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열왕기상 19장 9-12절 ]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열왕기상 19:9-12
여러분 학교 다니실 때 공부 잘 하셨나요? 공부 잘해서 1등을 하면 두껍고 하얀 종이에 자기의 이름이 박힌 상장을 주죠. 어떤 집은 그 상장을 액자에다 넣어서 걸어두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그 종이 한장은 열심으로 노력한 학생의 노력을 인정하는 상장이기에 참 귀중하고 가치있는 물건이 되지 않습니까.
올림픽에서는 가장 잘 싸운 선수에게 무엇을 줍니까? 금메달을 주지요. 금메달은 승리의, 또한 가장 우수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여기 미국에서는 미식축구 선수들이 시합을 하는데 일년내내 시합 중에 가장 잘하는 팀이 모여서 슈퍼볼 경기라는 것을 합니다. 아마 미국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임인 것 같아요. 전 사실 경기 룰도 잘 모르는데 우연히 그 결승전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 결승전에서 이긴 팀에게 트로피를 주는데 정말로 엄청 큰 트로피를 주더라고요. 승리와 영광의 트로피입니다. 이겼으면, 잘했으면 이렇게 상을 받는것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날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꺽고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야를 통하여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졌고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영접하였고, 승리한 엘리야는 450명이나 되는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없애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3년이 넘게 이어진 가뭄이 끝나고 생명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완벽한 승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승리, 누구도 부정할수 없는 승리가 갈멜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상을 받고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회복하고 다시는 바알을 따르지 않는 그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승리의 트로피, 승리의 금메달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감격했어요. 엘리야는 너무 신났어요. 그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열왕기상 18장 46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열왕기상 18:46
갈멜산에서 이스르엘까지는 24km 가 넘습니다. 거의 하프(Half) 마라톤의 거리이죠.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평소 준비가 안된 사람이 뛸 수도 없는 거리지요. 게다가 큰 비를 피해 달려가는 왕을 실은 마차의 속도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거리건 속도건 간에 말이 안되는 일인데, 엘리야가 그 빗속을 아마도 막 웃으면서 600만불의 사나이처럼 그렇게 달려갔습니다.
마차안에서 아합왕이 그 모습을 봤겠죠. 도대체 이 사람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도대체 하나님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이신가.. 안 무서울수가 있었겠습니까? 마음을 돌린 백성들이 엘리야를 따라 아합왕을 친다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가 있을수도 있는 상황 아닙니까.
왕궁으로 돌아온 아합왕은 갈멜산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이세벨에게 고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적은 성경원문을 보면 아합이 일어났던 사실을 담담하게 전한게 아니었어요. ‘갈멜산에서 엘리야하고 바알선지자가 겨루었는데 엘리야가 이겼어. 여호와 하나님이 이겼어. 엘리야하고 백성들이 바알선지자 450명을 죽였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여보! 여보! 여보! 큰~일났어! 엘리야가 이겼어!! 싹,, 다 죽였어! 바알선지자들을! 큰일났어!! 백성들도 엘리야 편이야.. 그리고 엘리야가 여기 와 있어!’ 속삭이듯이, 은밀하게 아합이 갈멜산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전합니다. 두려운 거죠.
이 구절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바로 죽이지 않고 왜 협박 먼저 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게 합니다. 바로 죽이기에는 정치적으로 부담감이 너무 컷던 거죠. 만약 협박이 먹혀서 엘리야가 고개를 숙이고 나오면, 어려운 상황이 한 순간에 바뀌지 않겠습니까? 이 모습이 열왕기상 19장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열왕기상 19:2
사람을 보내서 바로 죽인게 아니라 협박먼저 했단 말이예요. 그런데 엘리야는 이미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지요. 이깟 협박에 굴복한다는 게 말이 안되는거죠.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 방금 기적을 몸소 체험한 선지자, 하나님의 불을 본 선지자가 우상숭배자 이세벨의 협박에 굴복을 합니까? 정말 말이 안되죠. 가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엘리야는 좌절하고 도망갔습니다. 상을 기대했던 엘리야는 상 대신 벌이 내려지는 것을 보고 도망갔습니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열왕기상 19:3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오고 갔던 엘리야가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스스로 도망하였습니다. 좌절한 엘리야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이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좌절하고 주저앉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전혀 인식되지 않고 혼자 남겨진 듯한 두려움이 몰려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간절히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고, 온힘을 다해 매달렸는데 응답받지 못하는 듯한 좌절감. 우리 인생에 그런 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여도 하나님이 나의 삶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는 순간, 성도는 무너져 내립니다. 자신의 소망대로 자신의 삶이 전개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부재로 인식하는 성도는 어려움 앞에서 무너져 내립니다.
