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갈라디아서 1장 6-10절 ]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6-10
요즘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는 “기독교인이 줄어든다, 유럽에도 기독교인이 줄어든다, 그래서 유럽의 교회당은 식당도 되고 오피스도 되고 그렇게 망해가고 있다” 하는 이야기들을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제가 출장을 많이 가지 않습니까. 어느 수요일 저녁에 한적한 시골길을 운전하고 있으면 미국 시골은 얼마나 어두운지 아주 새카맣습니다. 길가에 집 한채가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작은 시골교회 하나가 탁 나타납니다. 어둠속의 등대처럼 그렇게 나타납니다. 그 자그마한 시골 교회 주차장에는 차들이 빼곡히 주차되어 있습니다. 놀랍죠. 그 시골에서 수요예배 드리러 나온겁니다. 미국교회 성도들 진짜 열심입니다. 이것은 옛날이야기 아닙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나도 저기가서 예배드리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열심들에도 불구하고 미국교회도 또 쇠퇴한다고 하니까, 마음이 좀 안좋죠. 교회가 쇠퇴한다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목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왜 이들 나라에서 기독교는 쇠퇴하는 걸까요. 여러가지의 설명들이 나와있죠. 그러나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아요. 아무리 미국에 오래 살아도 그들의 마음과 믿음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들은 교회를 떠나고, 왜 그들은 믿음을 버리는 걸까요.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해가 좀 더 쉽습니다. 제가 한국사람이니까요. 한국교회 요즘 어떻습니까. 조사에 따라 조금 다르긴 한데, 한국 개신교 인구는 전체 한국인구의 15% 정도라고 합니다. 한때 20%가 넘었던 것에 비교하면 많이 줄어든 숫자라고 합니다. 여러곳에서 신실한 기독교인들의 우려 섞인 이야기들이 넘쳐나고 있죠. “큰일났다, 기독교인이 줄고 있다. 젊은이들이 안온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인이 줄고 있는건지, 교회에 출석하는 인구가 줄고 있는건지는 좀 더 따져봐야 되는 것 아닐까요. 교회당에 나간다고 다 성도라고 볼수는 없쟎아요. 그래서 사실 더 큰 문제점은 따로 있습니다. “내 종교는 개신교” 라고 대답한 사람중에 4분의 1은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큰 문제 아닐까요. 이단에 빠진 사람의 비율이 너무 높고 너무 빨리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단. 잘못된 믿음. 이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 열쇠 아시죠.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온 열쇠. 납작한 쇠에 굴곡을 만들어 사용하는 열쇠. 보기엔 다 비슷해 보이잖아요. 하지만 각자의 문을 열수 있는 열쇠는 딱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열쇠에 굴곡 하나만 더해도, 굴곡 하나만 빼도 맞지 않습니다. 문을 열지 못하죠. 문도 못여는 열쇠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참된 복음을 알려 줬습니다. 거기에 하나만 더해도, 거기에 하나만 빼도 맞지 않는 열쇠처럼 쓸모가 없어진다고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맞는 소식을 맞게 믿어야지 믿고 구원을 얻는 복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맞는 소식은 못 믿고 엉뚱한 소식만 믿으면 이게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너도 죽고 나도 죽는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믿음이 되는거에요. 사실 이단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넓게 퍼져 있습니다. 심지어는 온전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의 믿음도 자기 혼자 이단에 빠져 있을수도 있습니다. 이단이 별게 아니라 잘못된 믿음이니까요.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거예요. “얼마나 못 났으면 이단에 빠져..” 이러시지만 이단에 빠지는 일은 사실 참 쉽습니다. 누가 “나, 이단이야” 이러는 사람 있습나까. 자기들은 다 열심히 믿는 줄 알지요. 이단 교주나 자기가 이단인줄 알지, 교주 와이프도 속는 것이 이단입니다. 이단 스스로 다 교회라고 하잖아요. 다 목사라고 그러잖아요.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잘못된 믿음의 한 부류, 이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갈 1:6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이 직접가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예수님에 관해서, 하나님의 뜻에 관해서, 구원의 역사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했고, 그 소식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감동을 받아 영이 깨어나고 교회를 이룬것이 갈라디아 교회들 입니다. 똑같이 복음을 들어도 어떤사람은 마음이 흔들리고 깨어나, 영이 살아나고 그 복음이 믿어지고 그렇게 성도가 됩니다. 그런데 어떤사람은 복음을 들어도 전혀 감동이 없지요.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그게 맞는 말이야? 그게 그럴 수가 있어? 앞 뒤가 좀 안 맞는것 아니야?” 하면서 믿지 못합니다.
