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호세아 3장 1-3절 ]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 3:1-3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남녀가 만나서 서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다는것은 보통은 참 아름답고 은혜로운 일 아닙니까. 아름답고 축복된 과정을 거쳐서 부부가 탄생되면 종전과는 전혀 다른 그런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삶의 방식이 바뀌지요, 배우자로 인해서요.
나의 삶이 2-30년간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던 배우자로 인해서 바뀐다는 겁니다. 삶이 바뀌고,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한 개인의 삶에 아마도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배우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배우자의 영향으로 개인의 역량을 뛰어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배우자의 영향으로 개인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죠. 배우자로 인해서 행복하고 기쁜 삶을 사는 사람도 있겠고 배우자로 인해서 말할 수 없는 심적인 또는 육체적 고통을 받고 사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그래서 결혼할 상대를 잘 만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좋은 대학을 가거나 좋은 직업을 갖는 것 이상으로 정말로 참 중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결혼해서는 안될 사람을 신중하게 구분해 내는 것은 낭만적이지 못하거나 계산적인 것으로 비판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 그렇다면 많은 종류의 사람 중에 정말로 절대로 결혼하면 안될사람은 누구일까요. 다 봐줘도 이런 사람은 안되..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람 피는 사람입니다. 불륜의 경계를 쉽게 넘어서는 사람입니다. 부부의 신뢰를 깨는 사람입니다. 내 아내가 바람을 피는 여자이다, 내 남편이 수시로 바람을 핀다.. 자 어떤 사람이 그 충격을 쉽게 견디어낼 수 있겠습니까. 바람을 피는 사람은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는 약속, 즉 결혼을 하면 안되는 겁니다.
배우자를 두고 바람을 핀다는 것은 그 배우자를 전인격적으로 부정하는겁니다. 그 존재의 가치를 부숴버리는거죠. 그래서 당하는 사람의 삶과 영혼은 무너져 내리는 겁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 거예요. 배우자를 두고 바람을 피는 일은 사람이 할수 있는 여러가지의 이기적인 일 중에 단연 가장 탑에 속한다고 이야기 할수 있겠죠.
그러기에 바람필 가능성이 농후한 바람둥이와 정상적인 결혼을 하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이유라면 몰라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가정을 꿈꾸며 바람둥이와 결혼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죠.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성적인 도덕성이 무디어진다고 해도 지금도 바람둥이와 일부로 결혼하려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주 경건하고 아주 신실한 목사님, 또는 혹은 훌륭한 장로님, 준수한 집사님이 일부러 바람기 가득한 윤락 여성을 찾아내서 결혼을 한다면.. 쉽게 상상이 되는 이야기 일까요? 머리속에서 그 장면이 쉽게 그려지시나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 호세아 선지자를 아십니까. 이 사람의 이름 ‘호세아’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와와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이지요. 그러니까 당연히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과 같이 “예수“, 예수님의 이름과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호세아는 그의 이름에서부터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모습으로 뚜렷이 서 있습니다.
이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였죠.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호 1:1
이 호세아 선지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이제 처음 만나자 마자 뭐라고 하셨을까요. “호세아야, 내가 너에게 아주 엄청난 일을 맏기리라”, 그러셨을까요? “너만 믿는다 한번 열심히 해보자” 이러셨을까요? 아니면 “너는 나의 일을 위해 정결함에 정결함을 더하여라” 이러셨을까요?
호세아 1장 2절의 말씀이죠.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호 1:2
아니,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떠나 음란했는데 왜 내가 음란한 여자랑 결혼을 해야 합니까. 모르면 모를까 대놓고 음란한 여자와 누가 결혼을 합니까. 조금 전에 우리가 바람피는 사람은 절대 결혼상대자로 고르면 안된다는 말씀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음란한’이라 쓰인 히브리어 ‘제누님’은 음란함이 드러나있는 여인, 매춘부, 이런 뜻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봐도 심각한 그런 여자를 아내로 삼으라고 하나님이 호세아를 만나자 마자 그렇게 명령하고 계신 겁니다. 그게 첫번째 명령이라는거죠. “아, 나 안할래, 나 진짜 안해, 선지자고 뭐고 나 안할래요. 이런 경우가 어딨어요. 진짜 말도 안됩니다. 뭐 이런 일을 시키세요“ 저 같으면 그랬을 것 같아요. 그런데 호세아가 한마디의 불평도 안하고 그 말씀을 순종합니다.
