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갈라디아서 3장 15-26절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갈 3:15-26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뉴욕의 도심은 마치 서울의 한복판처럼 아주 복잡합니다. 사람들도 많고 차도 많고 지나가다 사람들끼리 어깨를 부딪힐 정도죠. 전반적으로 한적한 미국의 풍경과는 참 많이 다른 곳이 뉴욕 도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미국사람들조차 뉴욕으로 관광을 오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붐비다 보니 어린 아이들에겐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도시가 되는 거예요. 어느날 뉴욕거리를 지나가다 본 광경인데요, 한 서너 살 되보이는 아이들이 쭉 걸어가고 있는데, 아이들 몸을 끈으로 엮어서 마치 굴비 엮어 놓은 것처럼, 마치 죄수들을 포승줄로 엮어 놓은 것처럼 그렇게 걸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 모습이 참 특이해 보였습니다. 자유의 나라라는 미국에서 말이죠. 왜 이러는 걸까요? 그렇죠, 아이들은 스스로 조심할 줄 모르니까, 선생님들이 일대일로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위험을 방지하려고 그러는 거겠지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서너 살이 아니라 삼사십 먹은 사람들이 이러고 지나간다면 어떨까요. 그럴리도 없겠지만 그런다고 치면 참 우수꽝스러운 일이겠지요. 누가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하겠습니까. 상식을 벗어나는 일 아니겠습니까.
굳이 신앙의 영역이 아니어도 우리는 이렇게 기본적인 상식의 기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지금이나 예전이나 마찬가지 이죠. 그런데 이제 갈라디아교회에서 율법주의자들이 이런 상식 수준에도 못 미치는 주장을 하고 있으니까 바울이 너무 답답한 겁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를 아주 많이 왜곡하고 헤매이고 있으니까 참 난감한 것이죠.
믿음만 가지고는 안되고 율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마치 다 큰 어른들을 줄로 묶어서 길을 나서겠다는 상식 밖의 주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것이 정말 어리석은 주장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율법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바울이 계속해서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부정하며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나누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율법은 나쁜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 나쁜 것을 주셨는가? 율법도 믿음도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왜 율법을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를 멈추라고 하는가? 그렇다면 율법은 지키려고 애쓸 필요도 없는 것인가? 더 이상 율법은 쓸모도 없는 것인가? 그런데도 교회는 왜 계속해서 구약을 성경으로 남겨 두었나?” 하는 이런 다양한 질문들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이쯤해서 율법에 관한 바울의 설명을 기초로 하여서 율법은 무엇인가, 그 율법은 우리에게 무슨 영향을 주는 것인가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 3: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무엇입니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 22:18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들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미리 정하신 언약인데, 아브라함으로부터 430년후 율법이 생겼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으로부터 430년 후에 무슨 일이 있었죠?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출애굽 하였죠. 그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죠. 그래서 우리는 율법, 이러면 모세를 떠올릴 수밖에 없지요.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출 19:1-3
2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이 일 후에 모세는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을 받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치고 십계명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십계명의 내용은 어떻게 됩니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죠.