믿음이 어떻게 생깁니까. 믿음은 우리가 만드는 걸까요?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믿는 척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믿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만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참 놀라운 일인 것이죠. 사람의 눈으로 볼 수가 없어요. 사람의 논리로 설명할 수도 없어요. 믿음은 철학도 아닙니다. 세상 일도 아니죠. 그런데 믿어진다고요. 믿는다고요. 그래서 은혜인 것이죠.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 과정을 거쳐서 은혜로 교회로 세워진 겁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버렸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당시 유대인 중에는 예수님을 믿고 예루살렘 교회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예수님도 유대인으로 오셨고, 제자들도, 바울도 유대인이었으니까요.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선 유대인들이 다수였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인중에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 생각이 뭐냐하면, 예수님을 믿기는 믿습니다. 예수님을 부정하는건 아닙니다. 이게 더 무서운 것이지요. 주 예수 그리스도 이걸 다 믿습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에 하나를 더했습니다. 뭘 더했을까요. 율법을 더했습니다. 천국 어떻게 가나?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되나? 는 문제에, “주 예수 그리스도 믿어야지, 그런데 착하게 살아야지. 그런데 율법을 지켜야지. 그런데 할례를 받아야지.” 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갈라디아교회를 들어간 것으로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있던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의 교회로 옮겨 온거죠.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 입장에서는 이 사람들이 더 오리지날 같아보이지 않았을까요. 더 진짜 같지 않았겠습니까. 신뢰가 더 가는 거예요. 예루살렘교회에서 왔다는데.. 유대인인데..
그러니까 이런 말이 도는 겁니다. “그 새로온 유대인 선생이 그랬어.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율법 다 지켜야 된다고. 예수님 믿어도 그거 해야 된다고.” 어떤 이는 이 말을 듣고 “그래,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쉬울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어. 그렇게 쉽게 천국가면 좁은 길이라고 하셨겠나.. 그것봐라” 이러면서 순식간에 다 넘어갔습니다. 다 넘어갔다는 소식을 바울이 들은 겁니다. 바울은 “이해가 안된다, 정말 이해가 안된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당하냐” 하며 진짜 속상해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6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갈 1:6
바울의 “이상하게 여기노라” 는 말은 아주 차분하고 점잖게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원어의 뜻을 찾아보면 ‘’야, 너 미쳤어” 하며 소리지른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아무리 선하더라도,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있더라도, 심지어 천사같은, 사람이라도, 아니 그냥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 완벽하게 멸망하는 것이죠.
갈 1:7-9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주로 영접했습니다. 그후에 평생을 살면서 다른 복음을 받아들일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지금도 전혀 없습니다. 이런 이단 저런 이단 기웃거릴 생각도 안해봤습니다. 통일교도 신천지도 베뢰아도 아예 관심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 일거예요. ‘이단’ 하면 ‘에이’ 이러구 코웃음치고 말지 않습니까. ‘다른 복음’ 이러면 ‘에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하지 않나요. 아니 우리가 통일교를 쫓아 가겠습니까 신천지를 쫓아가겠습니까. 그냥 갈라디아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유대주의자들에게 홀딱 넘어간 것 아닙니까. 게다가 그들이 주장한 내용이 할례에 관한것이니까 이건 진짜 오늘날 우리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보이지 않나요. 그러나 그렇게 우리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가 성경에 있을리가 없잖아요. 지금 우리는 바울서신을 보면서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제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다가 1년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서 사업을 할 때 이야기입니다. 후배들하고 같이 모여서 여행사를 운영했었는데, 수입이 들쑥 날쑥 했습니다. 잘될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후배들 급여도 잘 못줬습니다. 조금 벌면 같이 나눠쓰고 안되면 한푼도 못 가져가고 그랬던 겁니다. 그래도 급여를 못 주는 때라도 일하러 나온 후배들을 위해서 돈을 꾸어서라도 식사는 해결해줬습니다. 아침도 사 먹이고, 점심도 사 먹이고, 저녁도 사 먹이고… 그런데 그때 제가 뭘 했냐하면요, 돈이 좀 벌리면 그중에 일부를 떼어서 헌금을 하겠다고 따로 모아뒀었습니다. 은행에 저축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책상서랍에 넣어 둔 것이죠. 주일이 되면 가져가서 헌금을 하는 거예요. 