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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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6장 1-7절 ]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도행전 6:1-7

이야기를 들어주는 국수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손님들과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나누면서, 과거에 교회를 다녔다가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가나안 성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신천지 교회가 있어서 신천지 교인들이 방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 중 처음부터 본인들이 신천지임을 밝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로부터 본래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신천지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버리지 마라”는 속담입니다. 아이를 목욕시키고 그 씻긴 목욕물을 버리면서, 버리지 말아야 할 아이까지 버리는, 비록 상처와 아픔이 있고, 피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하여도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데, 교회에서 받은 상처들 때문에 교회를 떠나면서 버리지 말아야 신앙까지 버리고는, 무신론자의 삶의 살거나, 또는 다른 신을 좇고, 심지어는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은 안타까운 현실을 잘 설명해주는 속담인 것 같습니다. 교회 또는 같은 신앙인들에게 상처를 받는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들도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교회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유형의 지상교회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받은 상처들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있을까요?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자신이 기대했던 교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문제가 있는 것을 보니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다니,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근본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조차도 교회 안에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사도행전 6:1-2

“그 때”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처음으로 신약 교회가 세워진 때입니다. 이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강력하게 일어났던 때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자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걷게 만드는 기적과 같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하였으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는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서로 물건 통용하며,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흔히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한 교회 개혁을 주장할 때,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그 모델로 초대교회를 언급합니다. 지금의 교회들이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면 오늘날의 교회들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1절 말씀은, 교회 개혁의 모델로 제시되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 안에도 성도들 간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문제가 무엇입니까?

1절 말씀에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다고 나옵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아닌 믿는 자들을 뜻합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가 점점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구제 활동에서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쓰는 유대인들에게 소외를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이방인 지역에 흩어졌다가 유대 지역으로 돌아온 유대인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히브리어 대신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예루살렘 살고 있다가 믿음을 갖게 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기존 교인들로부터 차별적인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의 과부가 매일 주어지는 구제 대상에서 빠지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내의 헬라파 교인들이 기존의 히브리파 교인들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헬라파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교회에 차별과 소외라는 문제의 피해자들이 된 것이고 그들은 교회 문제로 인한 상처받은 교인들이 된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문제가 발생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2절 말씀을 보면 열 두 사도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불러서 말하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처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접대를 일삼는다는 표현에서 접대는 구제 사역, 좀 더 넓게는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일을 말합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는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자신의 재산을 팔고, 그 돈을 제자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교회 재정을 관리하고 그 재정으로 구제 활동을 하는 업무가 많아졌고, 열 두 사도들이 말씀과 구제활동을 모두 감당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한계가 노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소외되고 차별을 받는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하심으로 세워진 초대 예루살렘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마음에 원망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해 줍니다.

교회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는 까닭

그것은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유형의 지상교회는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왜 그럴까요? 구원을 받은 성도들일지라도 여전히 죄성과 인간의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일어난 문제들을 잘 다루지 못하는 미숙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성도들의 공동체인지상교회(지역교회 또는 개교회)에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도 그랬는데, 신앙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이 더 많은 오늘날의 교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교회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이 점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는 교회의 문제들에 대해, 그로 인해 우리가 받는 상처와 고통과 아픔들에 대해 좀 더 유연한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더러운 목욕물과 아이를 구별해서 아이는 놔두고 목욕물만 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성과 인간적인 한계를 지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자격을 얻어 함께 모인 곳이 교회이기에 교회는 언제든지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 곳임을 인정하고나면,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가 나를 너무 힘들게 해서 그 교회를 떠나더라도 하나님은 떠나지 않을 마음을 갖게 됩니다. 교회는 다니던 곳을 떠나서 다른 교회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교회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떠나서 다른 우상을 찾거나 무신론자가 되거나 이단 사상에 빠지는 안타까운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에 일어나는 문제들 위해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열 두 사도들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정확하게 진다하고 빠르게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 문제를 방치하거나 방관하지 않고, 교회의 문제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줌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본문 3-6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3)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사도행전 6:3-6

2절 말씀을 보면, 사도들은 자신들이 현실적으로 말씀과 구제를 모두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씀 사역과 구제 사역을 분리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구제 사역을 전담할 사람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를 세워서 그들이 구제 사역을 전담하게 하고 자신들은 말씀 사역에 힘쓰기로 합니다. 그렇게 선출 된 일곱 집사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모두 헬라식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 이름들을 보았을 때, 주로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서 세웠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사역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동안 소외되었던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어서 그들의 필요를 잘 채워줄 수 있는 사람들로 사역자들을 세웠을 것이라는 추축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간단히 말해 교회의 구세 사역이 원활하게 잘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문제와 하나님의 섭리

[본문 7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도행전 6:7

제자들이 말씀 사역에 집중을 하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복음이 더 힘있게 전파되었고 믿는 자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심지어는 제사장의 무리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복종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이 되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갈 때, 예수님께 덮어씌운 죄목은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성전을 모독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에 누구보다 근접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제자장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 제사를 담당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율법을 어겼다고 공회에 고발하였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는데, 적은 수도 아닌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그렇게 하였다고 본문 말씀은 밝히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본문에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 사역과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의 무리는 경제적으로 빈곤층에 해당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 수입은 유대인들의 명절이 되어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오는, 그러니까 일 년 열두 달 중에 고작 한두 달의 기간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나마도 수입이 많지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제사장으로서 풍족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대제사장의 문중에 속한 일부 소수의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당시의 제사장들의 숫자가 약 2만 명 이상이었다고 하니, 수많은 제사장들은 빈곤층으로 살아야 했고, 그래서 평상시에는 다른 직업을 가지고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하는 제사장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 사역은 그들이 생계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던 구제 사역이 잘 정비가 되자, 오히려 그 사역이 빈곤한 제사장들의 마음을 열고, 거기에 사도들의 말씀 사역이 더해져 허다한 제자장의 무리를 믿음의 길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기록하게 하신 목적은 예루살렘 교회가 말씀이 점점 왕성하였고,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아졌다는 점을 밝히시는데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말씀이 왕성하였다는 표현은 이후에도 여러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말씀이 불신자들 가운데서 힘을 얻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따라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전파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안고 있었던 문제를 초월하여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때때로 사회와 교회의 문제들 때문에 믿는 자들이 고통과 아픔을 느끼며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문제들 이면에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성과 감정으로 받아들 여지지 않은 세상의 부조리와 교회의 문제들이 있어도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리고 중단없이 세상을 통치하시며 구원 사업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문제와 상처들은 때때로 우리에게 큰 상처와 절망감을 안겨줍니다. 세상에서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게 되는 부조리함도 때로는 우리에게 과연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 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버리듯이 우리 신앙을 저버리는 참으로 어이없고 안타까운 삶의 자리까지는 나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여전한 죄성과 인간의 한계를 품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기에 교회는 언제나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 곳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니던 교회를 떠나서 다른 교회로 갈 수는 있습니다. 교회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렇게 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나면서 하나님까지 떠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즘 한국 교회의 젊은이들이 교회의 잘못을 보면서 신앙까지 저버리는 일이 너무나 많은 것 같아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국수집 손님들 중에는 비록 교회는 떠났지만, 그 마음에 여전히 하나님 향한 그리움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그런 가나안 성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 믿음을 회복하여 교회로 돌아와서 말씀이 그들의 삶 가운데 다시 왕성한 힘을 얻고, 그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수가 더욱 많아지기를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