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갈라디아서 1장 3-5절 ]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갈 1:3-5

우리 교우분들 중에는 이미 결혼을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신데, 여러분은 우연한 기회에 배우자를 만나셨나요 아니면 지인의 소개로 선을 보셔서 배우자를 만나셨나요. 예전 분들은 맞선이라는 것을 통해서 배우자를 만나는 경우가 참 많았죠. 요즘은 선을 본다는 말도 잘 안쓰긴 하지만 여전히 남녀는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만남을 시작하곤 합니다. 소개팅 등 그런 만남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여간 여기 아주 아름다운 여인과 아주 멋있는 남성이 소개팅을 하고 있습니다. 외모만 아름답고 멋있는게 아니라 성품도 너무 좋아서 서로는 만나자 마자 호감을 느꼈습니다. 서로는 너무끌려서 차 한잔만 하고 헤어지기가 아쉬웠죠. 그래서 식사를 같이하기로 했습니다.

남자는 재빠르게 맛집을 찾아내서 두 사람은 재밌고 즐거운 시간을 기대하며 맛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역시 맛집이라 식당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둘은 맛있는 음식을 시켜 즐거운 마음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즐기고 있는데, 이 커플이 워낙 선남선녀이다 보니까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한참을 재미있게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이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에 밥풀이 묻어있는 거예요. 이 멋있는 남자의 이빨에 고춧가루가 잔뜩 껴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꾸 쳐다보는데, 이 남자는 여자한테 “저기, 얼굴에 밥풀 묻었어요” 말할 수 있나요. 이 여자는 그 남자한테 “이빨에 고춧가루 좀 빼세요” 말할 수 있나요. 보통은 못합니다. 초면에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런데 이분들이 결혼을 하고 한 30년을 사이좋게 살았어요. 여전히 서로를 많이 많이 사랑해요. 그런데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떨까요. 남편은 아내의 밥풀 묻은 것을, 아내는 남편 이빨에 불이난 것을 편안하게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요. 무언가 잘못된 것, 살짝 창피한 것을 지적받는 일은 서로가 신뢰하고 사랑하지 않고서는 받아들이기도, 말하기도 어려운 일이죠. 그러나 신뢰한다면, 서로 사랑한다면, 더구나 조금 잘못되고 조금 창피한 일이 아니라 살고 죽는 문제라면, 얼굴에 밥풀이 아니라 독충이 불어있는 일이라면, 그건 반드시 모든 것을 무릅쓰고라도 알려줘야 하는 일이겠지요.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 중에 많은 내용들은 이처럼 누군가는 듣기에 불편한 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말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래 같이 산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보다 더욱 커다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이 편지를 써내려간 이유로, 편지를 받은 많은 교회들은 돌이킴의 결단을 할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갈라디아서를 보면서 이 말씀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이 성경이 그저 그 시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하고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어떤 말씀들은 듣기에 참 거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바울의 편지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돌이킨 것과 같이, 혹시라도 바울서신들을 보시며 불편한 부분이 있으시거든, 돌이키는 은혜가 여러분들의 믿음 안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갈 1:4

자신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닌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되었음을 선포한 바울은 이제 이렇게 말문을 열고 있습니다. 얼핏보기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기 쉬운 이 구절은 아주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아마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은 예수가 성이고 그리스도가 이름인가보다..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죠. 갈라디아서 1장 3절에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는 “퀴리오스” 라는 헬라어를 썼는데, 히브리어로는 “아도나이” 입니다. 아도나이라는 말은 “여호와” 라고 쓰인 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가 없어서 “주 (아도나이)” 라고 불렀던 단어입니다. “여호와” 라고 쓰고 “아도나이” 라고 읽었다는 거죠.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부르면서 “아도나이 (주) 예수”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부름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이 본질상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아도나이 예수”, “주 예수” 라는 말속에 녹아있는 거지요. 그렇다면 “예수” 라는 이름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 즉,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라는 뜻의 헬라식 표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아시는 내용이지요. 마태복음 1장 21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는 장면이 있는데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 여호수아, 예수.”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다. 그러나 그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이 마을에도 예수, 저 마을에도 예수, 할아버지도 예수, 손자도 예수. 우리 한국이름 중에도 굉장히 흔한 이름이 있죠. 굉장히 좋은 뜻을 갖고 있어도 너무 흔해서 귀하게 느껴지지 않는 그런 이름 예수라는 이름으로 성자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참 많은 의미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자, 이제 바울은 “주 예수” 에 한가지의 단어를 덧붙입니다. 뭡니까. “그리스도” 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는 뜻의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는 “마쉬야흐”, 아람어로는 “메시아”, 헬라어로는 “크리스토스” 입니다. 우리가 제일 익숙한 말은 “메시아” 이죠. 예수께서는 본인이 메시아이심을 밝히셨습니다. 다음 구절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셔서 사마리아 여인과 나누시는 말씀 중의 한 구절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요 4:25-26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합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천국으로 이끄시는 구원자 메시아다” 라고 이해하지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메시아’ 라고 이야기 하니까,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말이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말로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이 신이심을 강조하는 그러니까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말의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고 했죠. 그렇다면 당시에 누구에게 기름을 부어 구분했습니까.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부어 구분했고 이들은 선택된 하나님의 종, 즉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얼핏 듣기에 메시아라는 말은 구원자라는 통념이 있어서,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100% 인간인 동시에 100%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복음의 핵심이 되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라고 대답한 것은 복음의 핵심을 꿰뚫는 놀라운 대답인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고, 주는 인간이시고,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주는 신이십니다” 라고 대답한 거죠.

