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표 목사
[ 마태복음 5:1-6 ]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태복음 5:1-6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오늘도 지난 시간과 같이 예수님의 팔복 중 네 번째 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네 번째 복은 배부를 것이라고 하시는 이 배부름의 의미를 새겨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배부름을 우리 기준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앞에 나오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배부름의 첫 번째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첫 번째 의미는 무엇이지요? 그것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우리 육신에 필요한 배부름입니다. 하나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먹이고 입히시듯,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적당한 양과 때에 맞춰 주심으로 우리를 배부르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배부름에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하나님께 무언가를 더 채워달라고 합니다.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알랭 드 보통이라는 철학자의 글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인들은 상대적 빈곤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상대적 빈곤을 극복하지 못하면, 팔복의 네 번째 복으로 주시는 육신의 배부름을 제대로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배부름의 두 번째 의미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의미
이 말씀은 ‘의를 위하여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배부름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이 주리고 목마른 상태를 두 글자로 표현하면 무엇일까요? 바로 ‘가난’입니다. 그렇다면 ‘의를 위하여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의를 위하여 가난한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의를 위하여 가난한 삶을 산다고 했으니, 그 삶은 곧 의를 위하여 이 땅의 배부름을 포기하는 삶이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팔복의 네 번째 복인 배부름의 의미에는 이 땅에서 누리는 배부름과는 다른 또 다른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배부름의 두 번째 의미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팔복의 네 번째 복인 배부름은 이 땅의 삶에서 누리는 육신의 배부름보다 더 궁극적인 배부름, 즉 천국에서 누리는 영원한 배부름을 의미합니다.
- 의를 위하여 가난하게 사는 삶을 우리 현실에 적용할 때, 이것은 선택의 문제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가난함도 기꺼이 감수할 것이냐, 아니면 가난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포기할 것이냐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사는 삶이 무조건 가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무조건 죄가 되겠지요. 하지만, 오늘 말씀은 절대 그 점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부자로 만들어주신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게 하시기 위해, 여러 족장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부자로 만드셨고, 다윗과 솔로몬도 부자로 만드셨습니다. 욥도 처음에는 부자였다가 고난을 당하여 모든 잃은 다음에는 다시 하나님께서 부자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렇지요? 부자로 사는 것이 절대 죄는 아닙니다.
- 그러면 ‘의에 주리고 목마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말씀의 초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삶의 어떤 한 순간에, 하나님의 의와 편안하고 부유한 삶을 두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편안하고 부유한 삶을 포기하고 차라리 가난을 선택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와 경제적인 이익 앞에서 하나님의 의를 선택하기가 쉬울까요? 이것은 참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에서 느끼는 상대적 빈곤감은 늘 우리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얻고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경우에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점을 들어, 복음서에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기도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아마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자신의 물질을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돈이 최고라고 여기는 물질숭배사상과 물질만능주의의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있습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 몇 장 있습니다.
- 의로운 삶보다 돈을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들
1) 어느 만화가의 SNS 게시 글 (그림 1)
이 사진은 한국에서 활동하는 어떤 만화가가 자신의 SNS에 올린 것입니다. 불과 100년 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난과 고통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엄청난 돈과 땅을 대가로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가 되었고, 반면에 어떤 이들은 재산과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지키는 독립운동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일파의 후손들은 지금도 큰 집에 부자로 살고 있고, 반면에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아직도 쓰러져 가는 집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화가의 말처럼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열심히 산 것이고,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그냥 대충 산 것일까요?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의로움 보다는 물질 즉, 편안하고 부유한 삶을 선택한 것이고,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의로운 삶을 위하여 기꺼이 가난한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 만화가는 지금 부자이냐 가난하냐를 가지고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삶을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친일파의 불의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기도 합니다. 바로 돈이 최고라는 물질숭배사상, 물질만능주의를 따르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만연한 이러한 물질숭배사상과 물질만능주의, 그저 돈이 최고라는 생각은 가난을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비하하기도 합니다.
