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목사

이인엽 목사

[ 창세기 44장32-33절 ]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창세기 44:32-33

몇주 전이었습니다. 뉴욕으로 출장을 간 저는 정말 오랫만에 아주 심한 교통체증을 겪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세계 대유행 감염병이 여러가지를 바꾸어 놓았잖아요. 그 중 하나가 뉴욕의 교통체증이 사라진 거였습니다. 사람들은 인구밀도가 높은 맨하튼과 도시중심의 삶에서 전염병을 피해서 주변지역으로 많이 빠져 나갔고요. 재택근무로 일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게다가 관광객도 거의 끊어졌습니다. 길이 막힐이유가 없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그 교통체증이 다시 살아났더라구요.

고속도로가 꽉 막혀있길래 ‘야 이거 안되겠다’하고 일반도로로 들어섰는데 그곳도 마찬가지로 꼼짝도 못하더라구요. 얼마나 답답합니까, 사방에서 빵빵거리기는 하고.. 그래서 툴툴거리고 있었는데 창밖을 보니까 유대인 동네더라구요.

그러지 않아도 유다지파에 대해 묵상하고 있던 중이어서 흥미로왔습니다. 특이한 복장을 한 정통파 유대인들이 사는 동네여서, 20세기 초반에 입었을 것 같은, 남자들은 검은 양복과 모자, 여자들은 단발머리에 긴 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은 독특했죠. 우리 예수님도 유대인의 몸으로 오셨는데.. 육신의 예수님을 품은 유대인들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유대인 혹은 유태인이라 부르는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여러분이 이미 잘 아시는 것처럼 오늘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장자와 같은 위치를 차지했던 유다지파의 사람들에서 시작된 말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야곱 이후에 가장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인물은 사실 유다가 아니잖아요. 누구를 중요하게 알리고 있습니까? 요셉이죠. 우리 한국 목사님들이 정말 여러번 설교의 주제로 사용하는 요셉. 저도 어려서부터 교회에 가면 가장 많이 듣던 성경속 인물들 중 한 사람이 요셉입니다. 믿음으로 고난을 이겨낸 요셉,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전 사실 어렸을때 예수님이 요셉지파에서 나오신줄 알았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유다를 들어서 그 지파를 더 중요하게 사용하셨을까요. 유다는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중요한 뿌리가 되어지고 유다는 어떻게 다윗왕의 조상, 예수님의 육신의 계보가 되었을까요. 그냥 상황으로 본다면 요셉지파에서 다윗도 나오고 예수님도 나오시고 오늘날 유대인은 요셉인으로 불리는게 더 맞지 않을까요.

왜 요셉이 아닌 유다지파가 그 중요한 역활을 맡은 걸까요. 그것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다의 인생을 들여다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생을 통해 우리는 좀더  많은 것들을 생각해볼수 있을것 같습니다.

유다의 어머니는 야곱에게 별로 사랑받지 못한 레아입니다. 유다는 야곱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은 라헬의 아들이 아니었고 게다가 레아가 처음 낳은 르우벤과 같이 장자도 아니었죠. 레아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 그리고 유다를 낳았습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창세기 29:35

유다의 이름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뜻이란 사실은 참 놀라운 일 아닙니까. 이사야 43장21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은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21

또한 시편의 마지막편 150편 마지막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50:6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민족 이름의 뿌리인 유다를 생각할때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이유는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려”고 라며 되뇌이지 않겠습니까. 유다는 이런 놀라운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유다의 이름은 이미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통해 커다란 계획이 있으심을 보여주고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유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유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레아의 다른 자녀들과 어떻게 달랐을까요.

장자였던 르우벤은 자신의 엄마인 레아를 많이 걱정하였고, 위로하려고 들에 나가 합환체를 구해와서 레아에게 드렸던  따뜻하고 정이 많은 아들이었죠.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 할때 이를 막으려 했던 인물도 르우벤입니다. 하지만 큰형으로서의 권위와 강단이 있었던 인물은 아니었죠. 더욱이 그는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죠. 르우벤이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것에대해 성경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르우벤이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여간 그는 장자로서, 자식으로서 하지 말아야할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 동생인 시므온과 레위는 어떨까요. 그들은 세겜에서 디나의 복수를 위해 하나님과의 약속인 할례를 사용했고요, 세겜 백성들을 잔인하게 죽일때 앞장을 섰던 인물들입니다. 거칠고 과격하고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던 인물들입니다. 아마도 사랑받지 못한 레아의 분노가 그들에게 전해진것 같아요. 그들은 매우 거칠었습니다. 그 아래가 이제 유다이지요.

