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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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5장 1-10절 ]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1-10

오늘은 예수님의 팔복 나눔 마지막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여덟 번째 복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의를 위하여”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의를 위하여”라고 하실 때 이 “의”는 첫째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합니다. 즉, 우리 죄를 씻어주심으로 값없이 주어진 의로움입니다. 이 “의”는 죄 씻어주심을 믿는 믿음으로 얻게 됩니다. 둘째는 그 믿음대로 살 때 실천하게 되는 옳고 바른 삶입니다. 이를 사회적 정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라는 말씀의 “의‘를 간단히 표현하자면, 믿음과 그 믿는 바를 실천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더 간단히 표현하자면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신앙생활을 위해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박해”는 무엇입니까?

박해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거나, 경제적 궁핍하도록 만들거나, 신체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행위이며, 나아가 심할 경우에는 목숨까지도 빼앗는 행위입니다.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우리는 순교자라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일찍이 박해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스데반 집사가 박해를 받아 순교하였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박해를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로마시대 네로황제 때부터 약 250년간 박해를 받아 순교한 기독교인은 3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말기에 많은 천주교도들이 조선 정부의 박해로 순교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박해를 받아 순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 모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간단히 말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을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하려 할 때 한 가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적으로 신앙을 위해 죽을 일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위해 죽을 일이 없는 우리들

사실, 우리들 중에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이슬람권이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이나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인 데다가,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 의미의 박해는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믿지 않는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는 가족이나 친척들의 박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나 우리나라의 신앙 선조들이 받았던 박해에 비할 정도는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일이 별로 없으니 이 여덟 번째 복은 우리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팔복이 아닌 칠복이면 충분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여덟 번째 복은 박해의 시대를 살았던, 또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말씀일까요? 그런데 성경 말씀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니, 이 여덟 번째 복은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적용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박해가 없는 시대와 사회를 사는 우리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박해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우리는 “의를 위하여”에 초점을 맞춰 말씀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나는 과연 나의 믿음을, 나의 신앙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목숨을 내어줄 정도로 소중한 것으로 삼고 살고 있는가?”라는 점을 살펴봄으로써 팔복의 마지막 여덟 번째 복에 대한 말씀의 의미를 새겨볼 수 있겠습니다.

믿음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5-8절 말씀에서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에 대해 교훈하십니다.

[마태복음 7:6-8]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

를 빼리라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

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

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태복음 7:5-8

5절 말씀은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7,8절 말씀은 하나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들에게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6절 말씀이 흐름상 좀 엉뚱해 보입니다. 갑자기 거룩한 것과 진주를 개와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거룩한 것과 진주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진리의 말씀이며 동시에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신앙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의 팔복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5절의 외식하는 자들은 심령의 가난함을 깨닫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함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한 채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고 그 형제를 죄인으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그런 행위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그 말씀을 믿는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마치 개나 돼지에게나 던져주는 것처럼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원리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구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아낌없이 주실 것이며,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팔복의 여덟 번째 복에 대한 말씀을 보면서, 혹시 나는 나의 믿음을,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만큼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개나 돼지에게 던져주는 것들인 양 하찮게 여기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말로는 말씀이 귀하고 우리 믿음과 신앙이 귀하다고 하겠지만, 정작 삶에서는 우리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혼합주의는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만 다른 것도 하나님처럼 믿는 신앙입니다.

과거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죄악들 중의 하나가 바로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믿고, 이방인들의 신도 겸하여 믿는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개나 돼지에게 던져주는 것처럼 하찮게 여기는 행위였고 그런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결과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혼합주의 신앙

이러한 혼합주의 신앙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믿음은 그 열매로 안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오직 믿음’을 강조하다 보니 믿음의 열매는 소홀히 했던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믿음이 세상의 복을 구하는 기복신앙으로 흐른 점이 있습니다. 세상의 복을 구하는 믿음은 혼합주의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돈도 의지하고 힘이 있는 사람도 의지하고, 세상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점쟁이를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열매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그것을 가르치는 진리의 말씀과 그것을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참된 믿음을 마치 거룩한 것과 진주를 개나 돼지에게 던져주는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 믿음을 목숨과 바꿀 수 있을 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자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천국은 아무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달리 보면, 믿음을 하찮게 여기는 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오늘 말씀에 비춰 보면, 천국은 그저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에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치열함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11-12]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

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태복음 11:11-12

천국은 의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줄 각오로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고 치열하게 지키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어떤 이들은 천국에서도 받는 상급이 차이가 있어서, 보다 큰 상급을 받기 위해 더 헌신하고 봉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킴으로써 받는 상급은 천국에서 여러 가지 종류로 받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 가는 것 자체가 상급입니다. 그 상급이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 자체만으로,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팔복의 말씀을 하시면서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을 맺으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이 천국이요. 마지막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받는 복도 천국입니다. 팔복의 흐름을 보면 가난한 심령과 애통하는 마음으로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여 신앙의 성장과 성숙하는 과정을 거쳐 결국에는 믿음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깨닫는 자가 천국에 가는 것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나는 과연 나의 믿음을 죽음과도 바꿀 수 있는 소중한 것으로 여기며 살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런 마음으로 믿고, 또 그 믿음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면, 천국을 가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복을 함께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