이 얼마나 소극적이었는지 분명히 느낄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극적인 자세로 과연 바로를 만나 제대로 일을 감당할수는 있을까요.

예전에 집을 떠났던 야곱이 수많은 짐승과 낙타와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것과는 참으로 대조적으로 모세는 처자식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참 초라한 귀향이죠.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출애굽기 4:20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에게는 야곱과 같은 재산이 없었습니다. 초라한 나귀에 가족들을 태웠습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의 지팡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맡기신 그 일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었으나 그저 초라하고 소극적으로 투덜투덜 걸어가는 모세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계속해서 모세가 할일을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갑자기 이상한 구절을 우리에게 전하지요.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출애굽기 4:24-26

안하겠다는 모세를 어르고 달래서, 화까지 내시면서 애굽으로 이끌어 가시다가, 모세의 어깨를 토닥여가며 가서 할일을 복습해가며 도란도란 이야기해 가시던 하나님은 왜 갑자기 모세를 죽이려 하셨을까요.

그동안 쌓였던 화가 폭발하신 걸까요. 생각해보니까 너무 기분이 나쁘셨을까요. 안한다는 사람을 불러다가 억지로 데려가시다 말고 왜 이러시죠. 모세가 뭘 잘못한거죠. 잘 이해가 되시나요 이 상황이?

사람들은 세가지 타입으로 나뉩니다. 늘 무서운 사람, 늘 안무서운 사람, 전혀 안무섭다가 갑자기 무서워지는 사람. 누가 제일 힘듭니까? 당연히 세번째 사람이죠. 전혀 안무섭다가 갑자기 무서워지는 사람. 하나님이 이런 분이신가요? 지금 이 구절은 변화무쌍한 하나님의 성격을 알리는 걸까요? 도대체 왜 하나님은 모세를 갑자기 죽이려 하셨을까요?

이해하기 어려운 이 구절은 그러나 매우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4장24절 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서..’ 에 사용한 히브리어 ‘와이프게쉐후’는 사이좋은 만남, 우호적인 만남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적대적인 만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에게 적대감을 갖으시고 애굽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러가다 쉬고있는 모세를 죽이려 찾아오셨다는 거지요.

왜 그러신거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바로 다음 절에 이어지는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의 행동을 통해 얻을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시려는 모습을 보자 십보라가 즉각적으로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냅니다. 할례를 행한거죠.

십보라가 이렇게 즉각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선 몇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로 할례를 어떻게 하나 보거나 해 본적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할례가 뭐냐 하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세째로 자녀에게 할례를 안한 것이 모세를 하나님이 죽일만큼 큰일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하겠죠. 유대인이 아닌 십보라가 이런 경험없이 즉시 할례를 행하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여기 나오는 모세의 아들이 첫째 아들인 게르솜이 아니라 둘째인 엘리에셀이며 게르솜의 할례를 본 십보라가 둘째인 엘리에셀의 할례를 반대했고, 그 결과로 모세가 거의 죽을뻔한 일이 일어났다고 주장합니다.

안하겠다는 사람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강권하여 일을 맡기신 하나님. 그래서 하기 싫은일 한다며 소극적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던 모세의 모습. 그 모습은 참 당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심적인 공감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약속의 상징, 헌신과 성결과 정화의 상징인 할례를 자신의 자식에게 행하지 않은 이유로 모세는 거의 죽을뻔 했습니다.

이러한 모세를 바라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배우십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자 그 시작이 어떻든 간에 이미 그 길로 들어섰다면, 하나님과 지켜야할 약속이 세워진겁니다.

그 약속에 대한 성실한 이행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일을 이루어 가시겠다는 약속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거지요.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될수는 없지만 믿음은 행위의 열매를 만들어 내기에 합당한 행위가 없음은 믿음의 결여를 증거합니다. 부족한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수 없습니다.

‘아 ..내가 언제 하나님일 한다고 그랬어, 억지로 하는거니까 대충하면 되잖아’ 라는 생각 자체가 믿음의 결여를 증명한다는 거지요. 그러면 안된다는 겁니다.

좋아서 했건 싫어서 했건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쥔 자에게는 감당해야할 자세와 확신에 찬 믿음이 요구되어진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 수 없다는 겁니다.

이 일로 십보라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출애굽의 기적의 행로에 함께 참여하지 못하고 아들들과 함께 이드로에게 돌아갑니다. 반면 모세는 완전히 깨어나 결의에 찬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일, 이스라엘을 구하는 일을 위하여 바로에게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던져버릴 수 있는 그렇게 가벼운 일 입니까. 하하호호 재미를 찾으며 소꼽장난 하듯이, 어울려 놀듯이 나의 재미를 찾는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은 생명에 관한 일입니다. 그것도 이 세상의 생명이 아닌 영생과 관련된 일입니다.

얼떨결에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 모세,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엄청난 일에 참여하였으나 할 맘이 없어서 소극적인 모세가 하나님의 진노앞에 번득 정신이 들었던것과 같이 하나님의 일이 믿음으로 믿는자를 구원하는 엄청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닳는 은혜가 여러분들의 삶속에 있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그 중요성을 이미 인식하시는 분들에게는 그 긴장감을 그날까지 놓치 않는 굳건한 믿음이 식지 않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