상을 기대했던 엘리야, 승리의 트로피를 기대했던 엘리야가 상 대신 트로피 대신 죽음의 위협이 다가오자 무너져 내린 것처럼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현실 앞에서 많은 성도들이 무너져 내립니다. 좌절한 엘리야가 고난과 시련과 고립의 상징인 광야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갑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열왕기상 19:4
애를 썼지만, 힘을 내 보았지만, 용기를 내 보았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듯한 좌절감. ‘나는 달라.. 내 믿음은 당신들과 달라.. 내가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것은 유별나.. 특별해..’ 하는 이 모든 자긍심이 초라한 결과 앞에서 무너지는 순간, 엘리야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싶어졌습니다. 살아있는게 고통스러웠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도망 온 끝자락에서 스스로의 초라함에 자신의 생명을 던져버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엘리야가 자기 스스로도 자기를 포기하는 순간,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엘리야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천사를 보내시어 그를 어루만지며, 일으키며, 먹이시고, 마시게 하십니다. 나는 나를 포기할지라도 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도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가 터벅터벅 걸어서 호렙산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아합왕의 마차보다도 빨리 달렸던 엘리야가 열흘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의 호렙산을 40일 주야를 걸어서 갑니다. 그 기운빠져 축 늘어진 엘리야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호렙산 그 곳은 어디입니까? 완전히 힘 빠진 노인이 된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곳이 호렙산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받은 곳이 호렙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언약을 맺은 곳이 호렙산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회복시키심이 있었던 장소, 그 상징적인 장소가 호렙산입니다.
그곳 호렙산에 엘리야가 도착했습니다. 그러고는 그가 그 산 위에 우뚝 섰습니까? 아니요. 안 그랬어요. 그곳 호렙산까지 가서 어두 침침하고 습기찬 굴로 엘리야가 들어가 버렸습니다. 두려움에 질려서 여기저기 머리를 숨기는 강아지 모양으로 엘리야가 기껏 호렙산까지 와서 굴속으로 들어갑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물으시죠. ‘엘리야, 뭐하냐?! 엘리야!’. 엘리야가 답합니다.
..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열왕기상 19:10
이게 지금 성경 속에서는 멋있는 말로 써 있으니 꽤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이 내용은 그냥 엘리야가 징징거리는 내용입니다. ‘내가요 하나님, 열심히 믿었잖아요.. 나같이 열심히 믿는 사람 어디 있어요.. 그런데요, 잘 믿지도 않는 쟤네들이 제단도 다 망가뜨리고, 주의 선지자들도 죽이고 그랬쟎아요.. 그런데 이제 나도 죽인데요.. 어떻게 해요.. 흐흑..’
우상숭배자들을 향해, 한나라의 왕을 향해 호통을 치던 엘리야는 어딜가고 찌질하게 징징거리는 한 사람이 호렙산 동굴안에 있는 겁니다. 인생의 추락은, 믿음의 추락은 바닥이 없습니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떨어져가는 엘리야를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
열왕기상 19:11
그러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열왕기상 19:11-12
강한 바람,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강한 바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현현을 상징합니다. 땅을 뒤흔드는 지진은 하나님의 살아 운행하심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을 태우는 불은 모든 악함을 태우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상징합니다.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상징합니다. 크고 강하고 무서운 영향력.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크고 강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을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엄청난 일. 엄청난 변화. 드라마틱한 이변. 그런 일들만 하나님의 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를 해도 몇 천명 몇 만명씩 모여들어야 하나님의 일 같고, 선교를 해도 신문에 날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끼쳐야 하나님의 일 같고, 누구를 도와도 시시하지 않게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도와야 할 것 같고, 애써서 도왔으면 충분한 상과 충분한 칭찬이 따라야 할 것 같고, 그래야 하나님이 일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때가 참 많습니다.