-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 네 부모를 공경하라
- 살인하지 말라
- 간음하지 말라
- 도둑질하지 말라
-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이제 여러분 십계명을 들어보시니까 어떻습니까. 그렇게 악합니까? 폐기해야 할만큼 뭔가가 잘못 됐습니까? 부정해야 할 무슨이유가 있어보입니까? 그냥 구구절절이 옳은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반대하는 것같이 보이는 율법은 십계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다른 걸 가지고 버려야 할 율법이라고 했나? 버리라고 한건 맞나? 아니, 예수님은 또 율법을 완성했다고 하시지 않았나? 이게 도대체 뭐가 뭐지? 매우 혼란스럽지요. 그러기에 분명히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좀 더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제 몇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첫째, 신약에서 말하는 율법은 십계명만을 이야기 하는 것인가? 답은 뭡니까? “예” 일까요? 아닙니다. “아니요”가 맞는 답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법은 십계명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가지 의식에 대하여, 일반적인 삶의 기준에 대하여, 모세는 여러가지의 법을 받았습니다. 이 법들은 모세 5경,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토라라고 부르는 것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 법들을 정리하면 총 613개의 율법으로 정리됩니다. 그 613개의 율법 중에 248개는 무엇무엇을 하라는 명령으로, 365개의 법은 무엇무엇을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한 이 613개의 율법은 그 내용에 따라서 도덕법 (십계명이죠), 그리고 제사등과 관련된 예식법, 생명유지와 위생등에 관련된 건강법, 그리고 사회질서를 위한 국가법으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율법” 이라고 이야기하면, 어떨 때는 십계명을, 어떨 때는 613개의 모든 율법들을, 어떨 때는 모세 5경 전체를, 어떨 때는 십계명을 제외한 나머지의 법들을, 어떨 때는 의식과 관련된 법들을, 그리고 어떨 때는 구약 전체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둘째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을 왜 주셨을까? 우린 지금 갈라디아서를 보고 있으니까 갈라디아서의 기준으로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
갈 3:19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요, 율법이 없으면 사람이 죄를 짓고도 자기가 죄를 진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인식하게 만드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너무 착해서 그냥 놔두어도 아무런 죄를 짓지 않는다면, 흔하게 말하는 법 없이도 살 사람,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모두가 다 그렇다면, 법은 아예 필요도 없겠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세상에는 법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완벽하지를 못하니까 율법을 주신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의 죄는 어떨까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는 뭡니까?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하신 것을 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에덴 동산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죠. 아니, 하와가 남의 것을 훔쳐다 먹은 것도 아니요, 남의 것을 뺏어 먹은 것도 아닌데, 누구에게 피눈물나게 하고 선악과를 먹은 것도 아닌데, 그냥 나무에 풍성하게 열린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해보이는 그 선악과 하나 먹은게 그게 뭐라고 원죄가 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죽어 흙으로 돌아갑니까. 그게 뭐라고..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 그러기에 613개의 율법조항은 248개의 하라는 명령과 365개의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이미 악하기 때문에 그 본성이 이끄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지 말기를 원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하는 일을 하기 싫은 마음, 그런 악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의 표준인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 표준이 없이는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을 인식조차 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의의 기준, 죄의 경계를 정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입니다.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 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인간이 악하기에 자신의 죄를 보라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받아서 딱딱 자로 잰 것처럼, 그 모든 율법들을 기가 막히게 잘 지켜서 한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가 구원을 얻었습니까. 모두가 의인이 되었습니까?
여기서 나오는 세번째 질문은, 율법은 구약시대 유대인에게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었는가? 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구약시대의 유대인 중에서 완벽하게 의인이어서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었다면, 그는 분명히 그 율법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구원을 주는 일에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율법이 악해서 유대인들을 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악해서 그 율법 안에 머무르지 못한 것입니다. “..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히 8:9)”
이런 이유로 구약시대 동안에 율법은 온전한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어지지 못하고, 마치 어린아이들이 뉴욕거리를 나가야할 때 묶는 줄, 어린아이를 이리 저리로 돌보는 초등교사와 같은 그런 역할을 감당해 왔습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갈 3:24
초등교사는 뭘 말하는 건가요? 우리에게 몽학선생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단어 “파이다고고스” 는 하인 중에서 어린아이를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문적인 선생님으로 볼 수는 없는 일이었죠. 헬라 문화권에서는 아이들이 16살이 되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교사에게 교육을 받기 시작하는데요, 그전까지만 필요한 것이 이 초등교사 파이다고고스 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한계가 있는 제한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좀더 자세히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제가 유대인이라고 가정합시다. 어려서부터 율법, 토라를 달달 외웠습니다. 그리고 그걸 지켜야 된다고 그래야 구원을 얻는다고 수도없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잘 지켜 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율법조항 중 하나를 어겼습니다. 그리고 며칠지나서 또 하나의 조항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일년이 지나서 또 하나의 조항을 어겼습니다. 그렇게 자꾸만 쌓여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 나는 정말 안되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됬습니다.
