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4)>

이인엽 목사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창세기 22:1-5

오늘 저는 아브라함에 관한 설교의 마지막 시간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와같이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뛰어난 믿음을 가졌다기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양육하심을 통해 그 믿음이 성숙되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렇게 성숙해 갔다는 사실은 부족한 믿음으로 늘 고민하며 애쓰는 우리들에게 분명히 희망의 메시지가 될수 있습니다. ‘아 이제 나 교회 다녀야지’ 하고 교회에 첫발을 디딘 초신자의 믿음이나, ‘아 이제 나 하나님 명령을 따라 가나안으로 가서 살아야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나 그 시작점은 큰 차이가 없다는 말씀이죠. ‘어유 저 사람 크리스천 맞어’, ‘믿는다고 하면서 사는게 왜 저 모양이야’ 하는 사람의 모습이나 하나님의 양육하심을 받기 전의 아브라함의 모습이나 크게 다를게 없다는 말씀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려움만 닥치면 포기하고 도망가고 등돌리기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나 아브라함의 초기모습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설교를 통하여 확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정도의 믿음을 가졌던 아브라함을 우리는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을 통해 무슨 믿음을 배우라는 걸까요.

우린 흔히들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사람은 안 변해’, ‘사람은 고쳐 쓰는게 아니야’, ‘세살버릇 여든까지 가’.. 맞습니다. 사람 잘 안변합니다. 자기버릇 누구에게 못 주지요. 보통은 하던대로 하고 삽니다.

그러나 그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예수 그리스도가 그 인생 안에 들어오시면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악한 나의 옛 사람이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덧입은 새 사람이 생겨납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화’라고 부르지요. 완전한 믿음을 갖지 못했던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그의 믿음은 미숙하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하여 견고한 믿음의 조상으로 성숙되어 갔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삶속에 개입하심으로 아브라함은 변화할 수 있었습니다. 부족했던 아브라함은 그 믿음이 계속 자라 나갔고, 결국 우리가 잘 아는 사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순종의 모습을 보임으로 믿음의 절정을 보여주었고 우리가 기억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통해 얻은 아들, 이삭

아브라함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 이삭

그러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2) 라는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주저함없이 이 일을 실행에 옮깁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좋다한들 감히 따라할 수 없는 행동이지요. 누가 자기 자식을 하나님께 바칠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내가 가진 것을 나눌수도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해서 위험한 일을 담대히 감당할수도 있지만,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일은 상상이 안가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이 일은 우리에게 몇가지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가장 귀한 것으로 보시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하여 우리는 사사기에 나오는  ‘입다’라는 사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입다는 쳐들어오는 암몬과의 전투에 앞서 하나님 앞에 서원하지요.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사사기 11:30-31

하나님께 서원을 드리고 전쟁에 나선 사사 입다는 암몬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사사기 11:34

입다는 땅을 치며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할수없이 자기 딸을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입다는 자신의 가장소중한 무남독녀 사랑스러운 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입다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제물로 드린 입다나,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던 아브라함이나 얼핏보면 비슷한것 같은데, 왜 한사람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평가를 받고, 왜 한사람은 경솔한 행동을 한사람으로 평가를 받는 걸까요.

뭐가 다른가요.. 둘은 뭐가 달랐을까요..

사실 기독교는 인신제사를 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인신제사로 유명한 종교는 가나안 땅에 유행하던 몰렉이라는 우상입니다. 사람들은 주로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또는 비를 바라는 마음에 아이들을 산 채로 활활타는 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아이들을 몰렉이라는 우상에게 번제로 바친거죠.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가증히 여기셨습니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8:21

몰렉에게 인신제사를 금하시는 하나님이 과연 아브라함과 입다의 인신제사를 원하셨을까요.

