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엽 목사
[ 갈라디아서 4장3절 ]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갈라디아서 4:3
갈라디아서의 중심내용은 한마디로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마치 선물처럼 거져 받는 것으로서 나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로서 구원받는다 라고 했을 때 이말은 우리에게 가끔 혼란을 초래합니다. 마치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생명’과 관련된 말입니다. 생명이야말로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에 무언가 조금이라도 보탤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의 나됨’ 나의 생명에 조금이라도 보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때부터 나는 ‘나의 관한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내 목소리, 내 얼굴, 내 키, 내 성격, 내 학력, 내 경력 등 모든 것을 내가 책임져야합니다. 그리고 책임져야 하는 순간부터 나는 종의 삶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책임맡은 자는 책임을 완수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책임을 부여한 자에게 그것을 완수했다는 증명을 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성경은 책임이 아닌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생명, 나의 삶은 오로지 은혜로서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은혜로 주어진 나의 생명만이 진정한 ‘나’ 입니다. 그외에 나의 노력과 내 힘으로 보태진 나에 관한 모든 것들은
진정한 ‘나’가 아닙니다. 나의 학벌, 나의 재산, 나의 두터운 인간관계.. 이러한 것들은 모두 나의 노력과 힘으로 보탠 것으로서 (비록 나의 삶에 유용하기는 하지만 ) 진정한 나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고, 변해 가는 것이며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나’ 라는 것이 진정한’ 나’ 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나는 나의 생명이고 나의 영혼입니다.
진정한 나, 나의 영혼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듯 나의 존재가 (나의 노력이 아닌) 은혜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즉 나라는 존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주권아래, 통치아래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이 자유함이 곧 은혜입니다. 이 은혜 가운데서만이 우리는 참다운 안식, 참다운 평화,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본문을 통해 설파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도, 누리지도 못한 채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종노릇 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서신서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은 율법아래 살아갑니다. 종은 주인의 말에 의무감으로 복종합니다. 그래서 종의 삶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자신이 놀고 먹지 않음을, 밥만 축내고 있지 않음을 끊임없이 증명해 내야 합니다. 그래서 종은 늘 맘이 편하지 않습니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닙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러한 종의 모습을 율법아래 사는 사람으로 비유합니다. 율법으로 사는 자는 (종으로서) 저주아래 있으며, 믿음으로 사는 자는 (자녀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눈에 띄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초등학문과 종노릇 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갈라디아서 4:3
초등학문 이래에서 종 노릇 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질문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번 던져 보아야합니다.
“내가 사는 삶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 내야하는 종노릇 하는 삶은 아닌가?”
“내가 안타까울 정도로 열심히 살고는 있지만 무엇을 위해 이토록 열심히 사는가? 혹시 누군가에게 증명해 내기위하여 종노릇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다른 말로 “나는 삶 가운데 안식을 누리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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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힘든 일을 하고 있어도 (그것과 상관없이) 내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안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일주일 내내 힘들게 일을 하고 난 후 주말이면 그보다 더 힘든 등산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등산이라는 행위는 비록 (사무실 책상앞에 앉아있는 것보다) 힘든 행위이지만 그것이 기쁨을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적어도 산에 오르는 동안은 세상의 근심과 불안을 잊기 때문입니다. 안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안식일은 적극적으로 누리는 날입니다. 무엇을 누리는가 하면, 하나님의 자녀됨을 누리는 것입니다. 자녀로서의 존재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이상 무언가를 끊임없이 행함으로써 주인에게 자신이 놀고있지 않음을.. 증명해 내야하는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빈둥거리며 놀다가 잔소리는 들을지라도 (등짝 스매싱을 당할지라도) 그러나 종들처럼 일 안한다고 해고될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자녀된 자라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자신의 자녀됨을 증명해 내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안식입니다.
이것이 곧 안식은 행위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문제라는 말의 뜻입니다. 이렇듯 안식일은 평안을 누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기쁜 날입니다.