엘리야도 그랬어요. 애썼는데, 고생했는데, 그랬으면 세상이 바껴야지. 그랬으면 상 받았어야지. 그러나 결론은 엘리야의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그 결과를 정할 권리는 사람에게 없습니다. 엘리야는 사실, 하라고 한 일을 무사히 마친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한 것 자체로 감사해야 했습니다. 승리의 트로피는 엘리야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결론을 내놓고 그 결론에서 엇나가는 현실 앞에서 좌절한 엘리야는 어리석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기대에 맞춰 세상을 운행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세상을 운행하십니다.
하나님은 강한 바람으로, 지진으로, 불로 자신을 나타내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세미한 음성, 얼핏 들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그 세미한 음성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며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호렙산에서 동굴 안에 웅크린 엘리야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강한 바람속에도, 지진속에도, 불속에도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연히 계실것 같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그곳에 계셨습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기대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앞설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감람산에 오르셔서 엎드려 기도하시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그 내용이 뭡니까.
..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누가복음 22:42
성자 예수님조차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엘리야가 뭐라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과 기대가 무너졌다고 좌절을 합니까. 어리석은 엘리야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고정관념을 깨는 광경을 그의 눈앞에서 펼쳐 보이십니다.
그러고는 이제 굴밖으로 나온 엘리야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열왕기상 19:13
이만 했으면, 이만큼 보여주고 가르쳐 줬으면 뭐가 좀 바꿔야 되잖아요. 그런데 엘리야가 똑같이
토씨 하나도 안틀리게 똑같이 징징거렸어요. 하나님의 가르침이 있기전 엘리야가 하나님께 드렸던 불평인 열왕기상 19장 10절의 내용과, 놀라운 광경을 보고, 세미한 음성을 들은 후 엘리야의 대답인 19장 14절의 내용은 똑같습니다. 도대체 알아 듣지를 못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세미한 음성속에 계시는 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크고 요란한 일만 하나님의 일이라는 생각. 엄청난 영향력을 끼쳐야지만 하나님의 일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거예요.
연약한 가운데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작고 초라하고 불편하고 조용하고 잠잠한 가운데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심지어 대답없는 침묵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엘리야의 믿음이 오늘 우리들의 믿음을 닮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일을 다시 맏기십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죄된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한 초석을 놓는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열왕기상 19:15-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엘리야는 자신의 열심으로 세상을 바꾸고 그 바뀐 세상을 보고 싶어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바뀔 세상을 위한 초석을 놓게 하셨습니다. 이제 일을 맡기신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엘리야를 위로하십니다.
..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열왕기상 19:18
세상이 다 썩은 것 같고, 제대로 된 기독교인 하나도 없는것 같고, 나만 혼자 외롭게 애쓰고 있는것 같아..
아니요! 칠천명이나 남아 있습니다. 충분히 많은 숫자, 세상을 이기고도 남을 만한 숫자의 온전한 크리스천이 남아 있습니다!
목숨걸고 신앙을 지키는 집사님, 칭찬도 못들으며 남을 위해 기도 하며 애쓰는 권사님, 순수한 의도로 복음을 전하는 성도님, 온 힘을 다해 교회를 섬기는 장로님, 비난과 고통속에서도 바른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
충분히 많은 숫자, 칠천이 넘는 수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 혼자 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은 당신 혼자 외롭게 가는 길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 옆에 있지 않아도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시며 힘을 내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엘리야가 좌절을 딛고 다시 한번 순종하며 살다가, 하나님이 보내신 불수레와 불말 속에서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 승천한 것과 같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한복음 11:25-26) 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으며, 세상을 이기며 사는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