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열왕기하 22장 1-2절 ]

요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디다요 보스갓 아다야의 딸이더라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왕하 22:1-2

운동경기들은 다양한 룰을 가지고 있죠. 운동 경기중에서 축구, 농구 같은 경기를 보면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점수차가 너무 많이 나는데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어보이고 아직도 경기 종료까지 시간이 남아있다면, 질 것이 틀림없는데 계속 뛰어야 한다면, 선수는 얼마나 힘들까요. 나라간의 전쟁은 어떻습니까. 숫적으로나 힘으로나 감당이 안되는 나라가 쳐들어와서 다 빼앗기고 궁지에 몰렸을때, 지는게 틀림없을때, 망하는게 틀림 없을때, 마음을 담대히 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질 게 뻔한데, 망할 게 뻔한데,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의 일을 감당해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참 놀랍지 않습니까. 참 존경스럽지 않나요. 침몰하는 것 같은 나라에서, 꺼져가는 듯한 나라에서 끝까지 자신의 할 바를 다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해 저는 충분히 공감을 합니다. 망할걸 알면서, 어려울걸 알면서, 위험하고 힘든 걸 알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 이거 정말 쉬운일이 아닌 겁니다.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요시야왕이 바로 이런 삶, 보기에 따라서는 무모해 보이는 삶을 산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왕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면서 그들의 삶속에 녹아있는 많은 하나님의 메세지를 소개하고 있죠. 그중에 요시야 왕이 살았던 시대의 유다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우리의 구한말하고 비슷했어요. 한국이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길때 처럼 주변 환경이 급변을 하는 겁니다. 유다를 가운데 두고 강대국과 강대국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요시야 왕은 꿋꿋이 믿음을 지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긴 왕이었습니다.

먹고 살만하고 좋은 시절에도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 다른 왕들과 달리, 요시야는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도 멸망해가는 유다의 왕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온 유다의 신앙을 바로잡아 갔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망해 버렸고, 맹위를 떨치던 앗수르는 힘이 조끔 빠지는 상황이었고, 바벨론은 신흥강자로 일어나고 있었고, 남쪽에 있는 애굽은 이틈을 타서 팔레스타인지역을 차지하려는 강대국의 대립속에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가 유다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요시야 왕이 유다의 신앙을 묵묵히 개혁해 나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요시야 왕은 도대체 누구의 아들이었길래 이렇게 훌륭한 삶을 살아냈을까요? 그러나 요시아 왕은 누구의 아들이어서 이렇게 훌륭한 삶을 살아낸게 아닙니다.
참 좋은 사람 히스기야를 이어 왕이 된 므낫세, 그는 요시야 왕의 할아버지죠. 어쩌면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이 왕이 되었는지 말할 수 없는 악을 저지릅니다. 므낫세가 저지른 악함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3장 5-6절의 말씀입니다.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그의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으며

대하 33:5-6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에다 이 므낫세 왕이 일월성신 우상을 섬기는 제단을 떡하니 만들었다는 겁니다. 또 므낫세 왕이 우상인 몰렉을 섬기기 위해 아이들을 제물로 바쳤다는 겁니다. 악하기 짝이 없죠. 물론 므낫세가 이런 죄로 인해 고난을 받은 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좋은 왕이라고 보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게다가 므낫세 이후 왕위에 오른 것은 아몬, 요시야 왕의 아버지죠. 이 사람은 겁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다 반역자들의 손에 왕위에 오른지 이년만에 살해를 당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요시야 입니다. 그러니 뭐 훌륭한 아버지 할아버지 밑에 자라서 거저 요시야가 훌륭한 왕이 된게 아니라는 말이죠.

8살에 왕이 된 요시야는 죄 가운데 행한 할아버지 므낫세의 길로도, 죄 짓다가 요절한 아버지 아몬의 길로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부모의 죄, 가문이 이어온 죄를 이어가는 사람과 끊어내는 사람들로 나뉘죠. 보통은 이어가기 쉽상입니다. 나쁜 습관, 나쁜 행동들은 쉽게 따라하게 됩니다. 보고 자란 대로 하는거죠. 그러나 요시야는 철저하게 그 죄를 끊어 냅니다.

