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여호수아 14장 6-12절 ]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여호수아 14:6-12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라는 이 성경구절은 아주 힘이 넘치고, 진취적이고, 신실한 믿음이 느껴지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 구절을 좋아하시는 성도님들이 많을 줄로 압니다. 저 또한 이 구절을 참 좋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이 이 구절을 좋아하는 데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뭔가 평범함을 초월하는 모험심, 불가능하고 어려워 보이는 것을 얻어 내는 성취가 주는 쾌감, 이런 것에 대한 동경심이 작용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좀 들어요. 85세의 노인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다니 참, 대단하지 않나요. 85세면 산지를 점령하는 건 그만두고 산에 올라가는 것도 힘이 들 나이입니다. 놀라운 이야기이죠.
사람들은 이런 놀라운 영웅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극한의 스포츠를 좋아하고 사람들은 뭔가 기적과 같은 이야기를 좋아하지요. 뭔가 역전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좋아하지요.
그렇다면 성경은 갈렙을 통하여 이런 엄청난 반전의 영웅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걸까요. 갈렙은 그저 육체적 한계를 넘어선 그런 사람이었을까요. 갈렙의 이야기는 그러나 영웅적인 반전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85세의 노인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했다고 해서 노인의 육체적인 연약함을 넘어서는 영웅적인 이야기만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갈렙의 이야기는 지루할 정도로 변함없이, 오직 한분을 신뢰하고 믿은, 심지어 고리타분해 보일 정도로 변함없는, 일점 일획도 변함이 없는, 꾸준하고도 뜨거운 믿음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믿음의 뜨거움이 한번도 식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변함없이 꾸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십니까.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태풍이 몰려와도 변함없이, 시련이 오고 아픔이 오고 고통을 겪어도 변함없이 꾸준한 믿음을 갖고 산다는 건 사실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마치 운동선수가 슬럼프에 빠지듯이 믿음의 슬럼프에 빠지기 쉽습니다. 믿음이 지루해 보이고 예배드림에 기쁨이 없고 말씀을 들으며 흘렸던 감동의 눈물은 말라가고 찬양의 가슴 벅찬 은혜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믿음의 슬럼프.
믿기는 믿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아무런 믿음의 기쁨이 없는 신앙의 슬럼프 상태. 하나님을 부정하는 건 아닌데 전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는 마치 전신이 마취된 환자와 같은 믿음의 동면상태에 빠진 성도들이 이 세상에 차고 넘칩니다.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아주 흔하지요.
예수! 그 이름만 들어서는 이제 더 이상 신나지 않고, 예수! 그 분만 생각해서는 별로 감사하지 않은, 뭔가가 더 있어야 하는, 뭔가 그럴듯 하고 뭔가 실제적인 이익이 있고 뭔가 짜릿함이 있어야 그래야 신나고, 그제서야 감사한 성도.
세미한 주님의 음성에는 전혀 반응하지 못하는 믿음의 슬럼프에 깊게 빠져있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래 가지고서야 주님의 기쁨이 되는 주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성경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어나라
깨어나라
굳게 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 중에 누군가 이런 믿음의 슬럼프에 빠져 계십니까. 혹시 우리 중에 누군가 오직 예수로 인해 누리는 기쁨을 잃어 버리셨습니까. 그렇다면 일어나십시오. 그렇다면 깨어나십시오.
그렇다면 이제는 변함없이 뜨거운 믿음으로 주님 앞에 굳게 서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시간은 영원할 것 같지만,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갈렙이라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갈렙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는 않아요. 그래서 갈렙이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는 조금 어려움이 있지요. 하지만 이 짧은 성경구절에서 표현한 갈렙은 변함없이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갈렙이라는 이름의 뜻을 아십니까? 성경에서 이름은 보통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의 사람 갈렙, 이 사람의 이름은 무슨 뜻일까요? “용감한 자” 또는 “늙지 않는 자“ 이런 뜻이었을까요?