그럴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원하시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No, 아니오 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지도 않는 제사,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는 그 제사를 입다는 자신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 감행했습니다. 입다는 서원도 잘못했고, 그 제사를 결국 감행한 것도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제사를 기뻐받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원시 종교들이 빈번하게 사람을 제사의 제물로 바쳐 왔습니다. 남미의 고대왕국 들에도 얼마나 많이 그런 일들이 있어 왔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제물로 받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이삭은 뭘 한 것일까요. 

두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했던 행동과 입다가 한 행동과 뭐가 다른겁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어떻게 그 일을 할수 있었는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을 움직인 그의 믿음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도대체 뭘 믿었길래 그토록 담대하게 엄청난 일을 할수 있었을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첫째로 아브라함의 행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 12:2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창세기 13:6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세기 15:4-5

성경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가고 있었던 거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무엇을 해주겠다는 내용을 못 믿겠어서가 아니라, 언제, 도대체 언제 해 주겠다는 내용이 없어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손의 번창함을 약속받고 가나안으로 떠나간 것은 75세였는데 99세가 되도록 이삭을 얻지 못했습니다. 약속을 받았는데 시간만 가고 있었던거죠. 아니 25년동안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변하는 건 없고 아브라함 입장에서 그 어디 믿음이 가겠습니까?

그러던 어느날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구체적인 시간이 확정되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창세기 18:10

이 약속을 듣고 장막뒤에 서있던 사라가 웃습니다. 믿을 수 없었던거죠. 아니 여지껏 지키지 않던 약속을 이제와서 이루시겠다 하니 속으로 헛웃음이 나온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오래 변함없이 잘 기다릴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쉽게 지치고 쉽게 잊고 쉽게 포기하고 쉽게 식상해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포기한 순간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창세기 21장 1-3절은 그 기적의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창세기 21:1-3

아브라함은 이제 하나님의 약속이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는 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약속을 지키실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삭을 얻은 아브라함이 첫 번째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창세기 21:4

약속을 확인한 아브라함이 제일 처음 한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삭에게 할례를 행한 것이었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즉 약속입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헤기 17:8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세기 17:10

이제 이삭을 얻은 아브라함이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그 자손을 번창케 하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약속을 확정짓기 위해, 즉시로 하나님이 명령한 할례를 행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믿음, 하나님이 이삭을 통하여 자손들의 번창함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에 대한 믿음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앞에서 조차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이것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입다와 같이 자신의 무모한 약속을 지키려 애쓰기보다, 하나님께 받은 약속을 믿고 신뢰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12) 라고 칭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행동이 입다의 행동과 크게 다른 이유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전능자이심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세기 17:1

99세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났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능자, “I am God Almighty”, “엘 샤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다양하게 부르고 있는데 우리가 흔히 아는 “엘로힘” 이라는 말과 “엘 샤다이”라는 말은 조금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조자라는 뜻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엘로힘에 비해 엘 샤다이는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전능자 하나님이란 뜻을 강하게 가지고 있지요.

이제 너무 늙어 자손을 생산할 능력조차 완전히 상실한 아브라함 부부에게 아낌없이 베푸시는 전능자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의 죽었던 생산능력을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려서 약속한 자녀, 소중한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엘 샤다이, 전능하시되 은혜를 베푸셔서 죽은 것 조차 다시 살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다는 겁니다. 

이제 그의 믿음은 죽은 자 조차 다시 살리시는, 부활조차 가능하게 만드시는 엘 샤다이 전능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이삭을 바쳐 이삭이 죽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릴 수 있음을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전능자 하나님이 이삭을 부활시키실 수 있음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담대히 나설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22장5절에서 이삭을 바치러 나가는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창세기 22:5

“우리”가 돌아오리라!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이 다시 살 것을 확신하지 않았던들 정말 하기 힘든 말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부활조차 가능케 하실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믿음은 입다의 믿음과 달랐습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 부활생명을 믿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으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하신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으시고,

하나님이 전능자임을 믿으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것과 같이 부활생명도 주실 것을 믿으시길 소망합니다.

이것은 이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넘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