이제 젊다기 보다는 아직 어린 16살의 요시야 왕, 지금으로 말하면 한참 놀기 바쁠 십대, 틴에이저인 그는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리고는 스무살에는 종교 개혁을 시작하죠. 그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어렸을 때 곧 왕위에 있은 지 팔 년에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고 제십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하게 하여 그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거하여 버리매
무리가 왕 앞에서 바알의 제단들을 헐었으며 왕이 또 그 제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을 찍고 또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제사장들의 뼈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였으며
또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시므온과 납달리까지 사면 황폐한 성읍들에도 그렇게 행하여

대하 34:3-6

이 구절에서 말하는 제사장들은 당연히 우상숭배하는 제사장들을 말하는 겁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부관참시라는 형벌이 있었죠. 이게 뭐냐면요, 이미 죽은 사람의 관을 땅에서 꺼내 부수고 뼈만 남은 사람의 목을 친다는 겁니다. 아주 치욕적인 형벌이지요. 우상숭배를 주도하던 제사장들을 죽이는 것을 넘어서서 그들의 뼈를 태웠다는것은 우상숭배자들에게 철저히 치욕을 주는 강력한 종교개혁의 의지를 보여주는 행동인 겁니다. 요시야가 아주 뜨겁고 강력하게 온갖 더러운 것들을 치워 나간겁니다. 더러운 우상을 빻아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에 뿌리고, 우상을 숭배하던 제사장의 뼈를 심판을 상징하는 불로 태워버리고, 더러워진 성전을 깨끗이 하고, 무너지고 망가진 성전을 보수하고.. 자 지금 요시야 왕이 하는 이 개혁의 노력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뭐라고 얘기할수 있을까요.

아, 회개구나. 더러워진 것을 없애버리고 무너진 성전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세우는 일, 이것이 회개 아닙니까.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 3:16-17

하나님의 성전인 나를 깨끗이 하는 일, 더러운 것들을 빻아 없애고 태워 없애는 일, 무너진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올곧게 믿음으로 다시 세우는 일.

회개 입니다.
요시야가 그 일을 했습니다. 먼저 16살의 나이에 하나님을 찾았죠. 20살의 나이에 더러운 것을 없애며 회개하였어요. 그러니까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요시야가 왕위에 있은 지 열여덟째 해에 그 땅과 성전을 정결하게 하기를 마치고 ..

대하 34:8

이제 다 했어요.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율법책을 찾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성경책을 찾았다는 겁니다. 얼마나 극심하게 우상만을 찾았으면, 얼마나 극심하게 하나님을 등졌으면, 얼마나 남아 있는 율법책이 하나도 없었으면, 요시야가 이때 이 율법책을 처음으로 읽습니다. 처음으로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꼭꼭 숨겨져 있던 시대였다는 말씀입니다.

요시야 왕의 아버지의 시대에도, 요시야 왕의 할아버지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드러나 있지 않았다는 거죠. 우상을 섬기느라 율법책을 없애는 시대였다는 거야요. ‘아, 옛날에 참 그랬구나.. 아니, 하나님의 나라 유다에서 왠일이야.. 어째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러나 아닙니다, 여러분. 이건 그냥 옛날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오늘도 똑같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죠. 이 성경책이 얼마나 흔합니까. 또 이 성경을 기초로 하는 목사님들의 말씀은 얼마나 흔합니까. 그러나 더러움에 찌든 사람들은, 회개하지 못한 영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도 알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비유로 씨뿌리는 자의 말씀을 전하시니까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묻지 않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누가복음 8장 10절의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눅 8:10

성경말씀의 한글자도 성전인 자신을 정결케 하지 못한 자에게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못한 자에게는, 그저 글씨요 그저 소음일 뿐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더러운 영혼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숨겨져 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인정하고, 성령님이 임재하지 않으시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방법이 없습니다. 더러운 것, 세상 것을 잔뜩 움켜쥐고서 어떻게 예수를 영접합니까.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수 있습니까. 그 상태로 성경을 읽으면 들어갑니까. 백독을 하면 뭐하고 천독을 하면 뭐합니까. 이해가 안되는데..


이미 하나님을 찾으며 온갖 더러운 우상을 없애며 성전을 보수하고 정결케 하며 종교개혁에 최선을 다하던 요시야 왕이 모세가 전한 율법의 말씀을 듣자 자기 옷을 찢으며 고통스러워 합니다. 율법 말씀을 이해한거죠. 유다의 죄가 선명하게 보이는 겁니다. 조상들이 저지른 죄가 뚜렷하게 보이는 거예요. 말씀을 지키지 않은 죄가 확실하게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따른 하나님의 진노가 보이는 겁니다. 거기에 따른 유다의 멸망이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요, 모든것이 명확해 집니다. 이게 맞나? 저게 맞나? 하던것들이 이제 선명해져요. 무엇이 죄 인가에 대해 선명해집니다. 그러니 내가 과거에 저지른 죄가 보이지 않겠어요. 그러니 내가 지금 짓고 있는 죄가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과 그 징벌의 정당함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죄에 찌든 인간이 죄의 삯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도 정당한 너무나도 공의로운 일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율법책의 내용을 안 요시야 왕은 그러나 아직 확인이 필요했어요. 정말 망하는 걸까. 정말 끝난건가. 정말 침몰하는 건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이런 생각 아니었을까요. 제발 아니라고 해줘.. 하는 그런 마음 아니었을까요.

