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준비하는 삶>

이준수 목사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 4:6-8

지난 주일 민환기 목사님께서 ‘죽음이 끝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참 감동적인 설교를 해주셨는데, 오늘 저도 ‘죽음'이란 동일한 주제를 갖고 잠시 은혜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방금 읽은 성경 본문 디모데후서 4장 6-8절은 사도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 사형 날짜만을 기다리던 바울이 영적인 아들 디모데를 그리워하며 그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하고 권면하는 형식으로 그동안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고 영광스런 죽음을 준비하는 내용입니다.

우선 6절을 보면 바울은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제’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때 그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는 말은 바울 자신이 전제가 되어 제물 위에 부어진다는 것으로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모두 완수하고 하늘의 부르심을 받을 날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을 앞에 두고 바울 사도는 자신이 수많은 역경과 환난, 엄청난 핍박 속에서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음을 겸손히 고백하면서, 재판장 되신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 바울 자신 뿐 아니라 주의 임재를 사모하는 모든 이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바울 사도는 디모데로 하여금 자신과 같이 주님이 주실 의의 면류관을 소망한 채, 어떤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전도자의 사명을 다하며, 주를 위해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진실하고도 간곡한 고백과 권면은 단지 디모데 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크나큰 울림과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죽음이 임박한 그 때에 자신의 삶을 어떻게 뒤돌아보며, 또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어떤 소망을 가지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처럼 죽음이 이토록 가깝게 느껴지는 때도 일찍이 없었을 것입니다. 작년 3월 이후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코로나19 사태로 미국만 해도 거의 57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루가 멀다 하고 빈번하게 일어나는 총격사고, 혐오범죄 등에 의해 언제 어디서든지 순식간에 소중한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특히 지난 3월16일 애틀랜타 한인업소에서 발생한 끔찍한 총격사고로 한국인 4명을 비롯한 8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고, 그 후로도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 묻지마 폭행, 증오범죄가 계속 일어나 ‘Stop Asian Hate’란 구호 아래 항의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3월22일에는 콜로라도주 볼더에서 경찰관 등 10명을 희생시킨 식료품점 총격사건이 발생했으며, 이 달 15일에도 인디애나폴리스에 있는 Fedex Store에서 역시 총기난사로 시크교도 4명 등 8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 등 불특정다수의 무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참혹한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코로나19 사태로 장시간 어려움을 겪다 보니 억눌리고 혼란스런 심정이 겉으로 표출돼 이런 끔찍한 범죄행위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인내하지 못하고,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은 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감정을 발산해 버리는 요즘 세태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굉장히 안타깝고 우려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거리를 걸어가건, 학교에서 공부를 하건,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건, 극장에서 영화를 보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고가 발생해 예고 없는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위험한 환경에 놓여있습니다. 실로 우리 주변에 안전한 곳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혼자 어디 외출할 때엔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데 요즘은 밖에 나다니기가 좀 꺼려지고 두려워 지기까지 합니다. 어디서 별안간 총알이 날아오거나 폭탄이 터지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차라도 타고 있지만, 저는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는 무방비 상태이고 사고가 일어날 시 남들처럼 재빨리 숨거나 도망갈 수도 없기에 죽임을 당할 수 있는 확률이 더더욱 높습니다. 또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가운데 장애인들은 더욱 만만해 보이니 갑자기 난데없는 폭행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얼마 전 한국 전남 곡성 지역에서는 한 공무원이 아침에 출근하다가 자신이 사는 아파트 입구에서, 마침 그 시간에 옥상으로부터 투신자살하던 청년과 충돌하여, 그것도 아내와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즉사한 사건이 발생했다는데, 이처럼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시간, 나에게 가장 편하고 익숙한 장소가 바로 나의 마지막 날이요, 운명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장수는 못해도 침대에 누워 가족, 친지들의 환송을 받으며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이 큰 복인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혼자 살다 아무도 모르게 떠나버리는 ‘고독사’도 많아 가족이 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커다란 사치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든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을 수 있지만, 지난 주일 민 목사님 말씀처럼,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며 죽음 후에는 천국에서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과 영생을 얻기 위해 현재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잘 믿고 그분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깊이, 독실하게 믿는다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올바로, 온전하게 믿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세상의 마지막으로 여기는 종말론적 신앙을 지닌 채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 하며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있는 힘을 다해 사랑할 수 있다면, 비록 점점 사악해지는 세상으로 인해 원하지 않는 시간에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는다 하더라도 우리 영혼은 구원을 받아 천국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는 내가 허락한 삶을 충실히 살았다. 이제 내 품에 안겨 영원한 복락을 누리거라.”라고 칭찬 들으며 뜨거운 환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되느냐’에만 집착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되느냐 보다 중요한 것이 ‘어떻게 사느냐’이고, 어떻게 사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느냐’이며, 가장,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죽음 후에 어떤 소망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강력한 소망만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며, 그 죽음조차 이기고 부활하신 이가 이토록 강력하게 확신을 갖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 하며 무엇을 아쉬워 하겠습니까?

제가 가장 좋아하며 즐겨 부르는 찬양 <살아계신 주(Because He Lives)>는 한글 가사도 좋지만 영문 가사가 훨씬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 중 후렴구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Because He lives, I can face tomorrow, Because He lives, all fear is gone”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살아 계시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두려움도 없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당당히 맞설 수 있고 슬픔과 절망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죽음까지도 뛰어넘어 천국에 대한 소망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삶, 죽음을 의식하는 삶이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죽지 않으려고 안절부절발버둥 치는 삶이 결코 아닙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해 나와 늘 함께하시고 내 인생을 인도하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분께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겨드리는 삶입니다.

‘Memento Mori’라는 라틴어 경구처럼 오히려 죽음을 항상 기억하고 염두해둘 때 우리는 보다 풍요롭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품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해 더욱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허망한 것들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기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임사/근사(Near Death) 체험을 한 사람들이 이전보다 삶을 훨씬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살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죽음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축복 중 최고의 축복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부디 죽음이 어느 때보다 더 가까이 느껴지고 다가오는 이 시기에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의 구주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히 지키고, 그분의 복음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며 우리의 달려갈 길을 열심히 달려가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날 천국에 올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 들으며 찬란한 의의 면류관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