유다가 마치 장자와 같은 민족의 대표 지파로 서게된 것은 르우벤의 무기력과 비겁함, 시므온과 레위의 잔인함과 과격함 때문에 거져 얻게된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장자와 같은 지파, 예수의 육신의 계보가 되는 지파를 선택하시는데 ‘아유.. 첫째도 안되고, 둘째, 셋째도 안되고.. 할수없다.. 넷째인 유다를 써야겠다..’ 이러셨겠습니까? 그럴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남들이 없는 뛰어남이 있어서 유다를 선택해 사용하셨을까요? 물론 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계보에는 부끄럽고 부족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을 정확히 모두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선택은 사람들의 몫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유대인의 뿌리가 된 이 사람 유다에 대해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를 선택하신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좀더 도움이될 뿐입니다. 

유다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평가를 내릴수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유다는 잘못을 인정하고 끊어내는 사람이요, 유다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요, 형제를 위해, 아버지를 위해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1. 잘못을 인정하고 잘못을 끊어내는 사람

창세기 38:24-27 예수님의 계보의 한 사람인 베레스의 탄생과 관련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창세기 38:24-27

이것은 어떤 내용입니까?

이 일이 있기 한참 전에 유다는 함께 지내던 형제들에게서 떨어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해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들의 이름은 엘과 오난과 셀라였어요. 엘이 성장하자 유다는 엘을 위해 다말을 데려와 며느리로 삼습니다. 그러나 엘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십니다. 악에 대한 값이었죠. 다말은 이제 죽은 엘을 대신해서 오난을 통하여 자손을 얻어야 하는데 오난이 이를 거부하죠. 그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또한 악하였습니다. 오난도 죽고 막내 아들 셀라가 남았어요.

아들이 둘이나 죽자 유다는 문득 겁이났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겁이 난 거죠.  저 다말이 이상한거 아닐까? 다말이 재수 없는 것 아닐까?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 때문에 재수가 없어서, 누구 때문에 재수가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게 아닙니다. 유다의 아들들이 다말 때문에 재수가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었잖아요. 재수가 있네 없네 하는 생각 자체가 신앙이 없는 마음인거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일입니다. 유다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므로 하나님이 죽이신 것이지, 다말이 재수가 없어서 죽은게 아닙니다. 유다는 온전히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고있지 못했던 겁니다. 잘못된 믿음의 유다는 그래서 이런 행동을 하지요.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 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창세기 38:11

그럴듯한 명분으로 다말을 쫓아 낸 겁니다. 다말도 처음엔 유다를 믿었을 거예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셀라가 장성해도 유다는 다말을 부르지 않았어요. 뒤늦게 자기가 쫓겨 났다는것을 안 다말은 얼마나 속상했을까요. 다말은 유다집안의 자녀를 가질 권리가 있었지만 유다의 미신적인 생각으로 그 권리를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대의 자녀란 오늘날의 자녀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었어요. 자녀가 없다는것은 노년의 생존을 위협받는 끔찍한 재앙이었죠. 다말의 권리는 생존권의 문제였던 겁니다.

그러던 차에 유다의 아내가 죽고, 유다는 친구와 함께 자신의 양들의 털을 깍으러 갑니다. 그 당시에 양털을 깍는 날은 잔칫날 같이 기분이 들뜨는 날입니다. 보통 흥에겨워 술에 취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유다는 분위기에 취해 자신의 며느리인지도 모르고 창녀로 변장한 다말을 취했고 자신의 도장과 끈 지팡이를 담보로 맞겼습니다.