마치 복음이 기쁜 소식인것 처럼, 안식일도 기쁜 날이고 우리가 손꼽아 기다려야 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실상은 복음을 들어도하나도 기쁘지않고 안식일이 돌아와도 안식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입니다. 잘못된 것은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무엇이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 살펴보고 고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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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처럼 안식일을 기쁨으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리새인을 비롯한 구약의 백성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이 되면 여러가지 지켜야 할 율법들이 많았습니다. 안식일에는 바늘하나라도 움직이면 일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벌을 받습니다. 그래서 움직일 때에는 옷에 바늘이라도 잘못 꽂혀있는지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현대의 유대인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엘레베이터를 타더라도 버튼을 누르지 못합니다.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안식일이면 층마다 자동으로 섭니다. 승질 급한 사람은 환장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율법중에 행여 하나라고 어기게 되면 무시무시한 형벌이 가해지니 그들은 안식일이 다가오면 신경이 곤두서게 됩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안식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인 우리들에게 마음껏 누리리고 안식일을 정성스레 구별해 놓으셨는데 정작 우리들은 온갖 규제와 법으로 안식일의 의미를 가려놓고 자신도 안식하지 못하고 남들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생각하면, 이런 모습이 떠오릅니다. 엄마가 아이들이 맛있게, 즐겁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며 정성들여 케익을 만들어 놓았는데, 정작 아이들은 “엄마가 힘들게 만든 케익이니 배고프더라도 먹지 말고 참자.. 힘들더라도 엄마를 위해 먹지 말자.. 먹지 말고 케익 안다치게 유리병 속에 넣어두고 소중히 보관하자..”
“아마 엄마도 우리가 힘들게 배고픔을 참고 케익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이 모습을 보면 기뻐하실거야…” 하며 비장한 각오로 배고품을 참는다면 과연 엄마가 이 아이들을 칭찬하실까요? 아마 혼구녕을 내지 않을까요?
안식일은 힘들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림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이 누림이라니? 그게 무슨 말장난이냐 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의 목적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목적은 바로 ‘우리의 행복’, 우리의 ‘누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엄마가 케익 만들어 놓고 먹어라 하면 순종하여 맛있게 먹으며 즐거워하는 것이 곧 ‘누림’이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의 실상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안식일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의 마음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안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 등장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하시기 위해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분께서 우리의 참된 안식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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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바로 지키라고 행하시고 보이신 일은 우리가 보기에 오히려 안식일을 깨는 행위였습니다. 일부러 안식일에 손마른 자를 고치시기도 하고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드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말할나위도없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우리의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매우 위험한 행위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러한 행위들로 인해 결국 십자가 형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온 몸으로, 삶으로, 행동으로 안식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보이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하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초등학문 아래 종노릇하는 우리들을 향해 갈라디어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나 이유는 단 한가지 입니다. 자녀인 우리가 우리의 참다운 실재를 깨달아 우리에게 허락된 참된 자유, 안식, 기쁨, 평안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의 비결은 예수님과 바울이 그토록 애써 가르친 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됨의 자녀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된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듯 안식이란 행위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문제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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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일관된 메시지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은혜, 사랑, 하나됨.. 이 말들은 결국 하나님 안에서 참다운 안식을 누리라는 말로 수렴될 수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오늘 갈라디아서 본문의 핵심은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까?’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만일 여러분 안에 참다운 안식이 없다면 무엇이 어디에 부터 잘못되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야야 합니다. 그냥 그대로 넋놓고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며 사도 바울이 꾸짖는 바 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주일 교회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왜 남들 다 놀러 다니는 휴일 아침에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있습니까? 하고 묻는 다면 이 질문에 그냥 아무 생각없이 “주일이니까 당연히 교회가야 하는거 아냐?”, “원래 그렇게하는 거 아니었어?” 하는 대답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조금은 심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참 자유와 안식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그 동안은 죄인줄 몰라서 그랬다고 하면 변명이 되겠지만, 이렇게 설교시간을 통해 “아 참다운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도 죄이구나”를 깨달았다면, 이제는 더이상 넋놓고 있으면 안됩니다.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참다운 안식을 달라고 떼를 쓰시던 아니면 진정한 깨달음을 위해 더 노력을 하시던 이도저도 아니면 하나님 앞에 나와와 “하나님 왜 저를 주일 날 놀러도 못가고, 그렇다고 교회에서 참다운 안식도 못누리는 이모양 이꼴로 만들어 놓으셨냐”고 하나님 앞에 투정이라도 부려야 합니다.
이도저도 안하고 그저 아무생각없이 기계적으로 주일에 교회와서 남들하는 예배 나도 한다 고 앉아 있기만 한다면 필경 하나님으로부터 “이 악하고 게으른 종들아” 라는 꾸짖음을 들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무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무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라도 후히주실 준비를하고 계신 하나님앞에 진심으로 나아가 모든 것을 구하시되, 무엇 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주기 원하시는 참된 안식과 기쁨을 구하시는 복된 성도 여러분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