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다니엘 9장 3절 ]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단 9:3

선지서에 나오는 많은 환상들과 예언의 글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애를 써가며 해석해 보려고 노력을 했는데도 그 전체의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이러한 난해함 자체가 하나님께서 디자인해 놓으신 성경의 본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해요. 수학 공식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답이 하나밖에 없다면 두껍긴 하지만 그래도 한권에 불과한 이 성경속에 그렇게 광대하신, 그렇게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낼수 있었을까요.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죠. 그러기에 하나 하나의 단어에도 다양한 의미를 가진 성경을 읽고 원어의 뜻을 따라 공부하다 보면 하나님의 모습이 한면만 보이는 평면의 모습에서 입체적으로 보이는, 앞과 옆과 뒤가 한꺼번에 보이는 그런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이러한 노력과 시간을 들이기에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를 않습니다. 누가 특별하게 믿음이 없어서 그런게 아니죠. 아이들도 돌보아 주셔야죠, 출근해서 일도 하셔야죠, 집안 청소도 해야죠, 밥도 해야죠, 친구도 만나야죠. 그 바쁜 와중에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건 그만두고 그냥 하루에 성경 한장을 읽기도 벅찰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다행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섬기는 여러 직분 중에 어떤 이들에게는 말씀을 전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말씀의 직분을 받은 자가 자신이 맡은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읽고 묵상하고 남들은 2천년동안 이 내용을 뭐라고 했나 잘 살펴보고 어떤 오해를 할 가능성이 있나 조심스럽게 다듬어서 그렇게 잘 준비해서 듣는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나눈다면, 너무 바쁘고 사느라 힘들고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기 어려운 많은 성도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먹지 못해 영적 영양실조에 걸린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 먹게 되는 겁니다. 예배시간에 말이지요.

예배를 드리는 이 순간에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 먹는 잔치가 열린다는 거예요. 예배 속에 포함되있는 설교는 참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제가 참 좋아하는 설교의 의미는 나눔의 의미입니다. 아주 오래전에는 예배시간에 드려진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면, 오늘날에는 이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 먹는 거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의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는 귀한 시간으로 잘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은 누구입니까. 우리 성도님들 중에도 다니엘이 있으시죠. 다니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다니엘이 활동한 시간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 당하고 포로로 끌려온 시기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러명의 선지자를 보내시고 경고하시고 타이르셨지만, 자신들의 죄성을 이기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에 찌들고 우상에 푹 빠져서 결국 하나님의 심판, 멸망의 심판, 포로됨의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까. 나라가 망했어요. 그때 나온 선지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선지자가 다니엘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다니엘이 성경에 혼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누가 있죠? 다니엘의 친구들이 있었죠. 다니엘의 친구들은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다’ 라는 이름을 가진 다니엘과 함께 성경에 등장하여 놀라운 기적의 주인공이 된 이들의 이름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하나님과 같은 분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도우신다’ 는 뜻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셨지만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으시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심판받아 고통받는 이 백성을 도우신다는 거죠. 그렇다면 다니엘과 함께한 이 친구들이 겪었던 기적은 무엇입니까.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모든 사람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려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단 3:10-12

여기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주어진 바벨론식 이름입니다. 결국 다니엘의 친구들은 이 일로 인해 어떻게 되지요? 그 당시 왕이었던 느브갓네살 왕이 진노하여서 이들을 끌어다가 협박을 하게 됩니다. ‘너희들, 악기소리 들릴 때 또 다시 금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내가 너희들 싹다 맹렬한 풀무불에 던져 넣을 거야’. 이 협박 앞에서 다니엘의 친구들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7-18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하나님과 같은 분은 또 없으셔서,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도우심으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도 우리를 건져 내실것 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믿음이었죠. 그런데 그들의 믿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과 시련앞에서 실족하고 믿음을 잃습니까.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이 명제, 즉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세상이 이렇게 악할리가 없어”.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저 못된 이가 저렇게 잘될리 없어. 그럴리 없어.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는 거야.” 논리적이어 보이는 명제 앞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넘어지는 것 아닙니까.

얼핏보기에 다니엘의 세 친구도 비슷한 믿음을 가진 것 같죠. 하나님이 계시다면 건져내시리라. 여기까지만 말한다면 다니엘의 친구들도 어려움 앞에서 실족하는 성도들의 믿음과 다를 것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금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내게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대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돕지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배신하지 아니하리라.”

이처럼 성숙한 믿음을 가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풀무불에 타 죽었을까요? 성경에서 불은 보통 심판을 상징하지 않습니까.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만들어 놓은 풀무불은 완벽한 심판을 상징하겠죠. 그리고 그 완벽한 불의 심판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지펴 놓은 불입니다. 죄로 인한 완벽한 심판을 상징하는 그 불 속에서 다니엘의 친구들은 타 죽기는 커녕 그을리지도 않습니다.

