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목사

이인엽 목사

[ 사무엘상 7:15-17 ]

15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16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17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사무엘상 7:15-17

성경 속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각각 31장과 24장에 이르는 제법 긴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이 사무엘서의 길이를 보신다면 아니 무슨 사무엘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길까 하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사무엘 자신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사울과 다윗 왕에 대한 이야기를 주요 내용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사무엘은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연결고리로서의 역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축구로 말하자면 직접 골을 넣는 선수라기보다는 동료 선수가 골을 넣을 수 있게 어시스트 해주는 선수라는 말이죠.

이런 이유에서인지 성경 속 사무엘은 어떤 성격과 어떤 개성을 가진 인물인지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이라는 사람을 보면서 저는 ‘아, 이 사람 참 물과 같은 사람이다.. 새콤한 쥬스도 시원하고 톡 쏘는 사이다도 아닌 아무 맛도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무색 무취의 물과 같은 사람, 냉수 맛 같은 사람 그러나 몸에 꼭 필요한, 아주 유용한 생명과 같은 물, 그런 물과 같은 사람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무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의 관점보다는 사무엘이 어떤 일을 했었는지의 관점으로 또 사무엘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의 관점으로 사무엘을 이해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사무엘을 낳은 한나의 이야기, 사무엘의 어린시절 함께 한 엘리 제사장,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이야기, 그리고 사울과 다윗을 왕으로 세운 사무엘의 행동들을 통하여 우리는 사무엘이라는 인물과 그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을 낳은 한나는 엘가나의 아내였습니다.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사무엘상 1:1-2

사무엘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관한 이 구절은 마치 사무엘이 에브라임 지파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사무엘은 에브라임 지파가 아니라 레위 지파라는 것이 통설이지요. 원래 자신들만의 구분된 땅이 없던 레위지파는 여러 지파들과 함께 흩어져 살았는데, 사무엘의 부모가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 사는 레위지파였다는 거죠.

사무엘이 태어난 시절은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잊은 채, 가나안 땅의 우상을 섬기며 자신의 풍요만을 갈망하며 자기 멋대로 사는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자녀가 없는 이유로 풍요를 상징하는 많은 자녀를 가진 브닌나에게 핍박을 당합니다. 

이 모습은 사사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거죠. 풍요로운 것의 가치가 사랑보다 믿음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레위지파였던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매년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고요. 아들이 없는 이유로 브닌나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한나는 자신을 괴롭히는 브닌나와 싸운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하고 통곡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잊었던 그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찾으며 기도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둔 사무엘이 태어난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의 탄생은 매우 독특합니다. 더욱이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사무엘상 1:11

한나의 이 기도는 그녀의 기도가 오직 풍요만를 소망하며 우상에게 행하는 기도와 뭐가 다른지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분명 기도속에서 여종의 고통을 보아달라고 간구합니다. 또한 자녀를 주시면 그 자녀를 다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풍요를 상징하던 시대, 자녀를 풍요로 생각한다면 이 기도는 나에게 풍요를 주시면 그 풍요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한나의 기도는 풍요를 바라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기복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한나의 기도는 지난번에 기도와 관련해서 이동엽 목사님이 설명해 주신, 수치를 피하게 하다는 뜻의 아나데이아를 소망하는 기도입니다.

풍요만을 갈망하는 사사시대에 풍요의 상징인 자녀를 가진 브닌나에게 고통을 당하는 한나가 그 수치를 면하게 해달라고 통곡하며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있는 기도입니다. 바로 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어쩌면 시대적으로 이미 필요했던, 그래서 이미 진작부터 계획되어 있던 사무엘의 탄생은 이처럼 한나의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아름다운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 졌습니다.

사무엘이란 이름이 듣다는 뜻의 “쉐마” 와 하나님이란 뜻의 “엘”이 합쳐진 단어잖아요. 즉 사무엘은 “하나님이 들으셨다” 는 뜻입니다. 한나가 기도의 응답,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을 아들의 이름으로 세상에 선포한 겁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응답 받을만한 기도를 하는 것 같은데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들어주셔야 될 것 같은데, 아무 응답도 없을 때도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뜻을 어떻게 다 이해 하겠습니까. 한나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래서 한나는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 주신 증거인 사무엘을 통하여 그 사실을 감사하며 세상에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이 아이가 바로 사무엘이에요.. 이 아이는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생긴 아이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서원을 지키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믿었기에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겁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무엘은 젖을 떼자마자 실로의 성전에서 자라납니다.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성막에서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의 지도를 받아 여호와를 섬기며 자라났습니다.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사무엘상 2:11

그러나 안타깝게도 엘리는 별로 좋은 제사장이 아니었어요. 더군다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주 악한 자들이었죠.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무엘의 어린시절 성전에서의 삶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겁니다.