갈렙이라는 이름의 뜻은 개입니다. 멍멍짖는 개라는 뜻이죠. 그때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에게 개는 별로 높임을 받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도 좀 그렇죠. 유대인들은 개를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오늘날처럼 애완동물로서 아끼는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개는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 부정한 동물이요, 토한 것을 다시 먹는 형편없이 더러운 동물입니다.
그런데 갈렙의 이름의 뜻은 개입니다. 조금 이상하죠, 뭔 이름이 이럴까요?
저는 출장을 자주 다닙니다. 그런데 저희 집에 개가 한마리 있어요. 아주 덩치가 큰 녀석인데 출장갔다 집에 돌아가면 아주 좋아서 펄쩍펄쩍 뛰고 난리가 납니다. 어떨땐 심지어 미안해요. 너무 반겨주는 거예요. 지난번 출장갔다 왔을때도, 지지난번 출장갔다 왔을때도, 지지지난번 출장갔다 왔을때도 변함없이, 부족함없이 온 힘을 다해서 기뻐하며 주인인 저를 반깁니다. 저럴수 있을까. 저렇게 충성스러울 수 있을까. 내가 그렇게 좋을까. 강아지들이 이런 면이 있습니다.
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갈렙은 영어로 (all) 전부를 의미하는 “갈”과 (Heart) 마음을 의미하는 “렙”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개를 무시하지만 개라는 단어에 “온 마음을 다하여“ 주인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담은겁니다.
갈렙이 그런거예요. 언제나 변함없이, 항상 주 여호와를 사랑하며, 항상 주 여호와를 믿으며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서에 나와있는 본문을 통하여 저는 여러분과 갈렙의 그 믿음을 함께 나누어 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갈렙을 소개하는 본문은 여호수아 앞에 유다지파를 대표해 갈렙이 가나안땅을 분배받기 위해 나오는데 그를 소개한 본문은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 (여호수아 14:6) 이라고 하고 있어요. 이 구절을 놓고 유다지파인 갈렙이 원래는 에돔족속중 하나였던 그니스족속의 후예였는데 유다지파로 흡수됬다는 설과 아니면, 원래부터 갈렙은 유다지파로 유다의 손자였던 그나스의 후예였다는 설로 의견이 갈립니다. 저도 뭐가 맞는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갈렙의 이름이 천한 개를 뜻하는 것을 보면 유대인이 천하게 여긴 이방인의 후손이라는 것이 좀 더 맞는 의견인 것 같습니다. 우리도 예전에 귀한 가문의 도련님을 ‘개똥아’ 라고 부르진 않았잖아요.
조금은 천하게 취급받았을 듯한 갈렙은 그러나 전 이스라엘의 역사에 남을 만한 엄청난 믿음을 보여줬습니다.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여호수아 14:7-8
갈렙이 한 성실한 보고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은 무엇이었습니까? 갈렙은 무슨 일을 했었죠?
여호수아 14장에서 갈렙이 한 이 이야기는 민수기 14장에 나오는 일들을 말하고 있는 거에요. 무슨일이 있었죠? 가나안 정탐꾼 12명중 10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했잖아요. 그 말을 듣고 폭도로 변해버린 이스라엘 군중 앞에서 갈렙과 여호수아가 했던 일들이 민수기 14장에 나옵니다. 갈렙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요.
40일간 정탐하고 온 정탐꾼 중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했어요. ‘못가! 안되! 되는 일이 아니야! 우리가 이길 수 없어! 할 수없어! 끝났어!’ 부정적인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 통곡하며 울부짖으며 하나님의 일꾼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다 그냥 원망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려고 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앞을 여호수아와 갈렙이 막아선겁니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민수기 14:5
하나님의 수많은 기적을 보고, 직접 행한 모세와 아론은 어떻게 했나요, 분노하는 군중앞에 납작히 업드렸습니다. ‘살려주세요… 너무 무서워..’ 두려움이 온몸을 납작하게 눌러버렸어요.
그런데 두 장정이 분노하는 군중을 막아 섭니다. 마치 중국 천안문 사태 때 밀려오는 탱크를 맨 몸으로 막아서는 한 시민 처럼. 대충 잡아도 이백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온 회중의 분노앞에 갈렙과 여호수아가 막아선 겁니다.
