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갈라디아서 1장 1-3절 ]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갈 1:1-3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신약성경속에는 바울이 쓴 편지가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바울서신 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의 편지라는 거죠. 누구한테 편지를 쓴거죠? 바울은 이 편지를 갈라디아 교회에게,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특별 지역의 교회에 써서 보내기도 하고, 또는 그냥 개인한테 써 보내기도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얼핏 보기에는 나한테 온 편지도 아니고 남들한테 보낸 이 편지가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바울은 편지속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까요? 왜 그의 편지는 신약성경으로 남아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걸까요? 하는 이야기들을 앞으로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13권의 바울서신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몇년 몇월 몇일에 쓰여졌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까 학자들에 따라서 의견들이 나눠지곤 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언제 쓰여졌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겁니다. 다시말하면 바울서신의 기록연대를 아는 것은 꼭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만 1차 전도여행 후 갈라디아서를 시작으로 여러 서신들이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의 주장을 따라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 주장이 반드시 맞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내용상으로 보아도 갈라디아서가 시작처럼 보이기 때문에 저는 갈라디아서부터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절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갈 1:1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제일 처음 한 말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가 바울서신의 첫번째 서신이라면, 총 13개나 되는 서신서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은 아주 중요한 말이겠지요. 그렇다면 바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사도다.” 보냄을 받은자 라는 뜻의 아포스톨로스 즉, 사도입니다. 사도는 누구입니까? 바울이 말한 “나는 사도다” 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도에 대해 좀 더 정확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먼저, 사도행전에서 1장 21-26절을 통하여 사도가 되기 위한 두 가지의 조건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21-26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12명의 제자를 불러 모으셨습니다. 원래 그렇게 훌륭한 사람들만 불러 모으신게 아니긴 했어도, 대부분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잘 따라 다니며 많은 기적을 경험하며, 듣고 보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신은 그후 얼마 안되어 자살하고 말죠. 그래서 사람 하나가 비는 겁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잖아요. “우리 사람 한명 더 필요해, 유다가 빠졌잖아. 사람 한명 더 세우자. 우리와 같은 일을 할 사람을 한명 더 찾아보자” 그 과정이 사도행전에 나오고 이를 통하여 맛디아가 사도로 세워집니다.
맛디아가 사도가 된 이 장면은 사도가 되는 기준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조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보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도 봤어야 한다는 겁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들은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직접 복음 사역자로 택함을 받은 자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맛디아를 선출할 때 투표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직접 예수님을 만나고, 직접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선택된 사람, 이런 사람들이 사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처음부터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걸까요? 아니죠. 누가복음 6장 12-13절의 말씀입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눅 6:12-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제자들이 기준을 가지고 맛디아를 선택하여 사도로 세우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불러 사도로 세우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한참동안 기독교인을 박해하던 인물 바울이 갑자기 뭐라고 하면서 나타났습니까?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부르셔서 사도로 세운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불러서 기준에 맞게 사도로 세운 것도 아닌데, 한참동안 열심으로 기독교를 박해하였던 인물인 바울,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도의 기준에는 영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인 바울. 이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사도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바울을 뭐라고 부릅니까? 사도 바울이라 부르죠. 사도 베드로라는 말보다.. 사도 바울이 더 귀에 익숙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사도라는 말은 정말로 고정관념을 깨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오신 것도, 유대인의 정치적 민족적 자유가 아닌 온 인류의 영원한 자유를 위해서 메시야로 오신 것도, 사람들이 알고 있던 메시야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일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전하여진 복음도 율법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깬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예수님과 복음을 전하는 사도를, 하나님께서는 바울이라는 의외의 인물을 선택하셔고 사도로 세우심으로, 우리가 듣게될 복음이 일반적인 통념과 고정관념과 악한 다수의 확신을 넘어서는 놀랍고 특별한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고 선포한 것으로부터, 우리가 그를 통하여 전해들을 복음의 이야기들이 맹목적인 통념과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대해보게 만듭니다.
