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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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5장 1-12절 ]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장1-12

* 오늘은 예수님의 팔복 세 번째 시간입니다.

  첫 시간에는 천국에 대해 나누었었고, 두 번째 시간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혼의 궁핍함이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온 것임을 깨닫고 영혼의 궁핍함을 세상에 있는 것들로 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자가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애통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이 애통하는 자에 대해 나누겠습니다.

* 애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슬퍼서 울부짖는 것을 말합니다. 너무 슬퍼서 가슴이 아플 때 애통한다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언제 애통할까요? 슬픔으로 가슴을 치며 울부짖어 본 경험이 혹시 있나요? 저는 길을 잃고 울부짖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전철을 타고 서울 시내 종로 3가에 있는 아버지 사무실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갈 때, 아버지 사무실의 직원이 전철표를 잘못 사는 바람에 집을 찾지 못하고 헤매게 되었습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아버지 사무실로 가는 길도 잊어버리고 같은 길을 여러 번 오고 가다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두려움과 슬픔으로 종로 거리 한 복판에서 대성통곡을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자는 제 경험 속의 길을 잃은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께 돌아갈 길을 잃고, 돌아갈 방법을 찾다가 자신의 힘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슬프게 울부짖는 사람을 말합니다.

* 심령이 가난한 자의 애통함이 바로 이런 애통함입니다.

  사람들이 슬퍼하는 데는 여러 가지 까닭이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갖게 되는 슬픔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면, 즉 영혼의 궁핍함이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왔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슬퍼하며 울부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심령이 가난하게 된 근본 원인이 죄의 문제인데,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데,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갈라놓은 죄의 문제를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깊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슬픔이 바로 바로 모든 사람들이 보다 근본적으로 갖게 되는 슬픔이며, 이 슬픔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애통함입니다.

* 세상에 그 누구도 죄인이 아닌 자가 없으며 자신의 힘으로 죄를 이길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해도, 끊임없이 반복해서 죄를 짓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나 괴롭고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우리는 죄 앞에 너무나 무기력합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사도 바울도 거듭해서 죄를 짓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로마서 7:24]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사도 바울도 자신의 힘으로는 죄를 이겨낼 수 없음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들이라고 죄를 짓지 않으며 살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죄라는 것이 비단 법을 어기지 않는 것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도 죄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행위로 저지르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험담하며 탐심을 가지면 그 역시 죄인 것입니다. 우리가 고의가 아닌 실수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궁핍함을 채우는 길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임에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마음에 품고 있다면 그것 역시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궁핍함을 깨달아 심령이 가난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사도 바울과 같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고백을 필연적으로 하게 됩니다.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사람,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람, 그 죄에 대하여 무기력한 자신을 깨달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슬퍼하며 우는 것, 애통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서 주저앉아 울고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예를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눅 18장 : 10-14]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0-14

  이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신의 죄 때문에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며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반면, 세리는 자신의 죄와 그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 누가 애통하는 자이겠습니까? 바로 세리가 애통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스스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주저앉아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죄 때문에, 그저 울고만 있는 이 세리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자입니다. 아버지 사무실을 찾아서 아버지에게 돌아가거나 엄마가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부모의 돌봄을 받아야 다시 살 수 있는데, 그 길을 잃어버려서 그 길을 다시 찾으려고 여러 번을 같은 길을 오가다가 결국 스스로 그 길을 다시 찾을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하여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 한 복판에서 부끄러움도 잊은 채 앉아서 울부짖는 어린 아이처럼, 자신이 살 길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임을 깨닫고 돌아가기 위해,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 보지만, 죄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주저앉아 가슴을 치며 “오로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울부짖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서 두 번째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 그렇게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에게 오늘 예수님은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본문 4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4

  이 말씀에 나오는 ‘위로’라는 단어에는 ‘곁으로 부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다시 곁으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복을 받습니다. 곁으로 불러주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관계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생겨난 영혼의 궁핍함을 다시 하나님 곁으로 불러서 관계를 회복하심으로 다시는 궁핍하지 않을 것들로 영원히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앞에서 읽은 누가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죄를 깨닫고 슬퍼하는 세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못했지만, 세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더 이상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종로 사거리에서 서럽게 울부짖었던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아이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습니다. 슬프게 울부짖고 있는 그 아이를 안쓰럽게 지켜보던 가게 아저씨가 우는 까닭을 물었을 때, 새까맣게 잊고 있던 아버지 사무실의 전화번호가 생각이 났고, 그 아저씨가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줘서 아버지가 그 아이를 찾으러 왔습니다.

* 세상의 모든 사람은 길을 잃은 아이와 같습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생이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 길로 저 길로 헤매지만, 죄로 어두워진 이성과 감성은 진정한 행복을 찾아 누릴 힘이 없습니다. 때로는 길을 찾은 것 같아서 기뻐하고 평안을 누리지만, 그것이 영원할 수 없음을 깨닫고 공허함과 더 깊은 절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영혼의 궁핍함을 채우기 위해 찾는 것들을 모두 누려본 솔로몬의 고백 속에서 우리는 그런 공허함을 보게 됩니다.

[전도서 1:14]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도서 1:14

  이 말씀은 영혼의 궁핍함을 채우려는 사람들의 모든 인간적인 노력의 끝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다 소용없는 것이더라는 솔로몬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것임을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 그런데 애통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를 다시 예로 들자면, 종종 놀이동산에서 부모를 잃고 우는 아이들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신기하고 재미난 것들에 빠져 자신이 부모 곁을 떠난 것을 모르고 있다가 결국 부모를 잃은 것을 알고 두려움과 슬픔으로 울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취하여 애통할 줄 모르는 사람의 모습을 예수님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32]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누가복음 7:32

  우리가 사는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기 위해 앞을 보고 달려갑니다. 하지만 그런 삶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들보다 있는 척, 남들보다 아는 척, 남들보다 센 척하고, 행복하고 성공한 척하며 살아가면서, 어느새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옆에서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굳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인생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눈물을 애써 외면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갈 길을 잃었다는 인생의 근본적인 슬픔을 느끼고 울부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애통하는 자의 눈물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죄의 문제를 깨닫고 흘리는 슬픔의 눈물은 회개의 눈물입니다. 그 눈물이 나에게 있는지, 그렇게 울어본 적이 있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선포하신 것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회개하며 애통하는 자는 팔복의 궁극적인 복인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내 죄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음을 깨달았는데도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 나의 무능함 때문에 가슴을 치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울부짖으며 회개하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자입니다.

*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애통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종로 거리에서 길을 잃고 울부짖는 아이를 찾아온 아버지처럼, 죄 때문에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세리에게 이제 너는 죄인이 아닌 의인이다라고 말씀해 주신 것처럼. 애통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 죄 값을 대신 치러주셨음을 알게 하시고, 이제 다시 하나님 곁에 부르셨음을 알게 하심으로 그 마음을 위로해주십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의 공허함을 채워주시고, 구원의 은혜와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슬퍼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내가 진정으로 내 죄 때문에 슬퍼했던 적이 있었는가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깊은 회개의 눈물을 흘려 본 경험이 있다면 이미 그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경험이 없다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죄를 깨닫고 애통함으로써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