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함속의 강함을 위하여>

이준수 목사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12:7-10

사도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창시하셨다면 바울은 이 믿음을 하나의 이론적, 논리적 실체를 지닌 신학으로 발전시켰고, 아시아와 유럽 각지로 전파하여 로마제국 시대 이후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서 뿌리를 내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원래 베드로나 요한처럼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박해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베냐민지파에 속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그리스와 로마의 선진 학문을 습득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으며, 당시 세계 제일의 영예를 누릴 수 있다던 로마의 시민권자였습니다.

이렇듯 정통 유대교와 헬라 철학이 지배하는 환경에서 자란 그였기에 예수의 가르침은 한낱 허무맹랑한, 단지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으며 스데반 집사 등 초기 크리스천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국 그리스도께 붙잡혔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그의 어두운 눈을 밝히시고 완악한 영혼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거룩하신 말씀을 선포하는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이때부터 바울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는 자기가 지닌 모든 학식과 명예, 특권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사모하며 그 믿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겪으면서도 유럽과 소아시아로의 전도 여행을 세 차례나 감행했고, 수 없이 투옥당하면서도 예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또한 신약성경에 실려 있는 사도들의 서신들 중 대부분을 서술하면서 핍박 받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신앙을 북돋워주는 일에 모든 정성을 쏟았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 바울의 인생과 가치관이 완전히 변하였지만, 그의 개인적인 성격이나 인간 됨됨이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어도 ‘사울’일 때의 당당했던 기품은 여전했습니다. 항상 자신감에 차있었고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바뀐 것이 있었다면 삶의 방향, 즉 인생 목표가 바뀌었을 뿐이었습니다. 전에는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를 열렬히 따르는 제자로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당당하고 때로는 교만해 보이기까지 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배척하던 자가 갑자기 예수의 추종자가 되었으니, 기존에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회심을 부인할 뿐 아니라 그를 사도적 지위에서 내쫓으려고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이 가중될수록 바울은 더욱더 강하게 자신의 변화를 주장하고 변호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12장이 바로 자신의 사도권을 부정하려는 세력에 대해 바울이 사도로서의 권위와 권한을 변증하는 내용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셋째 하늘’까지 올라 인간의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을 경험하고 여러 거룩한 계시를 받았지만, 교만하게 보일까 두려워 이에 대해 자랑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자랑하지 않겠다”는 말의 이면에는 “하나님께 직접 선택받은 나를 함부로 모욕하지 말라”라는 역설적 강변이 담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바울은 자신이 “육체적 가시”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후세의 성서학자들은 이 육체의 가시를 안질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을 때 강한 빛을 쬐어 시력에 문제가 생겼고 결국 시각손상으로까지 악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안질은 복음 전도자 바울에게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장애’였습니다. 그는 예수를 전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돌아다녀야 하고, 말씀 선포도 하며, 자신이 방문했던 지역 교인들을 권면하기 위해 편지를 써서 보내야 했는데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 모든 사역을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만 없어진다면, 이 고통스런 시각장애만 사라진다면,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제발 고쳐주세요”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설교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유독 자신의 기도는 효험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각장애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바울은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받은 엄청난 계시와 은혜에 대해 자고하지 말라는 뜻으로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것을… 만약 그에게 시각장애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고 하면서도 “내 능력으로 다 했노라”며 교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각장애가 있어 사역을 감당하는 데 엄청난 불편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기에 자신의 본질이 강함이 아니라 약한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약점을 통해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능력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커다란 역사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역설적 은혜”를 깨달았을 때, 그는 자신의 육체적 가시를 자랑할 수 있었으며, 순교하는 그날까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겪어야 했던 모든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기뻐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강해진다는 강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가셨지만, 현재 제가 섬기는 남가주밀알선교단 가족 중에 ‘한대연 집사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한 집사님 역시 시각장애인으로 그동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오셨고 온갖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여 한의학 박사학위까지 따신 분입니다.

저도 가끔 이분께 치료를 받곤 하였는데, 하루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의원에서 사용하는 한약 재료는 다른 곳에는 쓰이는 데가 없이 아무 가치도 없는 단순한 ‘풀’에 불과하지만 병든 사람을 낫게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장애인들도 세상적으로는 아무 쓸모도 없고 별 대접도 못 받지만 병든 세상을 고치는 ‘약’으로 사용되어질 수 있다.” 당시 양쪽 팔과 다리에 침을 맞고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는데,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눈물이 주르르 흐를 정도로 큰 감동을 받았으며, 지금 전하고 있는 설교에 대한 아이디어도 떠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장애를 세상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는 불편함, 불가능, 불완전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절망과 수치, 열등감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관점을 넘어 하나님의 시각, 영적인 눈으로 바라본다면 장애는 더 이상 불가능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완전하신 섭리가 깃들게 될 때, 장애는 그 한계를 초월하여 나를 변화시키고 병든 세상을 고치는 은혜의 도구,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는 나의 인생을 가로 막는 “障碍(obstacle)”가 아닌, “長愛”, 즉 내가 내 생애에서 가장 그리고 오래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장애란 단지 ‘육체적 불편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수 이민자로서 이 미국 땅에 살아가며 겪게 되는 수많은 삶의 문제들도 넓은 의미의 ‘장애’라고 봐야 합니다. 영어가 부족해서 생기는 의사소통의 어려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당해야 하는 크고 작은 차별과 편견의 문제, 또 하루하루 힘들게 먹고 살며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데서 오는 수고와 고단함 등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짊어지고 나가야 할 ‘장애’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장애를 절대 원망하지 않고 낙심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감사히 여기고 이 고통 속에 깃든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려 애쓸 때,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의 삶이 나날이 발전하며 또 우리의 아이들이 이 땅에서 당당하고 건실하게 성장해 나갈 것이라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척박한 현실, 모진 고난 속에서 흘리는 땀과 눈물, 하나님께 간절히 올리는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장애와 갖가지 어려움으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바로 그 장애 속에서 진정 하나님을 만나고, 나 자신을 발견하며,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섬기며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정말 우리 인생의 장애 덕분에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남이 듣지 못한 음성을 들었으며,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받았노라”고 감사의 고백을 올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