오래전 티브이 한 프로그램중에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가수들이 얼마나 노래를 잘하던지 정말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조금은 잊혀진 가수들, 조금은 덜 알려진 가수들, 하지만 노래를 아주 잘하는 명가수들을 모아서 노래 경연대회를 하는 프로그램이었잖아요. 다 그런것은 아니었지만, 놀라운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대에서 멀어져서 나는 누구인가? 내가 가수인가? 하면서 지내던 사람들이 있었죠. 그 사람들이 무대에 서고 열창을 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가수가 그 이름에 걸맞게 노래를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거죠. 그래서 그 프로 제목이 “나는 가수다” 아닙니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선포였던 것이죠.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나는 사도다.” 자신의 정체성은 사도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편지를 쓰면서 첫 마디에 내가 누구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는것입니다. 바울이 밝힌 사도라는 정체성은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신뢰하게 만드는 열쇠의 역할을 합니다. 바울이 사도라는 정체성을 믿지 못한다면 그 뒤에 나오는 말들은 하나도 믿을수 없는것이죠. 쓰나 마나한 편지가 되는거에요. 의사가 처방전을 써주는데 거기에 병원 이름도 의사 싸인도 없으면 그 처방전을 어떻게 믿습니까. 교수가 추천서를 써 줬는데 자기 이름도 싸인도 빼먹고 써주면 그 추천서를 누가 믿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싶은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없다면, 누가 우리의 말을 믿고 교회에 관심을 가져 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가수들이 열창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 보인 것과 같이, 끊임없는 복음전도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나는 크리스챤이다” 라는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크리스챤, 성도, 구분된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가수가 동네 아저씨와 똑같은 실력으로 노래한다면 “나는 가수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초신자와 같은 어린아이 수준의 믿음이었다면, 그저 안락함만 찾아 자신이 세운 교회에 안주하였다면,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당신 기독교인이었어요?” “당신이 교회를 다닌다고요?” 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전혀 구분됨이 없다면, 성도라 할수 있겠습니까. 정체성의 문제는 구분됨의 문제입니다. 가수이기 때문에 다른 것처렴, 사도이기 때문에 다른 것처럼, 크리스챤이기 때문에 달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로서의 온전한 정체성과 구분됨이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들을 신뢰할 수 있는 기초가 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여러 서신서에서 자신이 사도라고 계속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반면에 바울과 맞서는 사람들은 역시 계속해서 바울이 사도임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이 부정되는 순간, 그의 정체성이 희미해지는 순간, 복음전도를 위한 바울의 모든 노력은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바울은 사도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얻었을까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조금전에 우리는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선택이 아닌 예수님과의 만남과 선택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사람이 사도를 세우는게 아니라구요. 그런데 바울은 12명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었지요. 그렇다고 맛디아처럼 하나님의 개입으로 제자들이 제비뽑아 선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의심하는 거예요. “저 바울, 사람들이 따르니까 스스로 사도라고 하네. 저 바울, 교회세우고 다니니까 혼자 사도라고 우기는거 아냐?”.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 9장 3-5절을 통하여 바울이 어떻게 사도로서의 정체성을 얻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만납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3-5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예수님을 만난 바울이 눈이 먼 채로 다메섹으로 가서 사흘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며 기도하다가 누구를 만납니까? 제자 아나니아를 만나죠. 아나니아는 환상중에 주님의 명령을 받아 바울을 만나 안수하고 주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처음부터 기분좋게 바울을 도우려고 한게 아니었어요. 그는 이미 바울이 성도를 핍박하는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바울을 아는 성도라면 누구도 바울과 함께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판국에 어떤 사람이 바울을 사도로 세웁니까? 그러나 꺼려하는 아나니아에게 주꼐서 뭐라고 하십니까. 사도행전 9장 15절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9:15
사람이 아닌 예수님을 만나고, 주께서 선택하여 보냄을 받은 자, 사도바울. 사도바울의 정체성은 사람으로부터 나오지 않았습니다. 또한 바울이 사도가 되는 과정은 맛디아가 사도가 되는 과정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 즉 “나는 사도다” 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있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2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갈 1:2
자신이 사도임을 밝힌 바울은 이제 2절에서 수신자들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2절에 나와있는 모든 형제들은 성도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을 뜻한다는데에는 별 이견이 없이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갈라디아 교회가 어디인가에 대한 의견은 좀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프랑스 지역에 있던 켈트족의 일부인 고을족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마케도니아로 쳐들어 왔다가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소아시아 그러니까 오늘날 터키쪽으로 내려와 살았는데, 그 사람들을 갈라디안이라고 불렀습니다. 갈라디안이 사는 곳이 갈라디아죠. 그래서 이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들 특성이 좀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프랑스 사람들이 어떤 특성이 있는지 잘 모르긴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좀 변덕스럽고, 화도 쉽게 내고, 다투고 논쟁하는 걸 즐겼다고 합니다. 그 지역에 바울이 전도 여행을 통해 교회를 세운 거죠.
이 갈라디아가 북 갈라디아이냐, 남 갈라디아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눠지긴 하는데, 보통은 교회가 남 갈라디아지역에 많이 있었다고 보죠. 남 갈라디아 지역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 루스드라 등등 입니다. 이곳은 바울이 전도여행을 통해 교회를 세운 곳이죠. 그런데 그 교회가 그렇게 오래된 교회가 아니다보니까 대부분의 성도들이 초신자였던 겁니다. 그래서 좀 정리해서 이야기 해보면, 기본적으로 살짝 다열질에다 논쟁하고 따지기 좋아하고 변덕이 있는 초신자들에게 사도인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죠? 뭔가 문제가 있어서죠. 그러나 그 문제가 뭐든간에 사도 바울의 바램은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갈 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 사이에는 초신자도 있습니다. 우리들 사이에는 뭔가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예수를 부인하지 않은 이유로 나의 형제라면, 질타하고 미워하기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소망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온전한 성도의 자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