2) 어느 유튜버의 가난 비하(그림 2. 그림 3, 그림 4)
이 사진들은 어떤 유튜버의 홍보 영상을 캡쳐한 것입니다. 가난이 죄이고 정신병이라니요.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이 강사가 정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돈이 최고라는 사상에 찌들지 않고서야,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삶의 가치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돈의 많고 적음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가난이 죄이며 정신병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우리들도 정작 의를 위하여 가난을 선택할 것이냐, 의를 버리고 돈을 선택하느냐의 상황에 놓인다면, 선뜻 가난을 선택하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악한 본성은 천국의 영원한 배부름보다는 이 땅의 배부름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은 6장은 배부름의 이 두 번째 의미를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럼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 땅의 배부름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이 땅의 배부름에 집착하는 사람들
[요한복음 6:26-27, 48-51, 66-67]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한복음 6:26-27, 48-51, 66-67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 이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표적 사건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남자 어른만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겨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자신들의 이 땅의 배부름을 채워주실 존재로 여기고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이 배를 타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랍비여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답과 가르침의 일부가 우리가 방금 읽은 말씀입니다. 26, 27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이 땅의 배부름을 위해 예수님을 찾은 것임을 지적하시면서 썩을 양식 즉 이 땅의 배부름을 주는 양식이 아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바로 팔복의 네 번째 복,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얻게 될 배부름을 주는 양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먼 옛날 모세 시대에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같은 표적을 달라고 합니다. 출애굽 하던 때에 조상들의 육신의 배고픔을 채웠던 만나와 같은 양식을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9절에서 만나를 언급하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만나가 주는 배부름은 금방 사라지는 배부름이었습니다. 이 땅의 배부름은 양식을 먹고 나면 다시 배가 고파지기 때문에 무언가를 계속해서 먹어야 합니다. 나아가 그 배부름은 결국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배부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7절에서 그것을 썩을 양식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썩을 양식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영생하게 하는 양식, 즉 한 번 먹으면 다시 배고프지 않을 양식을 위하여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48절에서 자신이 바로 생명의 떡이라고 가르치시면서 51절에서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팔복의 네 번째 복,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누리게 될 배부름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누리게 될 천국의 영원한 배부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주는 배부름을 깨닫지 못하고 이 땅의 배부름을 채워줄 만나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66절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서 누릴 이 영원한 배부름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그때부터…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곁에는 열 두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67절에서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기 위한 조건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은 우리에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는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배부름의 두 번째 의미, 즉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배부름의 가치를 깨닫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의 배부름에 집착하는 한, 가난은 불행입니다. 가난은 부끄러움이며, 대충 산 것이 되며, 심지어 가난은 죄이며 정신병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배부름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의를 위하여 기꺼이 가난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의를 위하여 가난을 선택한 사람의 고백
성경에 의를 위하여 기꺼이 가난을 선택한 사람의 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그런 고백을 했을까요? [빌립보서 4:11-13]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립보서 4:11-13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일평생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이 땅의 배고픔과 배부름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필요할 때는 기꺼이 주리고 목마르게 사는 삶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배부름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13절에서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이 참 인상적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그가 주님께 받은 능력은 의를 위하여 때로는 가난하게 사는 것과 가난할 수 있는 능력도 포함이 됩니다. 천국의 영원한 배부름을 소망으로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가난은 불행이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능력이 됩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기도를 해 본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 가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 팔복의 네 번째 복을 받기 위하여
우리는 남은 생을 사는 내내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먹고 마실 것과 입을 것과 잠 잘 곳을 고민해야 하고, 나와 가족들의 건강과 편안한 삶을 위해 필요한 돈을 고민해야 하고, 남은 여생에 대한 노후대비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고민하며 계획을 세우며 살아갑니다. 그런 계획들 자체가 불신앙은 절대 아닙니다. 단, 팔복의 네 번째 복을 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계획을 세우면서, 혹시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모두 채워주셨는데,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혹 내가 천국의 영원한 배부름에 소망을 두기 보다는 이 땅의 배부름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은 소홀히 하고 이 땅에서 주리고 목마르지 않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의를 위하여 기꺼이 가난할 수 있는 능력으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