엉터리 신앙을 가진 사람들, 악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매일같이 부딪히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라요. 그러나 사무엘을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어요. ‘엄마, 나 여기 못있겠어, 나 좀 데려가..’ 이러지 않았다고요. 그 안에서 악한 그들에게 물들지 않으며 온전히 주님의 자녀로 사무엘은 자라났습니다. 어둠속에서 빛이 더욱 빛나보이듯 사무엘은 그렇게 빛나는 모습으로 자라났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사무엘상 2:26

자, 그러던 어느날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사무엘상 3:3-7

이 구절들은 정말 황당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시는데 사무엘이 엘리에게 쫒아가고 있어요. 하나님이 부르시는데 사람에게 쫒아가고 있다고요. 왜 그렇습니까?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게 말이 됩니까? 사무엘은 성전에서 잠만 잤을까요? 사무엘은 성전뜰 청소만 했을까요? 그럴리가 없잖아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 아니에요. 하나님께 제사 지내는 의미와 방법들을 배웠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성경은 사무엘이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무엘은 분명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을텐데, 왜 알지 못한다고 할까요? 이상하죠.. 거기에 대한 답은 ‘알다’라는 단어로 쓰인 ‘야다’ 라는 히브리어에 있습니다. ‘야다’는 지식적인 앎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야다’는 직접 만지고, 직접 냄새맡고, 직접 겪어보는 전인격적인 교제를 의미합니다. 부부가 서로를 아는 것 같은 깊은 앎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은 그것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혹시 우리의 앎이, 하나님에 대한 앎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람의 부르심으로 착각했던 사무엘과 같이 지식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건 아닐까요? 그렇게 하나님을 몰라서 매번 여러일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 대신 사람을 찾아 헤매고 있지는 않을까요?

“야다”, 온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전인격적인 앎이 우리의 삶 가운데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왜 입니까? 알아야 믿죠. 하나님을 몰라서 그 부르심을 받지 못하는 사무엘.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심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사무엘상 3:8-9

변변치 못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도움으로 사무엘은 이제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았습니다. 또 다시 들려올 하나님의 음성을 기대하며 사무엘은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사무엘과 하나님의 만남이 이루어 졌습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사무엘상 3:10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의 시작이 어땠습니까? 한나 자신의 수치를 면하게 해달라는 기도와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간구에 하나님이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전에 사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이것이 시작입니다. 이것이 기초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부르는데 하나님이 응답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인간이 응답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 그 소통이 바로 시작입니다. 그 소통을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을 “야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무엘과 같이 제사장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직접,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과 소통하며 “야다”, 즉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권리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알게된 사무엘은 이제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죠. 그렇게 하나님을 모르던 사사시대, 그렇게 하나님보다 자신들의 풍요로움에 집착했던 시대에 하나님과 교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사무엘은 하나님의 일, 진리이신 하나님을 알리는 일을 합니다.

사람이요 본능적으로 남들은 잘 모르는 비밀스러운 일, 나 혼자 아는 놀라운 일, 그렇게 아는 것을 남에게 알리려고 애를 쓰는 경향이 있지요. 진리가 사무엘 안으로 들어가자 사무엘은 그냥 입 꼭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무엘이 하나님을 알리는 일을 한겁니다.

우리 좋은친구교회 모든 성도님들도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과 교통하시고 하나님을 알아서 하나님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런 놀랍고 그런 아름다운 역사가 있으시기를 소망합니다.

자, 이제 이렇게 사무엘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까 하나님이 그 말씀을 지원하시고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선지자로 인정하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사무엘상 3:19-20

여호수아 이후의 사사시대는요, 전국적인 리더가 없던 시대에요. 대부분의 사사들도 일부 지역을 다스리는 사사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전 이스라엘이 인정하는 인물이 나타난 겁니다.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잊었던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니까, 축복과 풍요가 넘쳐나야 하지 않을까요? 평화와 기쁨의 시간이 와야 하겠지요?

그러나 사무엘상 4:1을 보십시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사무엘상 4:1

전쟁이 일어났어요. 시련이 왔습니다. 심지어는 언약궤를 부적처럼 이용하려고 하다가 블레셋에게 패하고 언약궤마저 빼앗기죠.

얼핏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기 시작했는데 큰 재앙이 온 것 같아요. 큰 맘 먹고 교회 나갔는데, 모처럼 열심히 기도생활 시작했는데, 크게 망하는 것 같아요. 다 빼앗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망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 온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을 통하여 무능한 엘리 제사장을 죽이십니다. 악한 그의 두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십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부적처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악한 일인지, 무의미한 일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언약궤를 가져간 블레셋인들은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힘에 눌려 언약궤를 돌려보내죠. 이 모든 과정들을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겁니다. 전쟁을 통하여 악인들이 죽어나가 떨어지는 모습, 빼앗겼던 언약궤를 블레셋인들이 감당하지 못해 돌려보내는 모습.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경험하는 겁니다. 그들에게도 “야다”, 즉 하나님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하여 아는 앎이 인생의 시련을 통하여 아는 앎이 이루어져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이 바뀌었습니다. 사사시대 내내 풍요나 꿈꾸어오던 하나님을 잊은 백성 이스라엘이 바뀌었습니다.

궤가 기랏여아람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사무엘상 7:2

이처럼 다시 하나님을 사모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을 사무엘이 미스바 대성회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 시킵니다. 그 구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사무엘상 7:3-6

회개한 이스라엘 백성, 여호와께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위에 사무엘은 다윗을 왕으로 세웁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한 사람이 하나님을 앎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며

하나님을 알게 되는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이루어 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이 악한 시대에 빛나는 사무엘이 되시기를, 진정한 사무엘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