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엽목사

이동엽 목사

[ 마태복음 8장23-24절 ]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마태복음 8:23-24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이유는 구원받기 위함입니다

무엇이 구원일까요?
죽어서 천국가는 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고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천국가는 것이 좋기야 하겠지만
그것이 죽음 이후의 일이라면
지금 이 땅에서의 나의 삶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의 이유를 좀 더 솔직히 말한다면
이 땅에서의 평안과 행복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우리가 종교생활을 하는 솔직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해서
(교회 다니고 신앙 생활한다고 해서)
우리가 원하는 ‘행복한 삶’,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지는 않습니다

교회에 나간다고 해서
삶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거나
삶의 고통이 줄어들 것 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은
고통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녀서 혹은
신앙을 가져서
평안해 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가르침을 통해
지금의 현실과 상황이 이해되고,
현재 내가 겪는 고통의 의미가 이해되고,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뜻에 공감되고 동의하게 될 때
비로소 평안해 집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천국에 도달해서 천국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어떤 곳임을 깨달아서
천국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병이 들었든, 사업에 실패했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내가 얻게 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을 때

즉, 나에게 닥친 이러한 상황의 의미가
이해되었을 때 비로소
평안과 감사를 맛볼 수 있게 된다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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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장에 보면
거친 풍랑속에서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평소 사랑이 넘치시는 예수님과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23,24절에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무서워 떨고 있는 동일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평안히 주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보며 주로 예수님께서
기적으로, 말씀 한마디로
거친 풍랑을 잠재웠다러라.. 역쉬 예수님 짱
이렇게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통해 성경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이 아니라
오히려 풍랑속에 평안히 주무셨다는 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이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며 꾸짖는 모습에 더욱 설득력을 얻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풍랑이라는 바다의 문제,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적은 믿음’이라는 제자들 내부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바깥 외부 환경에 있지 아니하고
믿음의 문제, 즉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이 본문이 기록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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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론으로 돌아 와서
우리는 구원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1차적인 의미는
이 땅에서의 행복과 잘 살기 위함입니다
물론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공통적으로는
생노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구원일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이로부터의 구원을 약속합니다
불교에서는 해탈을 말하고
이슬람은 70명의 미녀가 수발드는 천국을 말하고
힌두교에서는 보다 나은 ‘카스트’ 신분으로의 윤회 탄생을 말하고
기독교 역시 천사들과 함께하는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말합니다
모두 죽음 이후의 근사한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종교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음행하지 마라
도독질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선한 일을 하라

모든 고등종교의 가르침은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결국은 선행을 많이 하여야
절대자, 신의 눈에 들어
천국이 허락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단순히
이렇게 절대자가 세워 놓은 기준을
통과하여 구원을 허락받는 다면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기독교 역시 이방 종교와 하등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종교라는 것이 어떤 절대자에 대한 숭배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굳이 종교하고 한다면
이는 ‘종’ 근본적인’ 교’ 가르침
이라는 ‘근본적인 가르침’ 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이에 동의해서
그 가르침을
자발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하고
그러한 사회 현상을
종교라고 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실 간단 명료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은
서로를 배려하며 사랑하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자신의 기쁨을 서로 나누며
서로를 한 몸, 한 지체로 여기는
가족 공동체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고
종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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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고 말합니다
진리를 깨닫게 되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아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이고
하나님을 아는 자는 영생을 얻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 진리, 하나님, 예수님 모두 같은 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이 곧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리가 이토록 단순하고
명백한 것이지만

그 진리를 아는 것과
내가 그 진리를 삶 가운데 누리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과
나에게 구원은 무엇인가? or 나는 구원 받았는가?
라는 질문은
다른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말로써 설명된 구원, 나에게 이해된 구원은
진정한 구원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어떤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란 아직 언어로 설명되기 이전의
어떤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상태가 나에게 의미있으려면
나에게 설명이 되어져야 합니다
설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내가 구원이 어떤 상태이지
생각이나 상상이라도 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생각이나 상상마저도 언어라는 개념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의자’라는 언어적 개념이 없다면 우리는 의자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결국 나에게 이해되는 구원,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구원은
언어적 필터를 통과한 구원인 것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구원과 나에게 설명된 구원은
각기 다른 차원의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같은 차원의 일처럼
연결하여 생각하기에
혼돈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에 도달한 사람에게서는 구원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구원이 꼭 육체적으로 죽음에 도달해야지만
경험되어지는 그러한 것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굳이 추론하자면
언어로 설명되기 이전의 구원의 상태는

인간의 언어적 활동이 중단되어서
생각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에서 느끼는
무아지경과도 비슷한 어떤 것이 아닐까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의 외적인 모습과 상태는
지극한 평온함과 안도감으로 드러날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구원받은 사람이란
생로병사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마법사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란 다만
생로병사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입니다

이땅 가운데 평범하게 살아가면서도
죽고 사는 문제가 삶의 장애가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바꿔말하면 구원받은 사람이란
모든 면에서 특별해진
몸에서 빛이 나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해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뀐 사람입니다

환경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그어디나 하늘나라를 외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단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삶가운데 이러한 깨달음은 반복적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5. 깨달은 사람의 삶

이는 마치 성도가 거듭난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한 번 세례 받은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성찬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깨달음의 경험은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삶의 여러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경험될 수 있고
또한 반복되어야만 합니다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명백함이 부족해서 그렇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산다는 것은
먀냥 즐거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진리에 대한
명백한 이해를 통하여
삶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삶을 저항없이 담담하게 수용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구원은 이러하다.. 구원은 저라하다 설명하면서
구원의 문턱을 높이지 말라고…

스스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구원받으려면 이러해야 한다 저러해야 한다 떠들어 대며
자신도 구원못받고 남들도 구원 못받게 하는 일을
멈추라고 말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일을 멈추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헛된 주장으로 추종자들을 만들거나
거느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구원은
구원받은 삶을 살아감으로써만 비로소
전할 수 있는것입니다
때문에 가장 효과적인 전도는
교회 데리고 나와 설교듣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구 절절히 교리를 설명해 주는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구원을
삶 가운데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뿐입니다
사랑하는성도여러분
연말을 맞이하여
삶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껏 누리시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복된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