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표 목사
[ 요한일서 4장 9-10절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일 4:9-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성탄절을 맞이하여 오늘은 성탄절의 의미를 평상시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점입니다. 본문, 10절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그 증거는 9절에서 말씀하시듯,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0절 하반절에서도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 증거는 예수님이며,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에 대한 증거가 되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날이라는 의미가 있습
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우리 신앙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믿음의 여정에서 만나는 죄책감의 늪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믿음의 여정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한 가지 짐을 짊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죄책감이라고 하는 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죄와 죄책감의 문제는 불신자일 때보다도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여정을 시작했을 때 더 크고 더 무거운 마음의 짐으로 다가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주인공 크리스천은 성경을 읽고 순례자의 길을 시작하면서 늘 등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짐이 바로 죄와 죄책감의 짐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신앙인이 되면,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말씀을 지키며 살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물론 머리로는 예수님께서 나의 죄 값을 치러주셨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하지만,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
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도, 죄책감의 늪에 빠지면, 변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을 하고, 괴로워하며 심지어는 슬픔과 우울감 그리고 좌절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가 루터도 이 죄책감의 문제 때문에 늘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때마다 담당 신부님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했는데, 마음으로 짓는 죄도 그를 괴롭게 했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고해성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담당 신부님이 루터에게 너무 자주오지 말고, 죄를 모아서 한꺼번에 고해성사를 하라고 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훌륭한 종교개혁가 루터도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고 그만큼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렇듯 죄책감의 늪은 우리 믿음의 여정 곳곳에서 우리들의 발목을 잡는 암초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신앙인들에게는 이 죄와 죄책감의 문제를 다루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죄책감을 대하는 잘못된 방법들
-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도 함께 버리는 성도들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신앙인들 중에는 죄책감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국수집에 오신 어떤 분의 사례입니다. 그는 가나안 성도입니다. 교회를 떠나서 더 이상 교회를 안 나가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스스로 끊어버린 성도입니다. 그가 교회를 떠난 까닭은 죄책감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신앙인들이 거듭해서 죄를 짓는 것을 보면서, 그들을 비판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자신 역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기도도 하면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거듭해서 실패하는 자신에게 실망하고 좌절하여 차라리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를 거듭하면서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신앙까지 버리게 되었습니다. 서양 속담과 같이 아이를 씻긴 더려운 목욕물을 버리다가 소중한 아이까지 함께 버리듯,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믿음도 함께 포기한 경우입니다. - 응급처치에 급급한 설교자들
교회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 설교자들은, 성도들이 죄책감의 문제를 힘들어 하고,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을 꺼려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설교에서 죄의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그 문제로 인한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응급처치를 하듯 진통제를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로 세상에서 복을 받고 잘 사는 것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면서 죄의 문제는 언급을 하지 않는 방법으로 죄의 문제를 피해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죄의 문제와 죄책감은 회피하고 덮어버리고 무시한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여정을 시작함과 동시에 이 죄책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봐야 합니다. 죄책감을 다룰 때는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죄책감의 이면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픈 열망이 있습니다.
믿음의 여정에 필연적으로 죄책감이 동반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받은 것에 대해 보답을 하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것이지요. 하나님께 잘 보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또 한편으로는 죄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쓰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우리 마음에 한 가지 생각이 자리 잡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마치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애쓰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죄책감으로 새겨보는 성탄절의 의미
우리가 시작한 믿음의 여정은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심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라”라는 본문 10절 말씀을 하나님 시점에서 다시 표현하자면,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너희를 사랑한 것이다. 내가 화목제물로 삼은 나의 독생자 예수가 바로 그 증거가 아니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음의 증거가 되시는 예수님을 보내신 날이 됩니다.
다시 말해, 성탄절은 하나님의 먼저 하신 사랑의 여정이 시작된 날입니다. 이 여정은 3년이 걸렸고, 3년 뒤에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여정과 비교되는 한 인물의 믿음의 여정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아들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집을 떠나 믿음의 여정에 나섭니다. 믿음의 여정을 떠난 지 3일 째 되던 날에 모리아산에 이르렀고, 종과 나귀는 남겨둔 채,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게하고, 자신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번제를 드릴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길을 올라가는 동안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죄책감을 짊어지고 사는 우리들의 마음보다 몇 배, 아니 몇 십 배, 몇 백 배 이상의 깊은 슬픔과 아픔과 절망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믿음의 여정을 끝까지 마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멈추게 하시고 대신 수풀에 걸린 숫양을 이삭 대신 바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지만, 정작 바치려는 그 순간에는 왜 아브라함을 멈추게 하시고, 이삭을 바치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죄의 문제는, 죄 값을 치르는 것은, 인간의 희생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먼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간의 희생과 사랑으로 죄 값을 치를 수 있다면 아마도 이삭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실제 많은 이방 종교에서는 그런 생각으로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자신의 몸에 해를 가하는 고행과 자해를 종교 행위로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의 클라이맥스가 되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하신 사랑의 여정의 클라이
막스르 보여주십니다.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다가 멈추게 하고 이삭을 살리신 그곳이 바로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죽임을 당하신 갈보리산, 골고다 언덕인 것입니다. 성탄절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먼저 하신 사랑의 여정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클라이맥스에 이르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희생을 증거삼아 믿는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읽은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스스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였을 때,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각자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들 각자를 화목제물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먼저 화목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회개하고 나서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회개는 그 죽음이 나를 향한 하나님이 사랑이었음을 굳게 믿는 믿음의 과정일 뿐입니다.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는 죄의 문제를 피하거나 다른 것으로 덮어버림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더럽고, 부끄럽고, 연약한 나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음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도 오직 믿음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나도 받을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죄책감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신 것임을,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죽으심으로써 그 사랑을 확증하셨음을 떠올리며 죄책감의 늪에서 나와 하나님과 더 깊은 영적교제의 자유함과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