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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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5장 1-9절 ]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1-9

오늘은 예수님의 팔복 중 일곱 번째 복인 화평하게 하는 자가 받는 복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

요한복음 1장 12절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고 하여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무조건 하나님의 아들이나 딸로
부르진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눈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나 딸로 비춰지는 것은 믿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점이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점을 살펴보기 위해 일반적인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습니다. 그래서 그를 보면 그의 아버지가 떠오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기 사진 한 장을 준비했습니다. 같이 한 번 보실까요?

제가 이 사진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먼저 살짝 미소를 짓습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큰 아이가 아빠를 많이 닮았네요.”라고 말합니다. 제 큰 아이가 어렸을 적에 동네 사람들은 이 아이의 얼굴만 보고도 그 아이가 우리 집 아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너무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 큰 아이와 길을 걷다 보면,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이 저와 큰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빙그레 웃고 지나가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빠와 아들이 너무 닮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사진을 보면서 큰 아들이 저를 많이 닮았음을 느낄 것입니다. 저희 부자지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자녀들은 그 얼굴에 그 부모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녀를 보면 그 아이의 아빠 또는 엄마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떠올리게 되고, 그 아이가 누구의 아들인지 금방 알아챕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는 것은 외모뿐이 아닙니다. 목소리나 행동, 습관, 성품도 닮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행동이나 성격을 보면서 사람들은 “얘는 누굴 닮아서 저럴까?”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부모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지요. 이렇게 사람들은 아이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 부모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 그 아이를 먼저 아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아이를 보면서 그 부모를 알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학생들을 대하면서 때로는 그 부모가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냐 하면, 그 아이가 바르게 잘 컸다는 생각을 하게 될때입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부모님들이 어떤 분일까?”, “그 부모는 가정교육을 어떻게 했을까?” 등등 그 부모가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녀의 외모나 행동, 습관이나 성품은 그 부모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자녀는 그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하게 만듭니다.

이런 점을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사람은, 누군가 그 사람을 볼 때, 마치 사람들이 아들에게서 자연스럽게 그 아버지를 느끼듯이, 그에게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느끼게 만들거나, 그를 보면서 그가 믿은 하나님을 궁금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 누군가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생각나게 만드는 사람, 그 누군가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일 경우에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알고 싶도록 만드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삶이 복된 삶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당신을 보면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또는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 기분이 어떨까요? 정말 좋은 기분, 매우 특별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요? 그 기분을 다른 두 글자로 표현하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행복을 느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세상에 이런 복이 있었다니!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서 집사고, 차사고, 땅 사고, 사람들에게 존경 받고, 건강하고 장수하는 복을 꿈꾸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을 다 같이 꿈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 그런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화평하게 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실까요?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화평이 아닌 다른 것들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보여주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병을 고치는 등의 기적을 행하거나,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을 소유하거나, 미래를 예언하거나, 돈이 많아서 수많은 선행을 행하거나, 지식과 지혜가 충만해서 사람들의 모든 고민거리를 해결해 주는, 이러한 힘과 능력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런 것들이 아닌 화평을 말씀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결과가 화평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사용된 화평이란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국가와 개인의 평화라는 뜻과 함께 화합, 일치, 하나 됨, 안식의 뜻을 포함하며 나아가 메시아가 주시는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평화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 단어에서 보듯, 예수님은 이사야 9장 6절의 말씀처럼 ‘평강의 왕’ 즉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은 예수님이 곧 이 땅의 평화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근원적인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너진 관계도 회복하시는 이 땅의 평화도 이루셨습니다.

[골로새서 1:20]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로새서 1:20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것이 무엇입니까? 화평, 곧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피조세계가 잃었던 평화를 회복시키시고, 다시금 하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그 희생으로 회복시킴으로 메시아적, 영적, 근원적인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회복시켜서 다시금 하나 되게 하시는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에베소서 2:14]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
로 허시고

에베소서 2:14

이 말씀에서 ‘그’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존재 자체가 화평이십니다. 그는 자신의 십자가 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도 허무시고 둘로 하나가 되게 하는 화평을 이루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있었음에도 율법과 관습, 그리고 서로 경쟁하면서 다툼과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들 사이에 있는 벽을 허무셨으니 하나가 되어 화평을 이루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들은 말씀을 따라서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고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로 산다는 것

알렌 크라이더가 쓴 ‘초대 교회에 길을 묻다’라는 책은 로마인들의 박해로 순교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00년경에 북부 아프리카의 도시 카르타고에 있는 원형 경기장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처형이 있었습니다. 그때 순교당한 사람들 중에는 퍼피투아라고 하는 귀족출신의 여인과 함께 노예를 포함한 다양한 계층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채 검투사들에 의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서로에게 입맞춤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그들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낯설고 심지어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에서 입맞춤의 인사는 같은 신분, 그리고 주로 가족 같은 친밀한 관계에서 행해지던 것인데, 귀족 퍼피투아가 신분을 초월하여 함께 있는 노예들에게 다가 입맞춤의 인사를 하는, 있을 수 없는 장면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목격한 그리스도인들의 입맞춤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 존재했던, 허물 수 없는 벽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비춰졌습니다. 그 입맞춤은 에베소서의 말씀과 같이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는 평화의 입맞춤이었던 것입니다.

이 실화는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합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라 신분과 민족과 지역으로 가로막힌 담을 허물고 화평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은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성품을 자연스럽고 강력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그 모습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하나님을 알고 싶어 했고, 그 결과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힘 있게 전파되어 갔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녀가 부모의 모습을 담고, 반듯하게 자란 자녀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부모를 알고 싶어 하게 만들듯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모습이 있고,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을까요?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은 화평을 이루기보다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경쟁하고 서로 다투며 살아왔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경쟁과 다툼은 더욱 심해졌고, 심지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힘이 있는 사람들은 신분과 차별을 통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사회적으로, 지역적으로 허물 수 없는 벽이 만들어져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에는 개인적 성공과 가치관, 문화와 성격의 차이가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수많은 갈등과 긴장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공동체와 개인은 끊임없는 경쟁과 다툼속에 살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승리하고 성공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나의 성공을 위해 일부러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를 주장하지만, 그 속내는 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경쟁하여 쉽게 승리를 거머쥐기 위한 노림수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가치관이 당연시 되는 사회 속에서 경쟁과 다툼을 멈추고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며 진정한 화평을 이룬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이상하며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춰질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이루는 화평은 사람들에게 더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이루는 화평은 하나님을 강력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그렇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을 알고 싶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다가 누군가로부터 “당신을 통해 하나님을 느낍니다.”, “당신을 보니 당신의 하나님을 알고 싶어집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경쟁과 다툼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화평을 전해야 합니다. 손해보고 고통을 겪더라도 진실된 사랑으로 차별을 없애고 용서와 관용으로 화평을 이루려고 노력한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할 것이며,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모습을 볼 것입니다. 그런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