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이인엽 목사

[ 룻기 4장 13-17절 ]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룻기 4:13-17

성경은 때로 소설과 같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곤 합니다. 강력한 역사성을 갖고 있는 성경이 가끔 소설, 그러니까 마치 동화와 같은 이야기, 지어낸 것과 같은 말투로 이야기를 할 때면 전 조금 불편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면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 잖아요. 가짜 잖아요. 상상속의 이야기 잖아요.

우리는 성경속의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한 사람들이 옮긴 지극히 사실인 이야기들,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들, 천국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역사속의 이야기들로 믿지 않습니까.

성경과 소설은 뭐가 틀리죠? 우리가 아무리 재미있게 드라마를 보고 아무리 쏙 빠져서 소설을 읽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삶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죠? 사실이 아니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니까. 반면에 우리가 드라마나 소설보다 훨씬 딱딱하고 때론 지루하기도 한 성경을 보는 이유는 뭡니까? 성경은 생명의 이야기니까. 말씀은 나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니까.

그래서 사실 성경의 대부분의 책들은 조금은 딱딱하고,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글들로 생명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 앞에서 재미 있고 없고가 중요한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다른 성경책들과는 달리 오늘 우리가 나누실 룻에 관한 이야기 룻기와 나중에 우리가 또 다룰 에스더는 둘 다 마치 소설처럼 써 놓았어요. 내용이 소설 같다는게 아니구요, 써놓은 방법이 소설같이 써놓았다는 겁니다.

한국어 성경이나 영어성경으로 보면 룻기나 에스더 모두 특별히 성경 속 다른 책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지만 원문을 보면 분명 다른 말투, 마치 소설과 같은 방법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찌 보면 신빙성이 떨어질 수도 있는 이런 방식으로 글을 써놓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룻기에 기록된 내용을 이성적으로나,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좀 더 감성적으로, 좀 더 뜨겁게 받아들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오심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예수님은 왜 오시기로 작정하시고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하나님의 그 선택은 우리의 머리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지요. 하나님의 선택, 그것은 우리의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야기 입니다. 그것에 대한 내용이 이 룻기에 있습니다.

유다지파에 속한 한 가정이 기근을 피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지방으로 이민을 갑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엄마인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기고 아버지와 두 아들은 모두 죽고 말지요. 완전히 실패한 이민생활. 모든 것을 잃은 나오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이민을 갑니다. 그 역이민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길을 모압인 출신 며느리 룻이 따라 나섭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은 가난하고 힘없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돌보죠. 그러다 극적으로 보아스를 만나 결혼을 하고 룻과 나오미의 가난과 고통은 끝이 납니다.

이처럼 간단한 단편소설과 같은 룻기는 의외로 여러가지의 질문을 갖게 만듭니다.

첫째로, 나오미와 그 가정은 왜 그렇게 망했을까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룻기 1:1

여호수아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사사들이 있었습니다. 사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이미 나누었었죠.

이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보다는 자기 멋대로 살아가며, 가나안 땅의 우상을 섬기는 등 하나님을 저버린 백성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풍요를 상징하는 바알을 섬기며 하나님을 향한 올곧은 믿음보다는 물질적 풍요를 갈망하며 살아갔죠.

이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흉년이라는 징벌을 내리십니다. 룻기에 사용된 흉년이라는 단어는 ‘라아브’ 인데, 이 단어는 주로 신의 저주, 심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모든 인간의 원죄를 만들어낸 아담에게 주어진 징벌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17

힘들게 땀흘려도 먹을 것을 찾기 어려운 흉년. 그것은 분명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인 동시에 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징벌을 피해 달아난 사람들이 있었는데, 엘리멜렉과 나오미 그리고 그들의 두 아들이었죠.