호세아 1장 3절의 말씀이죠.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호 1:3
자 여기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 뜻을 보면요 코미디 같아요. 고멜의 아버지 디블라임의 이름 뜻은 호색, 쾌락을 뜻합니다. 음란함을 좋아하고 쾌락을 즐긴다는 뜻이죠. 그리고 그 딸의 이름 고멜은 완성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양반들 이름을 합하면 호색함을 완성하다, 쾌락을 왼성하다가 되는 겁니다. 이거 얼마나 웃깁니까. 한 시대의 선지자의 아내와 장인의 이름이 쾌락을 완성하다 입니다. 정말 기도 안막히는 일입니다.
쾌락의 완성을 데려다 자녀를 낳았더니, 그 첫째 이름이 이스르엘입니다. 히브리어 이즈레엘은 하나님이 흩으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멸망시키신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딸을 낳았는데 하나님이 또 이름을 주시죠. 그 이름은 로루하마 입니다. 이 말은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자’ 라는 뜻입니다. 그 뒤에 셋째를 낳았는데 이 아이의 이름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 이름은 로암미, 즉 ‘내 백성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구절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는게 맞을까요. 신실한 성도, 호세아같이 신실한 성도도 완벽한 쾌락과 결혼 즉 연합하면 하나님이 멸망시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고, 내 백성이 아니다 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호세아도 타락해서 죄의 자녀를 낳았다가 되버립니다. 하나님께 순종한 호세아가 죄의 열매를 만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죄 짓도록 인도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올바른 해석은요, 디블라임의 딸 고멜, 쾌락의 완성, 호세아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완벽한 죄를 상징한다는 것,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상징한다는 것, 그리고 호세아가 낳은 아이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고멜이 낳은 아이들은 완전한 죄인이 훌륭한 남편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녀들을 낳았다 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 자녀들이 누구냐 하면, 완벽한 죄인이 구원자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죄성의 유전을 끊어내지 못해서 죄의 열매를 만들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입으로는 크리스챤이라고 말하면서 유전된 죄, 원래부터 갖고 있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과 그 열매를 의미한다는 겁니다. 예수를 만났음에도 죄를 끊어내지 못하는 자들의 열매는 뭡니까. 엉터리 크리스천들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멸망입니다. 더 이상 긍휼함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 라는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이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해 자녀까지 낳았는데 그 뒤로 어떻게 살았을까요. 차차 정신차리고, 애들 이름이 왜 이래.. 하면서 정숙한 아내의 모습으로 성장해 갔을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그 여자는 원래부터 음란한 여자였어요. 원래부터 근성이 바람둥이였어요. 그냥 있을리가 없지요, 애들 이름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에 흔들릴 사람이 아닙니다.
호세아 2장 5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호 2:5
여기서 그들의 어머니는 음란한 여인 고멜을 뜻합니다. 음란한 고멜은 타락한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은 오늘날 여호와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섬기는 예수를 신랑으로 맞았음에도, 세상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많은 길잃은 자녀들을 뜻하는 겁니다. 이 고멜은 무엇을 쫓아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들을 쫓아 갑니까? 왜 호세아를 버리고 바람을 핍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죠.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 때문에 라고요. 떡과 물은 잘 먹고 잘 사는것을 의미합니다. 양털과 삼은 좋은 옷과 화려함과 뽐냄을 의미합니다. 기름과 술은 즐거움과 쾌락을 의미합니다. 잘먹고 잘살려고, 좋은 옷입고 뽐낼려고, 즐거움과 쾌락을 누려 보려고 고멜이 좋은 남편 호세아를 배신하는 겁니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자신의 욕심때문에 신실한 배우자를 철저히 부정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목적으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따라갔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잘먹고 잘살고 뽐내고 신나게 놀아 볼려고 세상 것에 집착하며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왜 이렇습니까? 왜 이러는 겁니까? 어디서부터 엇나간 걸까요? 아닙니다. 원래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근본이 음란한 존재들이었어요. 원래부터 우리는 근본이 음란한 존재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그 근본은 바껴본 적이 없습니다. 음란한 고멜이 호세아를 만난게 기적이지요. 음란한 우리들이 예수님을 만난게 기적입니다.
