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엽목사

이동엽 목사

[ 로마서 12장 1절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산 제물이란 살아있는 희생제물을 말합니다
옛날에는 신에게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것을 제사, 제례라고 하고
이것은 언제나 모든 종교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어 왔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이단과 정통의 구별이
도덕성에 있다기 보다는
제례를 얼마나 철저히, 빈틈없이, 잘 규정에 맞게 드리느냐에 따라
오소독스 즉 정통이냐 아니냐 가 구별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구약의 백성들도 제사를 지냈습니다
규정에 따라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에 대한 규정이 율법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더이상
희생 제사를 드리 지 않습니다
구약적인 율법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이말은 율법을 무시한다는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헛되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제례를 할 때 중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정성은 곧 사랑입니다
제사 지낼 때 홍동백서니 어동육서니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에 주술적인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서 하나 하나에 까지 정성과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제례의 의식이 중요하다는 말의 의미는
그만큼 정성과 사랑을 기울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기독교는 (율법 자체에 집중하는) 유대교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와
예배를 하는 우리의 태도에 주목합니다

‘율법의 일점 일획도 헛되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예수의 말씀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산 제물’이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제물을 뜻합니다
살아있는 제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는
(물론 나중에야 기독교에서는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의 죽음을 예표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지만)

유대교를 비롯한 다른 모든 종교에서 이 피는
의식의 엄중함과 함께
(생명을 주관하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의 권위를 드러내는 역할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인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이 후
유대인들은 더 이상 성전에서 제물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후 디아스포라로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은
어쩔수 없이 회당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제사의 형식보다는
회당에 모여 믿음의 내용을 전달하는
가르침 위주의(교육 위주) 예배에 집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희생 제사에 익숙해 있던 유대인들은
늘 제사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설득력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태생적으로 유대인이었던 바울을
산 제물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제물이 피 흘려가며 죽어가는 동물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논리를 폅니다

희생 제물의 역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이미 다 해버렷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가 바로 ‘히브리서’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야 너희들이 매년 번거롭게 양이나 염소 끌고 와서
피를 흘리며 드리던 희생 제사 있자나
그거 이제는 필요없어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께서 단번에
흘린 피로 다 해결되었자나

그러니까 이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기만 하면 제사가 되는 것야”

“너희가 할 일은 그저 예수가 가르치셨던 것을
삶 속에서 행하는 것이야 그 뿐이야”

그러니까 바울의 논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위에서 제물이 되어 주셨으니
우리는 그 예수를 대신해서
그가 명하신 일을 하면 된다 라는 논리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예수가 명하신 일이란 이웃사랑을 말합니다
‘이웃 사랑’이란 남을 나처럼 여기는 행위 입니다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즉 내가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율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이것이 곧 오늘 본문의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영적 예배니라
라는 말의 참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이
이 말씀을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삶가운데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병든 자, 고아, 과부, 창녀, 세리 등
사회 각층의 소외되고 외로운 자들을
격리의 대상이나 나와는 상관없는 존재,
나와는 구별된 존재로 보지 말고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기고 (내 몸처럼 여기고, 가족처럼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구체적 실천이
양을 잡고 피를 흘리고 번제를 드리는 희생 제사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예배의 모습이라는 설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보통 이 말씀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이 말씀이
이웃사랑에 대한 실천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전해도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뒤에 나오는 ‘영적 예배’니라 라는 말씀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일상적 삶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영적인 예배에 관한 말씀..
즉 예배는 신령하게, 진지하게, 엄숙하게, 무엇보다
영적으로 드려야 한다 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배할 때에는 마치 제물이 제단위에 바쳐지듯이
온 몸과 정성으로 경건하고도 엄숙하게
예배에 임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세 시대에는 이러한 관점에 따라
예배를 행했습니다

마치 황제 앞에 나서는 노예처럼 예배 참여자들은
몸둘 바를 몰라하며 바들바들 떨면서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있는 예배의 대상을 향해
두렵고도 떨리는 마음으로 예배에 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의 모습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예배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실제로 성경에 쓰인 ‘영적 예배’라는 헬라어가 이를 잘 말해줍니다

영적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로기켄 인데
이 말은 우리가 잘 아는 로고스 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로고스라는 밀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말은 기독교인에게만 익숙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의 헬라인, 즉 그리스인들에게 더욱 친숙한 말이었습니다

그리스는 철학의 본고장이고
철학하면 곧 이성적 사고를 뜻합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이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성은 언어, 즉 말, 말씀, 토론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어로 ‘말하다’ 라는 동사는 ‘레고’ 인데
로고스는 바로 레고, 말하다 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때문에 헬라어 로고스는 원래 이성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그 무엇,
합리적 이성을 가르키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말을 기독교에서 차용하여 사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쓰인 영적 예배니라 했을 때의 영적이란 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라기 보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느낌을 더 많이 가진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이것이 영적 예배이다 라고 했을 때
이 말은
신전에서 엄숙히 희생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영적인 모습보다는

일상에서의 삶 자체가 곧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예배라는
예배에 대한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게 하는 말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 가운데 실천하며 사는 것이
곧 예배의 본질이라는 말씀입니다

참다운 예배란 사랑의 실천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
한 말씀 덧 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사랑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무조건적인 사랑와 용서를 떠 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 위로, 따뜻함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온전함’이나 ‘바르게 함’
더 넓게는 ‘연합’이나 ‘하나’라는 말에 더 가깝습니다

굳이 인간 관계로 설명하자면 성경의 사랑은
손에 사탕을 든 할머니의 사랑이라기 보다는
회초리를 든 어머니의 사랑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할머니의 사랑은
손자의 버릇을 망치기 쉽습니다

반면 지혜로운 어머니의 사랑은
아이가 바르게 자라도록 합니다

아이를 귀여워해주고 싶은 본능적 마음보다
아이가 올바로 커 나가기를 원하는
이성적 결단이 더 앞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날의 교회와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서
성경 속 예수님의 가르침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가려지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봅니다

마치 우리가 영적 예배라는 말을 오해하여
예배의 본질적 모습을 찾지 못하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는 말에 취하여
지혜로운 어머니의 사랑보다는
오냐 오냐 하며
아이가 투정을 부릴 때마다 사탕을 쥐어주는
할머니의 사랑만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기뻐허시는 영적 예배란
교회에 나가 열심히 예배 참석하는 모습도 아니고
주변 모든 사람을 무조건 품어주는 사랑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영적 예배란

내게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싫은 일이고
나에게 좋은 일은 남도 좋아하는 일임을 깨닫는

누가 봐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삶 가운데 실천하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좋은 친구 교회 성도 여러분
날마다의 삶 가운데

내가 대접받고 싶은대로 남을 대접하는…
나와 남을 다르게 여기지 않는 삶을 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를 하는 복된 성도 여러분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