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목사

<아브라함 (1)>

이인엽 목사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창세기 11:27-12:5
바이블 맵 참조: http://biblemap.or.kr/biblemap3D.html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간은 죽음과 수고라는 처벌을 받게 되었지요, 잘못을 하고 벌을 받았으면 정신을 차리는게 맞는 것 같은데 여러분이 아시는바 대로 인간은 계속해서 죄를 쌓아갔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6:5-7

말씀대로 대홍수가 일어났어요,  땅과 하늘의 모든 것들은 다 죽었어요. 그러나 한사람과 그 가족은 예외였죠… 누구죠…노아입니다.

노아는 어떻게 예외가 되었을까요. 노아는 어떻게 대홍수의 죽음을 면하고 그 가족까지 살릴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정확한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세기 6:9

노아가 죽음을 면한 이유는 의인이며, 완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의인이세요, 완전하신가요,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십니까. 그때 그자리에 여러분이 계셨으면 노아처럼 죽음을 면하셨겠습니까.

저는 어땠을까요… 보나마나입니다. 100% 죽었지요. 사실 그때 그날의 기준으로 구원이 주어진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중에 살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고맙게도 2천여년전에 예수님이 오셨어요,  그리고 새로운 약속을 주셨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한복음 11:25-26

그래서 우리가 사는 거죠, 노아수준이 안되어도, 의인이 아니어도, 완벽한자가 아니어도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한다 해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감싸안으시는 예수님때문에 사는 겁니다.

이처럼 노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이었어요, 그런 그가 세 자녀를 낳아 키웠는데 그들의 이름은 셈과 함과 야벳이죠. 그중에 셈은 특별히 노아에게 축복을 받은자입니다.

그 셈의 자손들의 이야기가 창11:10-26절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그 26절에 드디어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이름이 나오네요.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은 보통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라 불리는 고향땅을  떠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지요. 히브리서 11:8 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브리서 11:8

이 구절만 놓고 보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혼자, 그리고 지체없이 바로 간것처럼 보이쟎아요. 그러나 사실 아브라함의 가나안 이주에는 한 사람이 더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이지요.

데라는 그 훌륭한 노아의 축복을 받은 셈의 후손입니다. 셈족은 노아 이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는데, 데라는 그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갈대아인의 우르라는 곳에 살았습니다. 조금 복잡하지요.. 간단하게 말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고향은 어디라고요?

우르

그럼 아브라함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우르, 네 우르죠

우리가 흔히 갈대아 우르 라고 부르는 갈대아인들의 우르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우리는 아브라함을 기원전 2000년 정도에 살았던 사람으로 보는데요. 그 당시에 갈대아 우르는 엄청난 도시였습니다.

우르에 있는 집들은 발코니까지  있는 2층집이 있었구요. 물이 빠져나갈 배수로까지 만든 시원하고 통풍이 잘되는 그런 집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천년전에 사람들이 그런 집에서 살다니, 놀랍죠. 부자일수록 더 크고 좋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살기좋은 대도시 모든 편의시설이 있는  곳이 아니었을까요. 그 곳에서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습니다. [창11:26] 세 쌍둥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70세 이후라는 얘기겠죠 .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완벽한자의 자손, 동시에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그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요? 믿음을 잘 지키고 의로운자 완벽한자로 잘 살았을까요, 하나님과 동행했을까요?

여호수아 24:2절은 그곳에서의 데라의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여호수아 24:2

강 저쪽은 갈대아 우르를, 그리고 다른 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많은 우상들을 말하는거죠. 갈대아 우르에서 데라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데라는 우상을 섬겼을까요. 믿음의 선조를 둔 데라는 특별히 악해서 우상을 섬겼을까요. 특별히 못나서 하나님을 잊었을까요. 아닙니다. 데라는 그냥 남들이 하고 사는데로 산겁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지 않고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여러분들 오늘날 핸드폰없이 살아라 이런거랑 비슷해요.그 곳 갈대아 우르에서는 너나할것 없이 수많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4000종이 넘는 우상들을 섬겼다고 해요. 새로운 우상 신을 찾는 직업이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까 정말 엄청난거죠. 도시의 가운데에는 지구라트라고 모양이 피라미드 비슷한 커다란 구조물이 있었고. 그 지구라트의 맨 위쪽은 성전으로 사용되었는데, 도시의 사람들은 이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생계를 위한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상을 섬기는 종교활동들이 그 도시의 사람들의 삶속에 깊게, 아주 가깝게 뿌리박혀 있었던 거지요.

그들은 왜 우상을 섬겼을까요. 잘 먹고, 잘 살고, 건강하고, 안전하고, 악귀신들을 쫓아내고, 자녀 많이 낳고, 재수있고…

이런 이유들이었죠. 하나님을 잊어버린 그들에게 수많은 우상신들이 찾아온 겁니다. 오늘날도 그렇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그냥 아무것도 안믿고 살게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신을 믿거나, 미신을 믿거나, 돈을 믿거나 자기 능력을 믿거나 그러죠. 선이 빠져나간 자리는 그냥 비어 있는것이 아니라 악이 채워지는겁니다. 교만함이 채워지는거고 욕심이 채워지는 겁니다. 데라도 그냥 남들하는데로 잘먹고 잘살려고 그랬겠죠. 더 큰집에서 더 풍요롭고 편하게 그렇게 살려고 남들처럼 우상을 섬긴거죠.

