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이인엽 목사

[ 에스겔 3장 14-17절 ]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 가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두려워 떨며 칠 일을 지내니라

칠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겔 3:14-17

일부러 아무것도 안 하려고 안하는게 아니라 뭘 할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은 우리의 삶 속에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가령, 배가 고파서 식당에 갔는데 손님이 많아서 주문한 음식이 빨리 안나오는 경우. 마음은 급한데 비행기가 기상때문에 연착되는 경우. 월드컵 경기를 보며 4강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상태팀이 너무 강한 경우. 내 능력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이런 일들은 우리의 삶속에 수도 없이 일어난다는 말씀이죠.

이럴 때 사람은 참 무기력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분노로 이어지지요. 화를 내봤자 음식이 빨리 나올 수 없다는걸 알면서도 화를 내고, 따져봤자 소용이 없다는걸 알면서도 항공사 직원들에게 왜 연착됬냐고 성질을 부리고, TV 앞에서 소리질러봤자 막상 경기장에서는 들리지도 않을텐데 한번도 만나본적도 없는 선수 이름을 부르며 독설을 날리지 않습니까.

이처럼 무기력감이 분노를 일으키는 상황,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보이기에 더 화가나고 더 속상한 상황, 그 상황속에 에스겔이 서 있습니다. 이미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버린 에스겔, 이미 망하기 시작한 유다, 어떻게 손 써보기엔 너무 늦은 것 같은 상황,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상황속에서 에스겔은 얼마나 무기력하고 힘든 마음이었을까요. 그 무기력감은 또 에스겔을 얼마나 분노하게 만들었을까요.

에스겔은 바벨론 왕국이 유다를 쳐서 유다역사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왕인 여호야긴 왕과 함께 많은 사람들을 잡아갈때, 그러니까 첫번째 바벨론 포로로 유다 사람들이 잡혀갈때 잡혀간 인물입니다. 이처럼 포로로 바벨론에 잡혀간 에스겔이 도대체 뭘 할 수 있었을까요. 같은 포로라도 다니엘과는 전혀 상황이 달랐을 에스겔. 다니엘은 포로였어도 왕궁에서 지내지 않았겠습니까.

왕이 또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

단 2:49

똑같이 하나님의 선지자였지만, 그러나 에스겔의 처지는 다니엘과는 너무 많이 차이가 났죠. 똑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해도 그들의 사역의 모습은 서로 많이 달랐습니다.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제사장으로 대우받는 건 꿈도 꾸지 못했을 에스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동족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상황속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부르십니다.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겔 1:1-3

포로로 잡혀온 마당에 온전한 제사장직을 감당할 수도 없고, 보통 30살에 시작한다는 제사장직을 위한 아무런 이벤트도 기대할 수 없는상황, 어쩌면 남들은 에스겔이 제사장이든 말든 상관도 없는 그 상황속에서 에스겔은 “제사장 나 에스겔”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제사장의 의복을 갖춰 입을수도, 제대로 여호와의 전에서 제사를 지낼수도 없는 정말 말도 안되는 한심한 상황속에서도 에스겔은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 나 에스겔”.

여러분, 여러분은 “제사장” 하면 오늘날 누구와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분명히 아니라고 들은 것 같기는 한데도, 예수님이 오신 후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하는데도.. 그런데도 불구하고 목사님들이 제사장 같아 보이지 않나요. 목사가 제사장입니까? 그렇죠, 맞습니다. 목사는 제사장 맞습니다. 하지만 “목사만 제사장이다” 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베드로 전서의 말씀을 함께 좀 읽어보기를 원합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 2:5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여기서 “너희”는 선택된 성도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믿음을 얻은 성도들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목사뿐만 아니라, 목사만 제사장인게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의 아름다운 구원의 사랑을 선포하는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성도님들이 자신이 제사장인줄을 몰라요. 그냥 목사님들만 제사장인줄 알아요. 혹은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 인정이 안되요. “나, 제사장 홍길동” 이래야 되는데 그 마음이 없다는 거죠.