이것이 구약시대에 율법이 그나마 온전한 사람들에게 한 일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하는 동시에 최선을 다해도 안되는 것을 알게 하여 주는 것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도 안 될때, 우리는 또 다른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찾게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능력에 대한 한계점을 인식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계점에 대한 인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 자체가 구원으로 이끌고 가는게 아니라,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이끌고 나가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 이런 역할도 있습니다. 제가 아주 난폭하고 나쁜 성격의 유대인이라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율법을 하도 달달 외워서, 아주 나쁜 짓을 하고 싶은데 그럴 때 마다 너무 찜찜하고, 무엇인가 자꾸 브레이크가 잡히고 나빠도 아주 심하게 나쁘게 굴기는 좀 어려운 그런 상황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죄인줄도 모르고 폭주하는 사람들을 멈추게 하는 그런 역활을 율법이 해왔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천방지축으로 나대는 것을 초등교사가 막는 것처럼 율법이 그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시대에 초등교사로서의 율법이 감당했던 역활입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은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적용이 된 것이죠. 그런데 이제 이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누가 오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죠. 예수께서는 많은 것을 가르치셨는데 그중에 하나 율법과 관련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아니,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을 폐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것처럼 말했는데, 정작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시니까 뭐가 맞는 말일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당시에 유대인들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나라를 빼앗겼고, 잡혀갔고, 그러다 간신히 돌아와 옛 땅에 나라도 없이 머물러 살고 있었습니다. “아, 우리가 율법을 잘 안지켜서 이 어려움을 겪는구나”. 그런 자각이 그들 사이에서 강렬하게 일어났죠. 이러한 움직임 속에 평신도 율법학자 그룹인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라고, 그래야 구원이 있다고 강하게 강조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외형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들 살인하지 말라는 말 들었지. 너 진짜 살인만 안하면 다인 줄 알지. 그런데 너희 형제를 미워하쟎아? 그럼 너 벌써 살인한거야. 너, 형제에게 욕했지. 너 그러면 지옥불에 들어갈거야. 너희들 간음하지 말라는 말 잘 알지. 너희들 생각에는 실제로 나가서 바람피는 것만 간음인 것 같지. 그런데 지나가는 여자보고 ‘이쁘다’라고 생각했다면 그럼 너 이미 간음한거야. ‘어, 저 남자 참 멋있네’ 하면 너 벌써 바람핀거야. 차라리 네 눈을 빼 버리는게 날 걸. 지옥가는 것보단 그게 낫지 않겠니”.
자, 이런 말씀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에 대한 설명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참된 율법의 준수는 행위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과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밖으로 들어난 율법의 행위뿐만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마음과 생각까지도 보시고 구분하십니다. 마음과 행위가 하나가 되어서 율법을 지킬 때, 그때 온전한 율법의 준수가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만으로도 생각만으로도 말만으로도 율법은 얼마든지 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율법에 대한 온전한 이해입니다. 예수께서는 왜곡되어 있던 그저 겉으로만 지키면 끝이라는 율법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아 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한 율법은 기존의 율법에 뭔가 더 많은 것들을 더한 것이 아닙니다. 원래 율법이 가지고 있던 참된 의미, 그 당시 오염되어있던 율법의 온전한 의미를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완성된 율법은 지키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더욱 더 지키기가 어려워 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율법도 사람들이 잘 따라가지 못했어요. 그냥 착한 척 하는 것도 어려워서, 그냥 겉으로만 지키는 것도 어려워서, 율법을 못지키는 일이 허다했어요. 그런데 하물며 더욱 어려운 이 완성된 율법앞에서 그것을 지켜 구원에 이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높은 기준앞에서는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힘들어하지 않았습니까.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막 10:26
이 구절은 예수님의 높은 기준 앞에 좌절하고 돌아선 부자청년의 구원과 관련되어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질문을 던졌던 구절이죠. 이제 이 높은 기준 앞에 좌절하는 모두를 향해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막 10:27
예수께서 완성하신 율법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더 이상 율법을 통하여는 누구도 구원에 이룰 수 없음을 알게 합니다. 못해요, 아무도 못해요. 평신도도 집사도 권사도 장로도 목사도 아무도 못합니다. 율법 아래에서 우리는 희망이 없습니다. 율법은 더 이상 구원의 길일 수 없습니다.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합니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겁니다. 예수를 붙잡는 겁니다. 사람으로는 할수 없으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음을 믿는 겁니다. 그럴 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갈 3:23-25
율법은 그 자체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 악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 기준이 들어 있습니다. 율법은 구약시대 내내 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난 우리는 더 이상 초등교사의 손에 이끌려 구원을 향해 나아가지 않습니다. 율법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여러분들 가운데 있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