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목사

<아브라함 (3)>

이인엽 목사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창세기 14:14-16

오늘도 역시 저는 지난번에 이어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여러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요. 왜 이렇게 말할까요. 이 말은 어디서 나온 말일까요? 갈라디아서 3장7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갈라디아서 3:7

‘믿음을 가진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는 말은 ‘아브라함은 믿는 자들의 조상이다’라는 말과 같은 말이지요. 즉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믿음의 뜻을 아는것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어떠한 가치관,종교, 사람, 사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 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라고 나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이라는 단어의 뜻 속에는 아는 것을 확신한다는 의미와 함께 이것이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좀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믿음이 있기 위해선 먼저 어떠한 사실을 알아야 하고, 둘째로, 어떠한 경험등을 통해 그 사실을 확신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알고 확신한 사실을 누가 뭐라고 하던 매우 주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관적 진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경험이 필요하겠지요.

자 이제 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을 믿음이라고 하면 어떻게 이해하는게 맞겠습니까.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지 않습니까. ‘나 하나님 믿어.. 나 예수님 믿어.. 나 성령님 믿어..’ 자, 이 말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나 하나님 믿어’ 라는 말이 사실이 되려면, 첫째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내가 아는 하나님을 확신해야 합니다.

셋째로, 내가 알고 확신하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개인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서, 누가 뭐라든 나는 확실히 믿는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나 하나님 믿어..’가 사실이 되는거예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확신하였고 그리고 그렇게 알고 확신하는 하나님과 매우 밀접한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그러기에 그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여러분이 ‘나 예수님을 믿어’, ‘나 성령님을 믿어’라고 하는 것도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이, 성령님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는 심령이 아니라면..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 예수를 믿어, 성령을 믿어라고 외쳐본 들, 마지막 날 다시오실 예수 앞에 설때, 그때 거기서 들을 소리는 ‘넌 누구냐. 도무지 너를 모르겠다’ 라는 말 뿐일 것입니다. 왜 그러냐구요,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이처럼 우리 모두의 구원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에 문제가 있다면, 그 믿음이 엉터리라면 어떻게 구원을 받을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 믿음의 조상이라 불릴만한 믿음, 그러니까 완전한 믿음을 갖게 되었는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 사람은 그냥 처음부터 완전한 믿음을 갖고 있었을까요? 아니죠 아브라함의 첫 믿음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시련이 닥치자 바로 딴 마음을 품었지요. 왜 그랬을까요?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기근을 만났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오지도 않았겠죠. 아브라함이 믿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적 없으세요. ‘하나님이 계신 것은 믿어요.. 하지만 날 살리실까..’ ‘하나님의 존재는 믿어요.. 내가 믿는다고요..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이 일을 해주실까.. 이 일을 도와주실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를 믿습니다.. 하는 말은 그 존재만을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존재와 동시에 하시는 일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으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하실 일을 믿지 못했을 때, 아브라함은 믿음의 행동을 할수 없었습니다.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가서 아내를 팔아버렸죠. 이것은 믿는 자의 행동이 아니라 악인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믿음에 따른 행동을 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존재와 함께 하나님의 하실 일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일이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일이어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도 믿고 떠느니라

야고보서 2:19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존재만을 믿는다면 , 우리의 믿음은 귀신의 믿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첫 믿음은 바로 이런 믿음이 아니었을까요. 그러기에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간겁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건지를 모른거지요.

그러나 거기서 아브라함은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자신의 죄를 묻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난거예요. 아브라함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어요. 아브라함을 위험에서 살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내가 뭐라고.. 내가 뭘했다고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나.. 그 날 거기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여러분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여러분의 죄를 묻지도 않으시는, 여러분의 부모님보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오늘 이자리에서 만나십시요.

그날 아브라함이 만났던 사랑의 하나님을 여러분이 만나시면 지금까지 몰랐던 놀라운 삶의 변화가 여러분의 삶속에 펼쳐지게 될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함은 이제 담대하여 졌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는데

누가 나를 치리요

무엇이 나를 막으리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였죠

아브라함의 이러한 믿음은 창세기 14장과 18장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아브라함이 롯과 갈등이 생기자 모든것을 양보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은 우리가 지난번 예배를 통해 확인했었습니다.

이제 롯은 물이 풍성하고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땅과 같은 (창13:10) 요단지역 소돔에 터를 잡았습니다. 많이 들어본 지명이 나오죠 , 소돔과 고모라. 소돔이 어떤 곳입니까. 거기에 사는 소돔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창세기 13:13

롯은 살만 했을겁니다. 물도 있고 도시도 있고.. 그러나 그렇게 좋아보이는 그 곳은 악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날 그땅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창세기 14:1-2

이게 무슨 일이냐 하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던 왕들은 뒤에 구바벨로니아 같은 큰 나라가 있던 땅이죠.