2대 이백만입니다.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민수기 14:6-9
갈렙은 지금 45년 전에 있었던 일,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성실과 충성됨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쉬운 일이었을까요?
이백만명의 분노앞에 선다는게 가능한 일일까요? 두명이서 이백만명하고 맞서요. 모세와 아론도 고꾸라졌어요. 납작 엎드렸습니다. 이백만명을 맞서 막는건 그만두고, ’자 앞에 관객이 이백만인데 앞에 올라가 몇마디 해주시겠어요’ 해도 무서워서 못할 거예요.
죽을까봐 땅바닥에 바짝 엎드렸던 모세가 빼꼼이 고개를 들어 갈렙을 바라봅니다. ‘누구지, 잰 누구지? 누군데 저렇게 용감하지? 어떻게 저렇게 용감하지?’
다행이 이 일은 하나님의 중재하심으로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와 갈렙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죠. 그 일 후에 모세가 갈렙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맹세하죠.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여호수아 14:9
갈렙이 모세의 이 약속을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광야 40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보다도 훨씬 젊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더욱 단단해 졌습니다. ‘나만 안죽어.. 다 죽어서 나가떨어지는데 나만 안죽어.. 아, 내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 지는구나’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여호수아 14:10
그리고 그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 오늘 내가 팔십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여호수아 14:10-12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 고꾸라졌던 네피림 후손인 아낙자손들이 있는 곳, 높은 산지 견고한 성읍이 있는 그 곳 그 산지를 갈렙은 자신에게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천한 신분 출신이었을 수도 있는 갈렙, 개라는 이름을 가진 갈렙은 그 시작이 어떠하던간에 이제 가장 높고 가장 고귀한 믿음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위험 앞에서도, 수많은 장애물 앞에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믿음의 정수, 갈렙은 그 믿음을 가졌습니다.
성공, 인생의 성공은 이런게 성공입니다. 무슨 성공을 하고 싶으십니까.. 인간으로서, 피조물로서 최고의 성공은 이런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갈렙은 자신의 믿음대로 아낙자손을 내쫓고 그 산지를 얻어 냅니다. 그 산지의 이름은 헤브론입니다.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릇 아르바입니다. 아르바의 도시라는 뜻이죠. 아르바가 아낙자손 아닙니까. 그러니까 헤브론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장 건장하고 힘이 쏀 아낙자손의 땅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점령하기에 만만한 땅이 아니였죠.
그러나 이 산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그들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산지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또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심지어 이슬람교도에게 조차도 헤브론 산지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곳이지요.
그 곳에는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이주해 자신의 아내 사라를 위해 산 막벨라 동굴이 있어요. 그곳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유해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품은 땅, 믿음의 조상이 누운 안식처, 그 땅이 바로 헤브론인 것입니다.
그곳에서 갈렙이 속해 있던 유다지파의 후손인 다윗이 일어섭니다. 그리고 그가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을 다스리죠. 헤브론은 이렇게 의미있고 소중한 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이 헤브론을 차지했습니까. 누가 이 의미있는 땅, 이 소중한 땅을 차지했습니까. 변치않는, 식지않는 믿음을 가진 갈렙이 그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우리에게 헤브론은 무엇입니까. 영원한 안식처, 의미있고 소중한 땅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천국이지요. 그렇다면 누가 이 소중하고 의미있는 땅을 얻을까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믿음,
켜져있는지 꺼져있는지 도무지 구분이 안되는 믿음,
시들시들한 믿음,
말라 비틀어진 믿음을 가지고서야 이 산지는 그만두고 저 평지라도 얻겠습니까.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된다, 이길 수 있다, 얻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며 담대히 나섰던 갈렙과 같이 뚜렷하고도 뜨거운 믿음, 변함없이 꾸준한 믿음, 흔들림이 없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가장 소중한 땅, 영원한 안식처, 천국을 넉넉히 얻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