밥을 굶는 한이 있어도 헌금은 했던 겁니다. 그런데 어느날 제가 출장을 갔다 왔는데 서랍 속에 돈이 좀 비었던 적이 있었어요.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없어졌어요. 그래서 후배들 중에 제일 연장자인 후배를 불러서 물어보니까 다 같이 나가서 밥을 사먹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돈으로 말이지요. 헌금할 돈으로 밥을 사먹었데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그 후배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엄청 혼을 냈습니다. 자, 여러분 생각에는 누가 더 큰 잘못을 한 것일까요. 어차피 같이 벌어 같이 나눠 쓰는 돈을 가져다가 밥을 사먹은 후배가 틀렸을까요. 헌금할 돈으로 밥을 사먹었다고 야단을 친 제가 잘못했을까요. 후배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어요. 크리스찬도 아닌데 헌금할 돈이 뭐가 중요했을까요. 배고프면 있는 돈으로 밥을 사먹는게 맞지 않았을까요. 저 자신은 스스로 성도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헌금이 중요했지요. 그런데 왜 헌금이 중요했을까요? 첫째로, 교회에가면 헌금 바구니를 돌리기 때문에 “아, 헌금은 꼭 해야하는 거구나.. 헌금 안하면 교인이 아니구나.. 헌금 안하면 하나님한테 죄를 짓는 거구나.. 헌금안하면 하나님한테 죄 짓고 지옥가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둘째로, 내가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 헌금을 하면 하나님이 10배로 100배로 갚아 주시지 않겠나.. 이제 사업을 시작했는데 하나님의 후원이 필요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20대 후반의 제가 교회에 다니면서 했던 생각들입니다. 그걸 후배가 막았으니 그 후배는 나를 지옥불로 밀어넣는 자가 된 것이죠. 내 사업을 말아먹는 원흉이 된 것입니다. 그까짓 밥 한끼 때문에 말이죠.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바울이 이 모습을 봤으면 저에게 뭐라고 했을까요.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즉 “너 미쳤어..” 그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구원의 문제는 헌금을 하고 안하고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구원의 문제는 주일날 교회에 나가느냐 안나가느냐에 달려있지도 않습니다. 구원의 문제는 술을 먹느냐 마느냐에 달려있지도, 담배를 피우냐 마느냐에 달려있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구원의 문제는 착한 일을 얼마나 많이했느냐 말았느냐,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사랑했느냐 말았느냐에 달려있지도 않습니다. 물론 성경은 헌금도 주일성수도 절제도 선행도 사랑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열쇠는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에 어떠한 것, 즉 율법의 행위를 더한다면 그 믿음은 잘못된 믿음인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천사처럼 좋은 마음을 가지고 하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구원의 요소에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무언가를 더하면 저주를 받을 일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모든 성도의 선행은 다 쓸데 없는 것인가요.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막 살아도 되는 것인가요.
아니죠. 제가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게 아니잖아요. 심지어 기독교가 전파된 초창기에는 믿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죄성 가득한 몸을 가지고 막 살다가 가자.. 하는 이단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그렇게 하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죠. “믿음이 전부라며, 막 살아도 되겠네..” 이렇게 말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데 믿음이 있으면 막살고 싶어도 막 살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의깊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그 믿음이 이유가 되어서 바르게 살아가려고 부단히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바르게 살려는 노력과 행위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착한일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잘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참 쉬워 보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10
얼핏보기에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바울의 주장은 참 쉬워 보이거든요. 바울과 맞서던 율법주의자들이 믿음이면 충분하다는 바울의 주장을 보고 뭐라고 비판했을까요? “바울이 너희들 기분좋게 해줄려고 그냥 쉽게 얘기해 준거야. 아, 믿음만 가지고 어떻게 천국에 가니.. 헌금도 해야되지 않니.. 새벽기도도 해야되지 않니.. 담배도 끊어야되지 않니.. 봉사도 해야되지 않니.. 성경암송도 해야되지.. 그래야 구원받지 않겠니. 좁은 길이라니까”.
바울이 답답해서 땅을 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인기 얻으려고 믿음이면 된다고 그랬을 것 같은가. 전혀 아니다. 나는 사람들 인기 그런 것에 관심 없어. 나는 하나님의 종이란 말예요. 나는 그냥 진리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의 애끓는 그 외침을 바르게 이해하시는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차고 넘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