남편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를 따라나선 고멜은 그렇다면 자신의 욕망대로 원하는 것을 얻었을까요? 세상적 부흥을 꿈꾸며 우상을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웠을까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것, 세상 욕심, 세상 기쁨을 당연한 듯이 쫓는 사람들은 그 욕망을 채울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호 2:6
하나님께서 막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십니다. 가시로 그 길을 막으시며 담을 쌓아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막으심 앞에 고멜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호 2:7
이 고멜의 모습은요 고난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소망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요, 헛된 것을 좇다가 힘이 다빠져버린 성도가 예수께 돌아가고 싶어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 버리고 예수님 등지고 우상 섬겨가면서 잘먹고 잘입고 뽐내고 재밌게 사는 사람들도 많던데요.. 가시가 어디있고 높은 담이 어디있나요. 하나님이 그렇게 항상 막으시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너무 일반화 시키시는거 아닙니까? 예수 믿다가 등진다고 다망하는 거 아니쟎아요. 교회 다니면서 세상것 좀 즐긴다고 다 어려워지는거 아니쟎아요.. 교회 다니면서 나쁜 짓 해도 쭉 잘사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자, 이 주장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징벌을 비웃으며 끝까지 음행을 멈추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버리심” 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9장 17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호 9:17
잘못을 했는데도 뉘우침이 없는 그들에게는 버리심의 징벌이 임한다는겁니다. 물론 이 구절은 많은 의미를 갖고 있는 구절이기는 한데요, 우리가 이 구절에서 버린다는 말의 의미를 집중해서 본다면요, 버리신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철저한 단절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영적인 입장에서 본다면요 완벽한 희망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잘먹고 잘살고 재미있어도 영적으로는 희망이 없다는 거죠.
여러분, 쓸모가 없어서 버렸는데 버린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 관심갖고 애쓰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니 사이다를 마시다 파리가 빠져서 그래서 버렸는데, 그 사이다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쫓아가며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더러워서 버린 사이다가 어디를 가던 무슨 상관입니까. 그래도 사이다가 먹을만 해야지 뚜껑도 꼭 닫아두고, 냉장고에도 놔두고 하는거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버리셨다면 세상에서 잘살건 못살건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에서 벗어나버리는 거죠. 파리빠진 사이다처럼 버려지는 거야요.
우리가 어쩌다 죄를 졌어요. 분명히 뭘 잘못했어요,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알아요. 그래서 하나님한테 혼날까봐 좀 걱정이 되었는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불편한 일도 없고 그러면요, 진짜 큰일난 겁니다. 못되게 굴고 하나님을 등졌는데도 잘먹고 잘사는 거요, 그거 좋은일 아닙니다. 부러워할 일도 이상하게 생각할 일도 아닙니다. 그건 진짜로 큰일 난 겁니다. 그건 완전히 버려졌다는 신호입니다. 듣지 아니하는 자는 버려지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많은 징계가운데서 버려짐은 가장 큰 징계가 아니겠습니까.
자 그런데 이제, “그래도 우리 남편이 좋았어. 호세아가 참 좋은 남편이었어.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진 고멜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버려졌을까요, 아니면 남편에게 돌아가 회개하고 잘 살았을까요? 돌아가는 일은 그러나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멜은 자신의 힘으로 남편에게 돌아갈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호세아 3장 1-3 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 3:1-3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은 그 당시 노예 한명의 몸값이었습니다. 잘먹고 잘살고 뽐내고 신나게 즐기려 나간 고멜은 자유를 잃고 노예가 되었다는 거죠. 우리가 잘먹고 잘살고 뽐내고 신나게 즐기고 싶어서 세상을 쫓아가고 우상을 섬기다 보면요, 어느 순간 나도모르게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겁니다. 돈의 노예, 쾌락의 노예, 헛된 것들의 노예가 됩니다. 노예가 된 고멜을 위하여 호세아가 비싼 값을 치르고 원래 자신의 아내였던 사람을 사온 것 처럼, 죄의 노예가 된 우리를 위해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는 우리를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우리의 자유를 위한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예수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핏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사신 예수님이 이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호세아 3:3
원래부터 음란했던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고 끝없는 정욕과 이기심으로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음란한 아내를 다시 돈주고 사와야 했던 호세아의 인생과 그 아픔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호세아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음란함 앞에 고통스러워 하실 하나님의 아픔을 이해하시는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가득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