그래서 아도나이 예수 크리스토스는 복음의 핵심이 되는 아주 중요한 내용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누가 여러분한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그 말의 뜻은 뭡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이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심을 믿으십니까”, “예수는 구원자 이심을 믿으십니까”, “예수께서 인간으로 오셨음을 믿으십니까” 라는 질문들이 한꺼번에 들어가있는 것입니다. 답은 뭐죠? 이 질문의 답은 뭡니까? “아멘” 입니다. 아멘, 아멘, 또 아멘입니다.

자, 그리스도께서 2천년 전에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왜 오셨을까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갈 1:4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에 모든 인간은 죄와 벗하며 살아왔습니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을 보면, 아담과 하와로부터 이어진 원죄를 기초로 해서 자기 죄를 하나씩 하나씩 그 위에 쌓아 놓는 거예요. 나중에는 옛날에 지은 죄는 새로운 죄들로 덮여서 보이지도 않을 정도가 됩니다. 정말로 조금만 양심이 있다면 자기가 얼마나 죄인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 또한 20여년이라는 시간을 목회를 해왔지만 아직도 쉴새없이 솟아나는 죄성때문에 ‘아, 이놈의 죄 정말 지긋지긋하다’ 할 때가 참 많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멀쩡해 보여도 남들은 다 속여도 나는 아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목사여도 장로여도 집사여도 권사여도 죄 앞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는 이렇습니다. 작은 죄로부터 큰 죄까지 작거나 크거나 간에 인간은 자기 힘으로 죄를 완벽하게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작은 죄이건 큰 죄이건 간에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입니다. “죄 지은 자는 죽는다.” 그러니까 우린 다 죽는게 맞는 거예요. 목사님이 운전하고 가다가 갑자기 누가 끼어든다고 욕을 해도 마음속으로는 벌써 누군가를 죽이고 있는것 아닙니까. 그게 죄라고요. 그러니까 다 죽는게 맞는 거라고요. 그런데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서는 다른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뜻은 뭡니까. 100% 인간이지만 0%의 죄를 가지고 계신, 그러니까 죄가 아예 없는 유일한 인간 예수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값을 지불하게 하셔서 그 크레딧을 이용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뜻을 가지고 계셨던 겁니다. 그것이 바로 대속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신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가 하면요, 나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이 예수, “아도나이 예수 그리스도” 가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역사가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어떻게 순종하셨습니까.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속죄 제사에 어린 양을 잡아 제물로 삼듯이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속죄 제사의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되 죽도록 순종하신 것이죠.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가 건져지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는 예언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가문에서 메시아가 나와서 자신들을 나라를 잃고 고통받는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그 고통에서 정치적으로 또는 군사적으로 구원해 내실 것을 소망 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만난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이 생각한 메시아는 유대인들의 메시아와는 약간 다르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와서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줄 율법교사로서의 역활과 민족의 리더의 역활을 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보다 조금 작은 역활을 감당할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죠.

자,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합니까. 어떤 이들은 가난에서 구해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어떤 이들은 육신의 고통에서 구해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어떤 이들은 전쟁의 공포에서 구해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어떤 이들은 관계의 어려움에서 구해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일반적으로 “메시아” 라고 하면 나의 어떤 어려움과 불편함이 메시아를 통하여 해결되어질 것을 기대하게 되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모든 어려움 속에 있는 우리를 구해주시길 원하신다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9-11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버지 하나님과 다를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은 우리를 가난에서 구하시기 위하심이 아니요, 우리를 육신의 어려움에서 구하시기 위함이 아니요, 우리를 세상적인 고통에서 건지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게 중심이 아니라구요. 그게 핵심이 아니라구요.

마태복음 1장 21과 갈라디아서 1장 4절의 말씀을 함께 다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갈 1:4)

더러운 죄 속에 빠져있는 우리를, 악한 세상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우리를, 그 더럽기 짝이없는 흙탕물 같은 곳에 빠져있는 우리를 건져내셔서 구분시키시고 보혈피로 깨끗하게 싸서 죄는 더 이상 보이지도 않게 만드셔서, 그렇게 모아서 성도 (구분된 자) 라는 이름을 주시고 교회로 모여있다가 천국으로 인도 하시는 일.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구원자) 로서의 역할인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제가 이쯤 이야기하면 ‘목사님, 구절하나를 너무 확대해석 하시는 것 아닌가요.’ 하실 분이 있으실 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 구절을 자세하게 이해하고 참된 복음의 내용을 아는 것이 맞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5을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갈 1:5

이 구절은요, 바울 서신서들의 송영입니다. 맨 마지막에 할 말 다하고 쓰는 말이죠. 그 말을 지금 쓰고 있는 겁니다, 1장 5절에서요. 이게 무슨 뜻이죠. “저 할말 다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라는 말이지요. 가짜 복음에 흔들리는 사람들을 향해 참된 복음을 응축된 단어들로 설명한 바울은 핵심이 되는 구절인 4절 바로 뒤에 송영을 씀으로써 4절의 내용이 핵심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죄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한 자를 더해도 가짜 복음이요, 한 자를 빼도 거짓 복음입니다. 참된 복음을 이해하시는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