어의 없게도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이름의 뜻은 이렇습니다. 엘은 하나님이죠, 멜렉은 왕입니다. 그래서 엘리멜렉의 뜻은 ‘나의 왕은 하나님이다’ 라는 뜻이구요. 나오미는 ‘기쁨’, ‘즐거움’ 이라는 뜻이에요. 나중에 실패해 돌아온 나오미가 자신의 이름을 기쁨을 뜻하는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쓰다’, ‘괴롭다’는 뜻의 마라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엘리멜렉과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은 ‘나의 왕은 하나님이요 그는 나의 기쁨이다’ 라는 뜻이에요. 얼마나 엄청난 이름을 가진 부부입니까. 또 이 부부는 얼마나 엄청난 상징성을 갖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의 징벌 앞에서 도망을갑니다. 어디로 갔죠? 재산을 싹 팔아서 풍족하게 해가지고 모압으로 갔습니다. 모압족속이 누구입니까.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큰딸이 아버지를 술취하게 만든 뒤 동침하여 얻은 아들이 바로 모압이죠. 그의 자손들이 모압백성입니다.

그러니까 모압 백성은 심각한 영적, 도덕적 타락의 상징과도 같은 족속인 거에요. 그래서 신명기 23:3 에서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 라고 말하고 있는거죠.

무슨 말인가 하면요, 성도라는 아들이 죄를 져서 ‘밥 굶어, 혼나고 정신차려!’ 이랬더니, 집에 있는 재산 싹 팔아서 도망갔는데, 아주 죄의 소굴로 들어가버렸다는 말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 가정의 몰락은 죄 없는 한 가정의 억울한 몰락이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의 매 마저 거부한 패역한 백성의 몰락을 상징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하나님을 기쁨의 근원으로 인정하는 성도들이 죄로 인한 징계를 거부하며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더 큰 죄로 빠져드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자, 이 정도면 완전히 망하는게 당연한 거죠. 모든 것을 잃은 나오미는 이제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다 끝났어, 완전히 망했어, 아무것도 안 남았어..’

이것이 나오미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우리 모두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실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우리는 사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타고난 죄와 우리가 살면서 저지른 죄로 인해 완전히 망한 희망없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인 됨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예수님을 믿어주는 척 하고 있어요. 선심쓰듯 교회를 나가고 있어요. 천국과 구원은 당연히 자기가 받아야할 것이라 착각하고 있어요.

아니에요. 우리는 자격 없습니다. 자격 미달입니다. 희망없는게 맞습니다.

나오미가 자신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려하는 며느리들한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룻기 1:11-13

나오미의 망함은 일시적인 망함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끝난겁니다. 죄로 인한 인간의 망함은 일시적인 망함이 아닙니다. 완전히 끝나는 겁니다. 이렇게 망한 자에게 희망은 없는 겁니다. 그게 당연한 거에요. 우리는 이제 나오미의 망함에 대한 이유와 그 상태를 알았습니다.

둘째로, 그렇다면 룻이 이처럼 희망도 없이 완전히 망한 나오미를 따라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나오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간 룻에 대한 해석은 보통 이렇습니다.

‘룻은 아주 정결한 며느리여서 남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서인 오르바처럼 떠나가지 않고 시어머니를 열심히 섬겼으며 결국 복을 받아 부자집으로 시집가서 잘 살았다.. 그러니까 성도분들도 어려움을 이기며 시어머니를 잘섬기면 복받는다..’ 이런 해석이 있지요. 하지만 이 해석은 좀 억지스럽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시집 간 여인이 남편이 죽었는데도 재가하지 않고 수절하며 시어머니를 열심히 섬기면 나랏님이 열려문을 세워주며 칭찬했다.. 이것하고 좀 비슷하지 않나요. 또는 무슨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처럼, 호랑이는 못참고 도망갔는데 곰은 잘 참아서 사람이 되고 웅녀가 되어 시집가 잘살았다.. 이런 내용 같기도 하구요. 물론, 남편을 낳아준 시어머니께 잘해드리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지만 성경이 무슨 조선시대 법도를 가르치는 책은 아니잖아요.