이 일로 다말이 임신하였고,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유다가 임신한 다말을 징계하려다 다말의 임신이 바로 유다 자신으로 인함을 깨닳는 장면입니다. 일이 이렇게 된을 안 유다는 다말의 행동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요.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사람이란게 잘못했음을 알고 여러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건 쉬운일이 아닙니다.  꽤 큰 용기가 필요해요. 우린 보통 비겁할때가 많습니다. “아, 잘못했다. 미안하다. 내 욕심이 과했다. 내 탓이었어. 내가 거짓말했어. 내가 잘못알았어. 미안해.” 라고 말하는 진심어린 사과, 진심으로 용서를 구함, 그리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결단. 이것은 꽤 큰 용기와 결단력을 필요로 한다는 말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 쉽지않은 일을 유다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려 최선을 다하는 사람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러 떠납니다. 식량을 구하러온 형들이 이미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나지요. 그런데 시간이 너무 오래되서 그런지 그들은 요셉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죠. 요셉은 식량을 쉽게 내주지 않고 여러가지로 시험을 하며 형들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러던 와중에 식량을 원한다면 요셉의 엄마 라헬이 낳은 자신의 동생인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하지요. 요셉은 동생 베냐민과 함께 살고 싶었어요. 하지만 요셉이 죽은 걸로 아는 야곱에게는 베냐민 밖에 없었습니다. 베냐민을 붙잡고 보내지 않으려는 야곱에게 유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창세기 43:8-9

베냐민을 보낼수 없다는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유다가 약속을 하는 장면 아닙니까. 그런데 약속은 유다만 한게 아니었어요.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라

창세기 42:37

두 아들이 비슷한 약속을 하였지만 야곱은 르우벤의 약속을 믿지 않았어요. 르우벤의 약속은 신뢰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약속은 달랐죠. 유다는 약속을 지키는자요, 그의 약속은 신뢰할 만한 약속이었던 겁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평가할때 ‘아, 우리 아버지는 틀림없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 ‘아 우리 엄마는 약속을 어긴적이 없어’, ‘아, 우리 아내 , 우리 남편, 우리 아이들 믿을 만해.. 약속하면 꼭 지켜’ 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십니까.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이 나를 칭찬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를 잘아는 사람이 나를 믿고 신뢰하는 것은 세상 돈으로 살수 없는 값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의지할수 있는 것도 바로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란 확신이 있어서 입니다. 유다의 약속은 야곱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 앞에 결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애굽 총리인 요셉의 요구대로 베냐민을 데리고 식량을 구하러간 형제들은 그러나 요셉이 놓은 덫에 걸리고 맙니다. 요셉은 자신의 은잔을 도둑맞았다고 형제들을 붙잡았고 그 은잔은 베냐민에게서 나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베냐민을 애굽에 두고 떠날 것을 명령하지요.

이때 절대적인 권력, 감히 함부로 쳐다보기도 어려운 권력 앞에 유다가 나섭니다. 아버지에게 베냐민을 꼭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한 유다가 나섭니다. 그 자리에 르우벤은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어요. 약속은 둘다 했는데, 실제로 그 약속을 실행한 사람은 르우벤이 아닌 유다였어요. 약속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약속은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요.

3. 형제를 위해, 아버지를 위해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사람

유다는 은잔을 훔친걸로 여겨지는 베냐민의 죄를 대신 지겠다고 나섭니다.

왜 유다는 자신의 죄도 아닌 일을 대신 지겠다고 나선 걸까요.

아버지가 베냐민을 사랑하니까.

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니까.

유다의 대속은 예수님의 대속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왜 유다지파를 선택하셨을까요. 모릅니다. 하나님이 왜 그를 선택하셨는지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봅시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유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유다는 완벽하지 못해서 잘못을 행하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요, 유다는 철저하지 못해서 잘못을 행하나, 그 잘못을 철저히 끊어내는 사람이요, 유다는 평소에 약속을 지켜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 사람이요, 유다는 아버지의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대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유다는 자신의 이름처럼 온몸으로 온삶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합당한 자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유다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유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야곱) 의 입술을 통하여 이렇게 축복과 예언을 하고 계십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창세기 49:8 -12

장자권에 대한 축복, 왕권에 대한 축복,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됨의 축복이 이스라엘의 입술을 통하여 예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유다처럼 온 삶을 주께 찬양드리는 삶으로 만들어 가 봅시다. 주 앞에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며, 끊어내야할 더러움을 끊어내는 결단을 가지며,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가며,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를 위하여 나의 소중한 것을 드리는 주를 향한 찬양이 되어지는 복된 삶을 누려 봅시다.

참된 찬양이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