자신의 정체성도 모르는데, 제사장직을 감당할 수는 있겠습니까. 성도가 자신의 정체성도 모른다면 하나님의 일을 할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목사만의 일이 아니라, “나, 제사장 OOO” 의 일이기도 하다는 자각이 성도에게 있다면 온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강력하게 선포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온전한 제사장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에스겔은 놀라운 광경들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에 나와있는데로 이 광경 즉 에스겔이 본 관경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을 본 적이 있는데요, 정말 놀랍더라구요. 물론 에스겔이 실제로 본 광경과는 많이 틀리겠지요. 하여간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을 눈으로 보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엄청난 광경을 에스겔은 보게된 겁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이었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본 에스겔은 어떻게 합니까. 그 영광 앞에 엎드려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눈으로 보고 이제 귀로 듣는 거지요.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겔 2:3-7

이게 무슨 말씀이냐 하면요, ‘이스라엘 백성들, 아주 뻔뻔한 배신자들이야.. 에스겔, 네가 하는 말 잘 안들을거야. 하지만 듣든지 말든지 신경쓰지 말고, 네가 만들어서 네 생각과 네 말을 전하지 말고, 나 여호와 나의 말을 곧이 곧대로 전하거라’.

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는 도대체 어땠길래 이런 말씀이 나올까요? 에스겔 16장은 이스라엘 백성, 유다 백성의 영적인 상징도시 예루살렘을 방자한 음녀로 표현하면서 이 백성들의 타락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아무도 너를 돌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불쌍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졌느니라

겔 16:4-5

버려진 아이, 피투성이로 더러운 채로 버려진 고아와 같은 아이, 아무도 돌보지 않는 불쌍한 고아와 같은 이스라엘. 이처럼 누구도 관심갖지 않는 이스라엘을 여호와 하나님이 돌보기 시작하십니다. 버려진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씻기시고 입히시고 보살피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이스라엘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자라나고 아름답게 자라난 이 여인을 더욱 좋은 옷으로 꾸미고 기름을 바르고 화려한 금 은으로 장식하고 화려한 왕관을 씌워 줍니다. 좋은 음식을 먹여 더욱 곱게 가꾸시고 왕후의 자리에 올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초라하다 못해 더럽고 불결하기까지 했던 이스라엘을 아름다운 여인으로 가꾸어 주시고 게다가 왕후, 왕의 신부로 삼아 주셨다는 거지요. 아무런 이유 없는 선택과 은혜를 버려진 어린 아기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왕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신부로 행복하게 감사하며 살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되는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처음 상태는 어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물론 나면서부터 모태신앙을 가지신 분들도 있으시지만 그러나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모태신앙이라고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분을 만나기 전 우리의 영적 상태는 버려진 초라하고 더러운 고아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요. 누가 우리의 영혼을 돌볼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예수를 믿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돌보고 양육하셔서 주님의 아름다운 신부로 모든 성도를 세우셨습니다. 이제 성도는 감사하며 기쁘게 지내기만 하면 되는거죠. 그러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어땠습니까?

자신의 피투성이 되었던 과거, 초라하고 더럽게 버려졌던 과거는 기억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꾸며주신 아름다움을 가지고 음란을 저지릅니다. 우상숭배와 함께 갖은 악을 부리는 거죠.

..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겔 16:15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인을 부르는 다양한 언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자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직업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더럽고, 가장 추하고 가장 미천한 호칭이 하나 있죠. 매춘부, 창녀, 창기. 아무리 화가 나서 욕을 한다 하더라도 함부로 쓸 수조차 없는 단어. 모든 여자중에서 가장 밑바닥인 여자. 매춘부, 창녀, 창기 아닙니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 값을 싫어하니 창기 같지도 아니하도다

그 남편 대신에 다른 남자들과 내통하여 간음하는 아내로다

사람들은 모든 창기에게 선물을 주거늘 오직 너는 네 모든 정든 자에게 선물을 주며 값을 주어서 사방에서 와서 너와 행음하게 하니

겔 16:31-33

아니 보통 창기들은 돈을 받던지 선물을 받던지 댓가를 받고 음행을 저지르는데, 음란하기 짝이 없는 이 이스라엘 백성은 꺼꾸로 돈을 내고, 선물을 남자들에게 줘가며 행음하고 있으니, 그 음란함과 그 미천함과 그 악함이 창기보다도 아래에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악행에 대한 말씀을 비유로 드신 말씀인거죠.

