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목사

<무엇을 구하는가>

이인엽 목사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한복음 5:1-18

오늘 좋은친구교회의 온라인 예배에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큰 은혜가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코로나로 모두가 힘든 이 시기에 여러분 모두가 무엇보다도 건강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저도 여러분들과 함께 늘 기도하며 깨어 있을 것을 다시한번 다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번에 이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참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지 않나요. 세상을 한번 둘러 보세요,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넘쳐납니다. 이런 많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 하나님이,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나님이신데, 이 사람들 살리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실까? 이거 안하시는 걸까, 못하시는 걸까?

병든 사람들, 지쳐있는 사람들, 장애가 있는 사람들, 또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 정말 궁지로 몰려서 도움이 간절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하나님이 정말 이 사람들 싹 고쳐주시고, 문제도 다 해결해 주시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물질적 축복도 주시고, 또 병들어 있는 사람들은 기도하면 바로 기적같이 질병이 치유되고, 또 사람들과 관계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는 주변사람들의 마음을 다 변화시켜 주셔서 관계가 회복되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안 그러시는것 같아요.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이 많은 고통에 대해서 정말 외면하고 계시는 걸까요? 그런 생각이 들때가 있죠. 더구나 이러한 고통이 내 문제일때는, 내 가족의 일, 내 친구의 일 일때 이런 의심은 더욱 강렬해집니다. 하나님! 도와 주세요, 기적을 주시옵소서, 기적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고통을 이렇게 풀어주지 않으시는것 같아 보일까요, 왜 기적은 드물게 일어나는것 같을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적이 넘쳐 납니까. 부족하지 않은가요.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저 우리의 착각일 뿐입니다. 죄와 시간과 공간에 매여있는 우리의 착각일 뿐이죠.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기적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이 매 순간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대하는 기적의 형태가 우리의 구원에 그렇게 절대적으로 유용하지 않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5장을 통하여 그 중에 하나의 사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베데스다라고 들어보셨죠. 베데스다가 뭐죠, 사람 이름인가요, 아니면 어떤 장소의 이름 일까요.

우리에게 꽤 익숙한 이 이름 베데스다는 옛날 예루살렘 성전의 양문이라는 곳 옆에 있던 작은 연못의 이름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요한복음 5장2절의 말씀입니다.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성경 본문의 “베데스다라 하는 못”의 의미와 같이 전체를 번역하면, “은혜의 집이라고 불리는 몸을 씻는 연못” 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이 어디에 있었다구요. 예루살렘 성전의 양문. 그러니까 양의 문 옆에 있었습니다. 양의 문 옆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이라고 성경이 지명을 굳이 이렇게 친절하고 정확하게 전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양문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성전 안으로 들이는 문이었습니다. 그 제물 중에 양은 가장 대표적인 제물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이 양을 잡아서 자신의 죄에 대한 대속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양은 대속물, 즉 죄의 사함을 상징하는 제물입니다. 또한 베데스다 연못은 은혜의 집이라 불리는 몸을 씻는 연못이라고 하였죠. 몸을 씻는다는 것 자체가 더러움을 씻어냄을 상징하니까 당연히 죄의 씻음을 상징하겠죠.

양문이나 베데스다 연못이나 둘 다 죄의 씻음, 죄의 사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자신들의 병을 고쳐보겠다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모여 있었어요. 병을 고치겠다는 의지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에게는 그들의 질병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뭘 잘못하고 있는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뭘 믿었냐 하면 그 잔잔한 연못에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앉으면 무게가 있으니까 물이 좀 흔들릴 거 아니에요. 그 때 재빠르게 가장 먼저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 이런 걸 믿고 있었어요.

아니… 이거 꼭 미신이라고 봐야 되나요? 천사를 하나님이 보낸 걸로 볼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왜 미신이야 이런 분이 있으실수 있겠지만… 미신 맞습니다.

또 가장 먼저 들어가야 낫는다는게, 일등을 무지하게 좋아하는 우리 한국사람 정서에 맞을 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구원 방식과는 전혀 상관 없습니다. 구원에 먼저와 나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게 중요했으면 구원은 유대인만 받는게 맞겠지요. 이 말씀은 마태복음 19장30절에도 자세히 나와있지요. 나중에 함께 나눌 기회가 있을 줄로 압니다. 하여간 거기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몸만 병든게 아니었어요, 믿음도 병들어 있었어요.

바로 이곳, 많은 사람들이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그곳에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예수가 오셨습니다… 할렐루야!!

죄사함을 받아야 할 그 곳 베데스다에서, 몸도 마음도 믿음도 병든 채 방치되어 있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겁니다. 오늘 이 순간에도 아직 몸도 마음도 혹은 믿음이 병들어 있는 성도가 있다면 우리 예수님을  반드시 만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베데스다에 오신 예수님은 한 사람을 주목하십니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요한복음 5:5

요한복음 5장5절 말씀입니다.

항상 그런것은 아니지만 성경에 나오는 숫자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람이 38년 동안 아팠다는 이야기는 유대인의 광야 38년을 생각나게 하지요. 신명기 2장14절을 보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명령을 거역한 자들이 겪게된 고통의 시간이 38년이란 시간으로 상징되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는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죄로 인하여 오랜시간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는 거지요.

더욱이 이 병자의 병을 표현한 헬라어 “아스데네이야”는 불의의 사고등으로 갑자기 생긴 병을 표현하기 보다는, 서서히 몸에 힘이 없어지고 움직일수 없게 되어 죽는 병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병자는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38년동안 서서히 움직일 수 없게 되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이런 희망 없는자를, 가망없는 사람을, 죄인인 병자를 예수님이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그 병자를 보자마자 예수님은 그가 누구이고 왜 아픈지, 지금 현재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한복음 5:6

요한복음 5장 6절의 말씀입니다.