그 힘쎄고 큰 나라들이 소돔 고모라 지역에서 조공을 받다가, 이 소돔 고모라 사람들이 배신을 해요, 주다보니까 힘들었던거죠. 그런데 이렇게 배반을 당하자 격분해서 그 길목에 있던 모든 나라들을 초토화 시키며 쳐들어 온겁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소돔 고모라등에 있던 이지역 다섯왕의 연맹이 이겼을까요. 그럴리가 없잖아요.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창세기 14:9-11

이 전쟁은 큰 전쟁이었어요. 무시무시한 페르시아인들의 파워가 소돔과 고모라를 짓눌렀습니다. 그 와중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봉변을 당합니다.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창세기 14:12

그리고 이 소식은 이제 아브라함에게 들립니다. 아브라함이 할수 있는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가만히 있어야죠, 뭘 어떻게 합니까. 다섯나라가 힘을 합쳤어도 망했어요. 한 나라도 아니라 다섯 나라가 힘을 합쳤어도 졌어요. 그런데 한 개인이 뭘 할수 있습니까. 나라가 싸워도 지는데.

아브라함이 왕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 나라를 갖고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데리고 있던 318명의 용사가 이 거대한 페르시아 왕국 연합을 이길만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무슨 슈퍼맨들인가요.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정말 상식 밖의 일입니다. 이 소수를  가지고 그 큰 나라와 싸운다는 것은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것보다 더 황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죽음의 위기 앞에서 거꾸로 살리시는 하나님!

죄 지었으나 질책도 아니하시는 하나님!

무조건 내편이 되어주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시고 자신을 승리로 이끌어 주실것을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승리할수있게 인도하신다는 믿음

그 믿음이 우리가 아브라함을 통해 배우는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창세기 14:14-16

그리고 성경은 14장 20절을 통해 이 전쟁의 승리의 이유가 하나님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창세기 14:20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함을 철저히 신뢰하며 믿었던 아브리함은 그 믿음을 근거로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 나가 놀라운 승리를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누렸던 그 승리의 기쁨을 오늘 여러분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자 이제 창세기 18장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게 경험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여호와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장면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이 살았던 이곳 소돔과 고모라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살기 좋은 환경이었을지는 모르나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바와 같이 죄악이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그들의 악함으로 이루어내는 수많은 죄악이 있었겠지만 그중에서도 성경은 여호와의 사자들을 낯선 남자로 오인하고 동성애를 위해 달려드는 군중들을 통하여 그들의 악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게 창세기 19장 전반부에 나오는 내용이지요.

소돔과 고모라는 이처럼 영적으로 육적으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처럼 타락하고 죄악이 만연한 소돔과 고모라를 진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하나님의 공의로움에 대한 의문을 던집니다. ‘아니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왜 저렇게 악한사람이 잘살아요.. 아니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왜 저렇게 착한 사람이 고생하죠..’

그러나 이런 질문은 사실 아주 틀린 질문이지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주 악한 사람이나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주 착한 사람이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것을 망각한 질문입니다. 우리의 요구대로 하나님이 공의로우시기 위해선 우리의 기준에 맞게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죄인인 우리 모두는 다 정죄받고 죽는게 맞습니다. 다 망하고, 다 어려운게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안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람의 죄를 아시지만 용서하시는 사랑. 죄의 값을 요구하시지만 대신 그 값을 치뤄주시는 사랑.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달리심과 부활은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사랑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수 있겠죠. 아브라함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사랑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사랑을 알기에 소돔과 고모라를 진멸하시기로 작정한 여호와 하나님앞에 아브라함은 간곡한 만류를 시작하지요

아브라함이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가서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창세기 18:22-23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그 성 중에 의인 다섯명이 부족하다면.. 그 성 중에 의인이 사십명이면.. 그 성 중에 의인이 삼십명이면.. 이십명이면.. 십명이면.. 그래도 그성을 멸하려 하십니까?

아브라함은 왜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려 하였을까요. 아브라함은 왜 이렇게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보다 더욱 긍휼함이 많아서였을까요. 하나님도 진멸하려 하신 그곳을 아브라함은 아주 사랑이 넘쳐서 그것을 막으려 했을까요. 아니겠지요. 그곳은 사랑하는 롯의 삶의 터전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소돔과 고모라가 무사해야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거지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를 지키려고 해서가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공의로움 안에는 사랑이 함께 하심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존재를 믿고,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것을 믿고, 나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지키심을 믿고, 공의로움 가운데에서도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

그래서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 겁니다.

그 아브라함의 믿음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여러분의 믿음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존재와 하시는 일에 대한 온전한 이해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아시고 바른 믿음을 가지시길 또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