그런데 그러던 그가 갑자기 우르를 떠나갑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창세기 11:31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을까요. 갈대아 우르에서 너무 못살아서 가나안으로 이사를 결심한 것일까요. 번화한 갈대아 우르에서 본 가나안은 거의 오지입니다. 살만한 곳이 아닙니다. 성경은 데라가 우르를 떠난 이유에 대해서 선명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창세기 11:28

하란은 데라의 세 아들중의 하나였죠. 원어를 보면 하란은 그 아비의 눈앞에서 죽었더라고 나옵니다. 성경에서 첫번째로 자식이 아비보다 먼저 죽는 케이스 입니다. 하란이 왜 죽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하란의 죽음은 그 아버지인 데라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을 겁니다.

잘살면 뭐합니까, 부자면 뭐하고, 넓은 시원하고 깨끗한 집이 다 뭔 소용이 있습니까… 자식이 죽었는데,  자식의 생명은 내 생명보다 귀하지 않습니까? 생명의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데라가 정상적인 아버지였다면 자식의 죽음앞에서 기존의 가치관이 철저히 무너졌을겁니다. 데라는 아마도 하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우르를 떠났을 것이다, 이렇게 볼수 있겠죠. 그러나 이것도 우리의 추축일 뿐이죠. 성경이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은 이 내용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는 거지요.

중요한건 데라가 누구와 함께 갔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말로 된 성경에는 데라가 가족들을 데리고 우르를 떠난 것 같이 되어있죠

데라가 그 아들 아브라함과…..우르를 떠나…

창세기 11:31

마치 데라가 혼자 이주의 중심이 되는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영어성경이나 원어성경은 우르를 떠나간 주체, 주어를 데라와 아브라함, 그리고 그 가족들로 하고 있습니다. 데라가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는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아브라함과 동행했다는 사실은 데라가 최소한 이순간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데라는 가나안으로 무사히 들어갔을까요.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세기 11:31-32

데라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시작은 했지만 끝을 내지 못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디모데후서 4:7-8

끝까지 달려가야할 믿음의 길을 강조한 말씀 아닙니까? 그러나  데라는 끝까지 마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자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과 동행했지만 가나안까지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나 자신의 아들 이름과 비슷한 하란 땅에서 살다 죽었습니다. 하란은 가나안 땅이 아닙니다. 하란 땅은우르와 가나안의 북쪽에 있던 땅으로 길목이라는 의미의 땅입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로 나가는 길목이 되던 번창한 도시지요.

길목까지만 간거지요. 누군가 믿음 좋은 친구를 따라 교회까지 나왔는데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누군가 큰 감동으로 믿음을 갖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시험에 들어 믿음을 놓친다면 그 사람은 데라와 같이 가다 만 사람입니다.

우리는 데라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가다 만거나, 처음부터 안 한거나 큰차이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뭐가 달랐습니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브리서 11:8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1

이 말씀에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창세기 12:5

여러분, 여러분에게 고향은 무엇입니까. 내가 낳아 자란 익숙한 장소, 구석구석 내가 잘 아는 장소, 항상 안전하게 느껴지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늘 돌아가고 싶은 평안하고 행복한 장소…

장소적 공간적 물질적인 익숙함에서 끊어내라. 단절시켜라. 왜! 그 곳에 죄가 있으니까…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공간적 물질적 죄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친척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사람들이죠. 가까운 사람들, 친근하고, 항상 내편이고, 내게 소속감과 즐거움을 제공하는 사람들. 그들을 끊어내라.

왜요… 그들안에 죄가 있어서.

그들과 함께 어울려 죄 지으며 결국 사망의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어서 끊어 내라는 겁니다. 죄성이 가득한 사람들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좋고 친해도 그들이 죄성이 가득하다면 그 사람들과 단절하라는 것이지요.

끝으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아버지의 집은 내 집입니다.아버지의 모습에는 내 모습이 들어 있어요. 내 안에는 아버지의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다 녹아있는겁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요?

내 안에 녹아있는 죄성,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나쁜 뿌리들,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나쁜 습관들 잘라 내라는 겁니다. 그리고 가라 약속의 그 땅으로, 가나안 땅으로.

우리가 데라의 인생을 살것인가, 아니면 아브라함의 인생을 살것인가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겠지요. 만약 우리가 아브라함의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네가 좋아하는 죄성이 가득한 장소, 죄성이 가득한 물질적인 유혹을 끊어내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너와 너무도 친한 죄성이 가득한 사람들을 끊어내라 네 안에 있는 너무 오래전부터 너와 함께한 죄성을 그 유전받은 죄성을 끊어내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의 힘으로 이 모든 죄를 끊어낼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보통 아브라함보다는 데라에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끊어지지 않는 죄성때문에 고민해 본 적 없으신가요.

저는 엄청 많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로마서 7:24

바울 선생님의 고백 아닙니까? 사도 바울도 하기 힘들었던 일, 죄와의 단절입니다. 저 또한 제 힘만으로는 데라와 같이 길목 까지밖에는 갈 수 없는 사람임을 여러분 앞에 고백합니다.

내 힘만으로 아브라함처럼 순종하며 가나안까지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데라는 만나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를 저는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제 안에 있습니다.

나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 생명이 여러분과 또한 예수님을 믿으며 사모하는 모든이들의 생명을 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1-2

이스라엘의 수천년의 역사가 사람이 사람의 힘만으로 결코 죄에서 자유할수 없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오심은 우리에게 복된소식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9: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이 말씀을 붙드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를 이기며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갔던것 같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영원한 가나안인  천국으로 나아갈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