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이준수 목사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요한복음 9:24-33
좋은친구교회의 두번째 주일예배 설교를 하게 되어 참으로 기쁘고 가슴 벅찹니다. 하나님 앞에 올려지는 거룩하고 진실된 예배와 확신에 찬 말씀으로 나날이 견고하게 세워지는 우리 좋은친구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방금 읽은 요한복음 9장은 장애와 관련된 설교를 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장애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장애인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고 있지만, 이 요한복음 9장 말씀이야말로 장애에 깃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가장 큰 교훈과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3절에 기록된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장애의 신앙적 본질과 영적 의미가 담긴 가장 핵심적인 말씀으로 장애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관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이 이 말씀을 통해 깊은 위로와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부터 삶이 힘들고 앞길이 막힐 때마다 이 말씀을 반복해 읽으며 새로운 힘을 공급받고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다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인용한 대부분의 설교를 보면, 단순히 장애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드러난다고만 언급하고 있지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대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과연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오랫동안 묵상해보았으며, 이에 대한 해답을 오늘 읽은 9:24-33 말씀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9장 첫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는데 어떤 시각장애인 한 명과 마주쳤습니다. 그 시각장애인은 앞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옷도 허름하게 입은 채 지팡이로 앞을 더듬더듬 짚으며 매우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은 그 시각장애인이 하도 딱해 보이고, 한편으로는 더듬더듬 걸어가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여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 자신의 죄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입니까?”
유대의 랍비들은 원래, 사람이 심신상에 어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면 그것은 분명히 그 사람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에 그렇게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항상 전통적 관습들을 부인하시고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서서 새로운 구원의 말씀과 진정한 정의와 사랑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이 이 번에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궁금해서 이런 질문을 드렸던 것입니다.
역시 이번에도 예수님은 여태껏 사람들이 생각해 오던 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이에 대한 해석을 내리셨습니다. “저 사람이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자신의 죄 때문도,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즉,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인식했던 것처럼 본인이나 부모의 죄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그가 장애인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당사자에게는 자신의 처지에 결코 실망하지 말고 더욱 더 열심히 살라는 소망과 용기를 불러 일으켜주시고,
그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 몸 불편한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너희와 똑같은 인간이니 그를 차별하거나 업신여기지 말고 한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사랑하며 다른 사람과 똑같이 평등하게 대하라’는 인간 존엄의 정신을 심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그 시각장애인의 눈에 진흙을 발라 보이지 않는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장애에서 고침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일은 육체적 회복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비록 장애를 지닌 채 평생을 살아도 이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학문을 연마하고 재능을 키워 많은 사람들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다면 이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또 장애라는 쉽지 않은 환경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독특한 은혜와 영성을 체험해 이를 복음 전파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겠고,
굳이 특별한 재능이나 사회적 성취 없이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더라도 하루하루를 기쁨과 감사함으로 지내며 주변 사람들에게 따스한 사랑과 위로를 전해줄 수 있다면 이것 역시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일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인물들을 통해 거창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우리의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 속에 작은 사건들을 통해 시시때때로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건 그 일을 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인식의 장벽, 태도의 장벽, 의사소통의 장벽, 물리적 환경의 장벽 등은 과감하게 극복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그분께 모든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신 것도 시각장애를 고치신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이적들을 특별히 ‘표적’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표적(sign)’은 ‘이적(miracle)’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표적은 이적 자체를 의미하기 보다는 이적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어떤 실체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LA에 가려고 프리웨이를 달리다 보면 프리웨이 곳곳에 LA까지 몇 마일 남았다는 싸인판이 계속 나옵니다. 그러나 이 싸인판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싸인판을 보고 LA에 정확하게 도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어떤 이적을 행하셨을 때 이적 자체도 놀랍고 신기하지만,
그 이적을 통해 예수님이 과연 누구시며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정확히 알고 널리 증거하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9장 8절 이후에 전개되는 시각장애인과 바리새인들 간의 치열한 논쟁에서 바로 이러한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의 목적과 실체가 분명하게 묘사되어 나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에게 고침을 받아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고 신기해 하였습니다. 앞이 안 보여 거리에서 구걸이나 하던 걸인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팔자를 고치게 되었을까 하며 사람들 사이에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하는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라고…
이처럼 솔직하고 분명한 답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믿지 못하고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사회 지도층으로 율법에 정통한 자들이니 이에 대한 확실한 해석을 내려줄 거란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극도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들의 기득권이 손상되고 치부가 다 드러나니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죽이지 못해 안달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가서 예수님의 능력으로 앞을 보게 되었다고 증언하니 그들은 펄펄 뛰며 그에게 증언을 취소하고 예수를 부인하라고 모질게 다그쳤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그의 눈을 뜨게 해준 날이 안식일이다 보니 바리새인들의 분노는 더욱 극에 달했습니다. 심지어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의 부모에게까지 가서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면 유대교에서 출교시키겠다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율법이 생활 전반을 지배하던 상황에서 출교란 거의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출교를 당하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대접도 못 받고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으며 극도의 모욕과 핍박을 받다가 결국 공동체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시각장애인의 부모는 이런 핍박이 두려워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책임을 아들에게 돌리지만, 그 시각장애인은 유대교에서 출교시키겠다고 할 정도의 지독한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소리 높여 진실을 외쳤습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시각장애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다”(25절) “창세 이후로 시각장애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2-33절)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실체인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해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하며 거리에서 구걸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연명하던 한 불쌍한 시각장애인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를 만나 눈을 뜨게 되고,
육신의 눈 뿐 아니라 영혼의 눈까지 떠져 모진 핍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 증거하고 모든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요,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의 궁극적인 목적과 실체인 것입니다.
우리 좋은친구교회 가족들 중에서도 여러 가지 장애와 삶의 문제들로 고통당하고 계신 분들이 많은데, 이런 장애와 고통들을 통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온몸으로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장애로 인해 세상적으로는 큰 어려움을 당하고 견딜 수 없는 모욕과 수치도 받을 때도 있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느끼고 가까이 다가가며 예수를 구세주요, 그리스도라고 소리 높여 증거할 수 있다면
장애는 더 이상 고통이 아니고 축복의 통로요, 은혜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사랑하고 자랑하며 그 분으로 인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크나큰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우리 좋은친구교회 가족이 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