죄로 인한 심판 가운데에서도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들에 대해서, 자비로우시며 다른 신과 같지 않으시며 믿는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성도를 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멈추지 않으신다는 상징적인 장면이 기적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때에 선택받은 백성인 성도는 다니엘의 친구들이 불속에서 신의 아들, 성자 하나님과 거닐은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의 길로 걸어 나갈 것을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다니엘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찍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해 내며 고위 관직에 올랐던 다니엘은 4명의 왕이 바뀌고 심지어 나라가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높은 지위와 명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가 된 상황속에서 다니엘이 변함없이 그 지위를 유지함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을 잘 믿으면 세상적으로 출세한다.. 이런 뜻일까요? 그럴리가 없겠죠. 세상적인 출세로 친다면 다니엘 위에 왕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 출세하기로 따지면 국무총리보다 대통령이 더 높은 것 아닙니까. 다니엘이 하나님의 힘으로 출세를 했다는 데에만 집중한다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던 느부갓네살왕의 성공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까요. 속된말로 하나님 빽이 우상 빽 만도 못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다니엘의 인생을 개인적인 성공으로 연결시켜 이해하려는 시도를 조심해야 합니다. 다니엘처럼 하나님 잘 믿었더니 성공했다, 부자됐다라는 이해는 아주 위험한 이해가 되는 거지요. 그보다는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포로가 된 암울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다니엘의 존귀함은 손상되지 않았다. 왕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고 세상이 뒤집어 진다 해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성도들의 그 존귀함은, 그 구분됨은, 그 새 생명의 존귀함은 손상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존귀함을 잃지 않았던 다니엘의 믿음을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다니엘 6장을 보면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죽임을 당하고 새로 나라를 차지한 메대사람 다리오 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었는데도 다니엘의 위치와 지위는 확고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니엘을 시기하는 자들이 다리오 왕을 속여 다니엘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나라의 모든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법률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나이다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그런즉 왕이여 원하건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단 6:7-8

숨어있는 계략을 알리 없었던 다리오 왕은 마치 왕권강화를 위한 좋은 금령처럼 보이는 이 일을 허락합니다. 이제 누구든지 왕이 아닌 신이건 사람이건 누구에게라도 간구하는 날에는, 누구에게라도 기도하는 날에는 죽는 겁니다. 다니엘도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했죠? 다니엘 6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단 6:10

우리 성경에 수없이 나오는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히브리 말로 ‘터, 기초‘ 를 뜻하는 예루라는 말과 평화라는 뜻을 가진 ‘샬롬’ 이 합쳐져서 예루살렘이 되었죠. 그러니까 평화의 터, 평화의 마을이라는 말이 예루살렘의 뜻입니다. 이곳에 이제 하나님의 성전이 자리를 잡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셔서 머무시는 성스로운 장소로 삼으신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평화의 마을인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를 하는데, 그냥 하는게 아니라 감사함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니, 지금 기도하면 죽는데! 방안 깊숙히 숨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남들에게 잘 보이는 이층으로 올라가서, 게다가 창문을 열어놓고 목숨 걸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이 감사라는 겁니다. ‘나, 살려주세요. 나, 잘 되게 해주세요. 나, 흥하게 해주세요’ 하는 내용을 가지고 목숨걸고 기도하는게 아니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는 내용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기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이상해 보이는 다니엘의 이 기도는 그러나 지극히 올바른 성도의 기도인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기도할 것을 권면하는 바울 서신의 구절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영어성경을 보면,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을 부수는 온전한 기도와 감사함이 분리될 수가 없다는거죠. 이처럼 다니엘이 아주 온전한 기도를 목숨을 걸고 드리고 있는겁니다. 다니엘은 참된 기도의 방법을 알고 있었던 믿음의 사람이었던 거죠. 성도에게 있어서 기도는 이처럼 목숨을 걸만큼 소중한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이 일로 다니엘은 결국 사자굴로 들어가죠. 그러나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처럼 다니엘은 그날 밤 사자굴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음날 그를 죽이려고 계략을 세웠던 사람들이 사자굴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까. 믿음 안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기도한 다니엘은 그 존귀함을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자, 그러던 어느날 이제 다니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연구하다 하나님이 전해주신 말씀의 뜻을 깨닳습니다.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단 9:2

세상 최고의 위치에서 그저 누리며 한가롭게 지내도 될 듯한 그 시간에 다니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해했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며 왕들의 꿈을 해석했던 다니엘이 기록된 말씀을 보며 하나님의 뜻을 깨닳았다는 것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가에 대한 좋은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뜻, 기록된 말씀을 통해 깨달은 다니엘은 무엇을 합니까.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

단 9:3-4

위기앞에서 목숨을 걸고 기도했던 다니엘은 유대인의 포로생활이 70년이면 끝난다는 예언을 보고, 이미 하시기로 약속된 그 말씀을 위해 또 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기서 그의 기도는 ‘테필라‘, 그러니까 중보기도를 뜻합니다.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온 유대백성을 위하여 다니엘이 금식하고 재를 뒤집어 쓰고 열심을 다해 쉬지않고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는 겁니다.

먼저, 그의 기도는 회개를 담았습니다. 죄에 대한 인정과 심판받아 마땅한 이스라엘 백성의 악함을 고백하며 주 앞에 철저하게 회개합니다. ‘아, 나는 안그랬어요. 내가 그런게 아니예요.’ 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죄를 저지른 것처럼 가슴을 찢으며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는 간구합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혹시라도 하나님의 약속된 기한이 지체되기라도 할까봐 애를 써가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이것이 참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믿음의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하는 다니엘 앞에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납니다. 그 가브리엘이 다니엘을 뭐라고 부르냐 하면요,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다니엘 9:23). 이 말의 원뜻을 보면, “넌 참 귀중한 자다, 넌 참 존귀한 자다, 넌 참 사랑스러운 자다”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기도와 감사로 하나님을 찾는 다니엘. 민족을 위해 대신 회개하며 간절히 중보 기도하는 다니엘. 그 다니엘은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는 소중한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시 145: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기도했던 다니엘은 가브리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죽으심과 예수의 다시 오심과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다’ 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다니엘은 패역한 이스라엘의 심판과 그 회복에 대한 약속을 넘어, 온 인류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의 등장과 온 인류의 심판자 되시는 예수님의 재림을 증거하는 삶을 기도의 삶 속에서 구현해 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니엘과 같이 기도하는 믿음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속에 지극히 사랑받는 자로 우뚝 서시는 큰 은혜가 여러분들 삶 속에 가득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