형편없는 아기를 데려다 가장 귀하게 보살피며 아내로 세웠으나, 창기의 수준보다 더 낮은, 맨 밑바닥보다 더 낮은 음행을 저지른 이스라엘. 그들의 타락한 영적상태. 망하는 것이 너무나 지당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타락한 이들이 듣든지 말든지 선포하라고 지금 에스겔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에스겔은 포로된 자로서 무기력감에서 오는 분노가 아닌, 패역한 이스라엘로 인한 하나님의 분노, 그 분노를 똑같이 느끼며 여호와의 권능에 이끌려 나갑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공감하는 마음으로 따라나서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겔 3:17

다 끝난 것 같은데, 이스라엘을 깨우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이어가시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악인이 있는데 악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하지 않아서 그 악인이 죄로 인해 죽으면 그건 네 잘못이다. 악인은 어차피 죽겠지만 말하지 않는 너에게도 책임을 물을것이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했는데도 그 악인이 자기 죄로 죽으면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할 것이다.’

또한 ‘여기 의인이 있는데 그 의인이 착하게 살다 악을 저지르면 그동안 착하게 산 것과 상관없이 그 죄 때문에 죽을텐데, 네가 그걸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리지 않으면 너도 죽을거다. 하지만 의인이 착하게 살다가 죄를 저지르려고 할 때, 네가 그걸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리면 의인과 같이 너도 살거다.’

파수꾼은 경고를 해야 하는 거잖아요. 악인이든 의인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지만, 어찌됬건 파수꾼인 에스겔은 경고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거죠. 사람들에게 알려야하는 책임이 있다는 거죠. 조금전에 제가 성도는 뭐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제사장이라고 그랬죠. 제사장이라면 세상을 향해서 그건 틀렸다고,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라고 선포해야 된다는 거죠. 그 책임이 있다는 거예요.

자, 이제 에스겔은 얼마나 비장했겠습니까. 그래 내가 이제 이 패역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리라.. 그런데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어떻게 하신 줄 아십니까?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겔 3:26

파수꾼이 되라! 내 말을 전해라! 안그러면 너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근데 그러시고는 바로 말을 못하게 만드셨어요. 왜 그러셨을까요. 여러 성경학자들은 이스라엘이 패역한 백성이어서 말을 해도 이제 소용없다는 의미로 이 구절을 이해합니다. 그런 해석이 맞을수 도 있겠지요. 패역한 이스라엘이 기회를 잃었다는 메세지를 이 구절이 전하는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에스겔 4-5장에 나오는 성경 내용, 즉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마치 퍼포먼스를 하듯이 하나님의 메세지를 온 몸으로 전하는 내용들은 에스겔을 벙어리로 만드신 이 구절의 해석을 조금은 다르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듭니다.

4장과 5장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토판을 만들어 예루살렘을 그리고 공격받는 예루살렘을 표현하라고도 하시고, 왼쪽으로 누워 390일, 오른쪽으로 누워 40일간 있으라고도 하시고, 인분에다, 그게 정 안되겠으면 소똥에다 떡을 구워 먹으라고도 하시고, 머리털과 수염을 깍아 삼분의 일은 불사르고 삼분의 일은 칼로치고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으라고도 하시는 등, 다양하게 행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혀를 입천장에 붙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의 패역함 때문입니다. 세상이 너무 악하면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듣지 않습니다. 오늘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아서 이토록 악하고 타락해져만 갑니까. 유튜브에, 온라인 상에, 수없이 많은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열심히 선포되고 있어요. 그런데 패역한 세상은 그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난 할 만큼 했어.. 선포했는데 안들으면 자기들 잘못이라고 했어..’ 이러고 말면 되겠습니까. 아니죠, 그럴리가 없죠.

에스겔이 행동으로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한 것처럼, 오늘을 사는 성도 모두가, 제사장인 우리 모두가, 파수꾼으로 부름받은 우리가 행동함으로 삶으로 살아 냄으로서,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로 하나님을 전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더욱 어렵고 고단한 일이긴 하겠지만, 더 이상 참된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는 세상을 향하여 성도된 우리가, 제사장된 우리가, 파수꾼된 우리가 믿음으로 행동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전하며 나갈 때에 마른 뼈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은혜를 함께 누리지 않겠습니까.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선지자로서의 삶을 성실히 살아낸 에스겔과 같이 구원사역에 동참하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