왕은 힐기야와 사람들을 여선지자인 훌다에게 보냅니다. 자신이 찾은 책의 말씀에 대해 여호와께 묻기를 청합니다. ‘하나님, 진짜 끝인가요?’ 여선지자인 훌다를 통하여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랬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 앞에서 읽은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하리니
이는 이 백성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그의 손의 모든 행위로 나의 노여움을 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노여움을 이 곳에 쏟으매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대하 34:24-25

유다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죄의 값인 사망과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입니다. 죄를 지은 유다는 망하는게 맞습니다. 자, 그렇다면 죄를 타고난 우리는 어떻습니까. 살면서 수시로 알고 죄 짓고, 모르고 죄 짓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망하는게 맞습니다. 죽는게 맞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서 끝났으면 요시야 왕에게도 우리에게도 아무런 희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훌다는 계속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요.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

대하 34:27-28

자, 이 말을 들은 요시야가 어떻게 합니까. ‘너희들은 죄 졌어. 유다는 망할거야’ 라는 말과 ‘네가 회개하는 것을 보았다. 네가 평안히 묘실로 들어갈 것이다’ 라는 말을 동시에 들은 겁니다. 죄에 따른 징벌과 회개에 따른 구원을 동시에 들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디에 집중하겠습니까. 징벌에 집중하실 겁니까? 구원에 집중하실 겁니까? 요시야 왕은 어떻게 했을까요?

구원에 집중했어요. 요시야 왕은 죽음과 멸망에 집중하지 않고 평안과 구원에 집중했습니다. 멸망이 예견된 그 순간에 구원에 집중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의 구원에 멈추지 않고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람들을 모았어요. 그리고 자신이 보고 들은 그 책을 사람들에게 읽어줬습니다. 마치 구원 받은 성도가 그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는것 처럼, 요시야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과 나누었습니다. 그러고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언약을 갱신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율법책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며 따라 갔습니다. 변화가 일어난거죠. 요시야가 살아있는 날에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복종하고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회개하고 말씀을 받은 자가 구원이신 예수님을 기뻐하는 것과 같이, 그날 예루살렘에서는 기쁨의 잔치가 열렸습니다. 아주 성대하게 유월절 구원을 기뻐하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유다는 어떻게 됐을까요. 기사회생 했습니까? 거의 죽을뻔 하다 다시 살아납니까? 그럴리가 없습니다. 예언처럼 그냥 기울어 지죠. 요시야 왕은 어이없이 애굽왕 느고와 싸우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애굽왕 느고가 ‘나는 하나님이 보냈어, 그러니까 나를 막지마’ 라고 말했지만 요시야는 그냥 애굽왕 느고를 맞서 싸우다 죽습니다.

얼핏보면 이 장면은 이해가 잘 안되요. 심지어 성경 학자들도 이 장면에 대해 다른 해석들을 내놓습니다. 요시야가 훌륭한 믿음의 왕이었지만 마지막에 하나님의 음성을 이방인이 전한다는 이유로 무시해서 망했다.. 요시야는 훌륭한 믿음의 왕이었지만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욕심을 마지막에 부려서 망했다.. 이런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견은 요시야가 그 순간에 죽음으로써, 그 뒤에 일어나는 온갖 수모와 고통으로부터 피할수 있었고 이 고통과 수모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실현이다.. 라는 해석이죠.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요시야를 이어 유다의 왕이된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고통속에, 지옥과 같은 시간을 겪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 세번째 해석이 맞는 말이지요. 요시야는 적절한 시간에 죽음으로 지옥과 같은 고통의 시간들을 피할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뵈옵고, 더러운 것을 없애고, 성전을 다시 세우고, 율법책을 발견하고, 멸망과 구원의 예언을 확인하고, 구원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유월절 잔치를 벌인 요시야는 결국 망한 것일까요? 아니면 구원을 받은 것일까요? 요시야의 삶을 이해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겠지만, 저는 이 말씀속에 나오는 요시야 왕의 삶은 마치 성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고 성령님이 임하시고, 성경을 이해하고, 구원을 감사하고, 구원을 전하고, 구원을 기뻐하다 구원에 이르는 과정. 성경은 요시야왕을 통해 이 과정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하심을 요시야의 삶을 통해 확인하시는 은혜가 우리 좋은친구교회 가운데 차고 넘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