또 다른 해석은 룻이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겨서 나오미의 고향, 하나님이 계시는 땅으로 돌아갔다는 해석입니다. 물론 그런 면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룻이 나오미를 따라나선 온전한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을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섬길 수 있었을까요? 기도는 꼭 예배당에 가야만 드릴수 있다는 말하고 같지 않나요?

그렇다면 룻이 나오미를 따라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긍휼함,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이미 늙고 가난한 과부였죠. 그녀가 마련해 온 재산은 모두 탕진해 버렸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감은 무언가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가는 길이 아니죠. 아무런 대책도 없이 구걸하다 죽더라도 고향 땅에서 죽겠다는 마음 아니었을까요.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가서 혼자 겪을 고통은 누구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룻은 그것을 보았어요.

남편과 자식을 잃은 아픔속에 있는 나오미의 고통, 아무런 희망도 가질수 없는 나오미의 고통, 가난과 무기력함으로 헤어날 길이 없는 늙고 지친 나오미의 고통, 의지할곳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오미의 고통, 사람들의 시선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나오미의 고통, 또 다시 생계를 위하여 수치스러움을 견뎌내야 할 나오미의 고통..

그 고통들을 룻은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앞에 룻은 모른척 돌아설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각박해 집니까. 사람들이 왜 잔인해 집니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기에 그런 것 아닙니까. 룻은 나오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완전히 망한 자 나오미에 대한 룻의 사랑은 완전히 망한 우리들을 버리지 못하셔서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예수님의 오심은 완전히 망해서 죽어야 할 우리를 외면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합리적으로 따지면 죄 지었으면 벌 받는 것이죠. 사랑은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까지 지십니까. 사랑은 조건적이지 않습니다. 그저 부어주는 것이지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룻기는 이처럼 말도 안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치 소설과 같이 우리에게 부드럽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때문에 나오미를 따라나선 룻을 통하여 룻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기를 읽으며 드는 마지막 질문은, 룻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옴으로 어떤 복을 얻었는가? 입니다.

얼핏 보기에 룻은 그 선행의 대가로 보아스와 결혼하는 복, 즉 물질적인 축복, 세상적인 복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보아스는 룻에 비해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소녀라고 부르는 장면은 룻과 보아스의 나이 차이를 짐작하게 합니다. 심지어 보아스는 룻의 선택을 이렇게 칭찬합니다.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기 3:10

보아스의 말처럼 룻은 사실 그냥 모압 땅에 남아서 젊은 남편을 만나 사는 편이 세상적으로 더 복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기에 룻이 얻은 복을 세상적인 복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오히려 룻이 얻은 복은 여호와의 회중에 참여할 수 없는 모압 여인이 놓지 않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계보에 이름을 올리는 영적인 축복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룻이 가지고 있던 그래서 보아스가 칭찬한 사랑, 인애는 무엇입니까? 인애라는 단어의 원어를 보면 히브리어 ‘헤세드’ 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적 사랑, 또는 사람들간에 끊을수 없는 끊어지지 않는 끈질긴 사랑을 표현합니다.

룻의 이 사랑은 동시에 예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지요. 룻은 이 사랑을 통하여 나오미를 구했습니다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룻기 4:13-15

누가 우리를 사랑하여서 누가 우리의 생명을 회복시키시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며 누가 우리가 연약할 때 돌보아 주십니까. 나오미의 생명을 회복시키며 그녀의 노년의 봉양자 된 아이를 낳아준 룻의 헤세드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성경 룻기는 바로 이 룻이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 됨을 선명히 밝힘으로 예수의 탄생과 룻의 이야기의 연관성을 분명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은 막대기와 같이 아무런 희망도 없는 우리를 사랑으로 살려 내시며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의 그 사랑을 기억 하십시요. 우리의 구원이 우리 스스로 받을만 해서 받는것이 아니요,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위에 세워져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교만과 허세로 주님의 사랑을 모욕하는 죄에 빠지지 마십시오. 오직 겸손함과 감사가 입술에서 멈추지 않도록 늘 깨어 있으십시오.

룻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