아니 병든 사람한테 “낫고 싶으세요?” 이거 너무 어이없는 질문 아닌가요. 병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낫고 싶은거 아닙니까.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이런 당연한 질문을 하셨을까요.

사실 이 질문은 그렇게 간단한 질문이 아닙니다.

원어의 뜻과 마태복음 9장28절에서 눈먼자들을 치유하실 때의 말씀을 연관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하신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내가 너를 치유할수 있다는것을 믿느냐.

둘째로, 지금 당장 너의 죄에서 돌아설 준비가 되어있느냐, 너의 치유는 모든 것을 끊어낼 만큼  그토록 간절하냐.

이 엄청난 질문앞에 이 병자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물이 움직일 때, 천사가 와서 물이 움직일 때, 내가 제일 먼저 들어가야 하는데.. 내 몸이 안움직여서, 누가 도와줘야 하는데.. 아무도 안도와 줘요, 저좀 도와주실래요, 당신이 나 도와준다는 거죠, 물에 들어가는걸 도와 준다는 거죠?

예수님을 만났는데 원망과, 한탄과, 세속적인 욕심과 헛된 기대와 잘못된 믿음으로 정답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겁니다. 영생을 얻을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영원한 생명이 내 앞에 왔는데, 무엇이 중요합니까, 무엇이 더 귀합니까. 눈 깜빡하면 지나갈 이 생명  붙잡을게 뭐가 있습니까… 오직 예수,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자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병자 앞에 서신 예수님.

우리 같으면 그냥 “얘.. 너는 안되겠다, 넌 진짜 아플만 하구나, 니가 이러니까 안되는거야…” 이렇게 돌아설 만 한데, 요한복음 5장8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한복음 5:8

예수님이 병자에게 뭐라고 하셨다고요?

일어나라, 일어나라. 더 이상 주저앉아 있지 말고, 더 이상 무기력하게 있지말고, 더이상 아프지 말고, 더 이상 좌절하지 말고 일어나라! 일어나라! 새 생명을 가지고 일어나라!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시죠, 

네 자리를 들어라.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 병자는 아마도 짚을 엮어서 만들었을 침구에 폭 잡혀 있었을 겁니다. 이 병자의 자리는 이사람의 가난과, 병과, 나약함의 상징입니다. 이 병자는 바로 이 자리, 즉 연약함의 상징인 이 침구에서 꼼짝도 못하고 잡혀있듯이 누워 있었겠지요. 가난과 병과 나약함이 바로 이사람을 잡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니가 그 침구를 들어라! 너의 연약함에 잡혀있지 말고 너의 연약함을 네가 직접 조정하라, 운영하라!

끝으로 이렇게 말씀하시죠.

걸어가라. 계속해서, 멈추지 말고.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어느날 한번 반짝 감동으로 믿고 끝나는 일회성일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날마다 스믈스믈 올라오는 우리의 죄성을 싸워 이겨가면서 꾸준하게, 쉬지않고 걸어가야할 긴 여정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 말씀을 하시는거죠.

자, 이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병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주 오랬동안 한번도 느끼지 못한 뼈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가고, 몸을 짓누르던 고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을 겁니다. 병이 나았어요. 이 병자는 즉시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났으면 그저 훈훈할 이 이야기는 어이없는 반전이 일어나죠.

“이 날은 안식일이니…” 요한복음5장9절의 말씀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지요. 출애굽기 20장10절은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 병자가 자기 침구를 들고 걸어 갔으니까, 유대인의 눈으로는 이 사람이 지금 안식일날 이사를 가는 엄청난 죄를  저지른 겁니다. 병이 낫자마자 엄청난 죄를 진거죠. 당시 유대인의 관점에서는요.

우리 생각에는 에이 뭐 그래도 38년이나 된 병이 낳은게 중요하지. 안식일 어긴 것 벌 좀 받고 말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건 그 당시 안식일을 어긴 사람이 받는 벌을 전혀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당시에 유대인 사회에서 안식일을 어긴자가 받는 벌은 참수 또는 돌에 맞아 죽는겁니다. 병이 낳으면 뭐합니까 바로 죽게 생겼는데.. 유대인들이 협박을 하니까 이 병자가 뭐라 하지요.. “몰라요 누가 시켰어요, 제 병을 고쳐준 사람이 시켜서 그랬는데요.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요..”

이 병자는 책임을 회피하고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지요. 그는 그 후에 성전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자신을 고쳐준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뭐라 하셨습니까.

보라 네가 낳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한복음 5:14

여기서 말하는 더 심한 것. 38년이나 움직이지 못한 병보다 더 심한 병은 무엇입니까? 영적인 병, 사망과 멸망에 임하게 하는 병을 말합니다.

자 이쯤 되면 이 병자는 어떻게 하는게 맞는 일일까요. 여러분이 이 병자였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여! 어찌하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더 심한 병 영원한 죽음을 면하겠나이까?

이게 정답이죠, 당장 예수님을 따라 나섰서야죠.

기적을 경험했는데, 38년이나 된 병이 났었는데, 얼마나 그 기적이 강렬했을텐데..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을 협박하던 유대인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이 병자는 기적을 통해 아무런 영적 유익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좋은친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가장 좋은것은 무엇입니까?

기적을 경험하는 겁니까, 어떤 기적을 원하십니까, 무엇을 구하십니까. 병고침을 원하십니까,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겁니까, 유명해지고 폼나고 멋있어지는겁니까.

이런 것들은 가장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만나면 진리되신 예수님의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생명이 되고, 내가 그 생명으로 선한 싸움을 싸워 이기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며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을 구하십시오. 그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 좋은 친구교회 모든 성도님 한분 한분 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