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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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5장 1-6절 ]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복음 5:1-6

오늘 나눌 말씀은 예수님의 팔복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6절 말씀을 중심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받는 복에 대해 나누겠습니다.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무엇인가?

자신이 심령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은 사람은 그 원인이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데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에 애통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그 죄를 용서하심으로 다시 곁으로 불러주십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은혜로 받은 사람은 자신을 용서함으로 죄책감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그 마음은 이제 비로소 다른 사람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 그 정체성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의롭게 된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의로움’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됩니다. 본문 6절의 말씀은 이런 사람이 받는 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의’는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첫째, 심판 아래에 있는 죄인인 우리를 구원받은 의인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임금이 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빚을 아무 대가없이 탕감해 주고 그를 풀어주었듯이, 우리의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아무 대가없이 씻어주시고 죄인인 우리를 의인으로 삼아주시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의인이 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올바름. 즉 사회적인 정의입니다.

  • 팔복의 네 번째 복과 현실에는 괴리감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의’를 위하여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배부름의 복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복은 우리 삶과 매우 가깝게 연결돼 있습니다. 배부름은 먹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네 번째 복은, 의를 위하여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의를 위하여 살려고 노력하면서도 먹고 사는 문제로 매일 고민하고 염려합니다. 우리는 늘 부족함을 느끼며, 무언가 더 채워야 할 것 같은 허기를 느끼며 살아갑니다. 경건한 신앙인들도 이러한 먹고 사는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불의한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사는 것을 흔하게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볼 때, 정말 그럴까라는 의문이 들면서, 말씀과 현실 사이에서 어딘가 서로 맞지 않는 것 같은 괴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괴리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배부름의 의미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배부름의 의미를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중 한 가지를 살펴보고 나머지 한 가지는 다음 시간에 나누겠습니다.

  • 배부름의 의미

(1) 하나님의 배부름과 우리가 원하는 배부름은 다를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배부름
하나님께서 팔복에서 말씀하시는 배부름에는 필요한 것을, 필요할 때에, 필요한 만큼 채워주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25-33]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25-33

마지막 33절 말씀을 보면 팔복의 네 번째 복과 비슷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신다고 하실 때, ‘이 모든 것’은 무엇지요? 31절을 보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배부르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배부름을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주십니다. 25절부터 보면 공중의 새가 나오고, 들의 백합화가 나오고,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와 들풀을 배부르게 하시는 것과 같이 너희들을 배부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와 들풀을 어떻게 먹이고 입히실까요? 하나님은 그것들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할 때에, 필요한 만큼 먹이고 입히시면서 각자의 생을 살게 하시고 때가 되면 거두어가십니다. 그래서 동식물은 과식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배부름입니다.

  • 우리가 원하는 배부름

반면에 사람은 어떻습니까? 사람은 과식하기를 좋아해서,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 배가 부르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좀 다른 기준으로 배부름을 판단합니다. 우리는 우리 기준의 배부름을 위해서 필요 없는 것까지 하나님께 구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도 구하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달라고 구합니다. 왜 그렇지요? 더 많이 먹어야 배부르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것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아직 부족하다’, ‘아직 배고프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할 때에 필요한 만큼 주셔도 우리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팔복의 네 번째 복에 대한 말씀을 대하면서 이 말씀과 우리 현실 사이에 괴리감을 느낀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배부름의 기준이 이런 것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 우리는 왜 하나님의 배부름에 만족하지 못할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보다는 상대적 빈곤을 더 많이 느끼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랭 드 보통이라는 스위스 출신 철학자가 쓰는 ‘불안’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조상’은 과거 신분제 사회를 말합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출신 신분에 의해 결정이 되기 때문에 내 노력과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 이웃들과 비슷한 수준의 삶을 살아갑니다. 때문에 상대적인 빈곤을 많이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근대 사회에 접어들면서 신분 계급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평가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회적 지위 상승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런 사회 환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꿈꾸고 기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남과 자신을 더 많이 비교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기대한 것을 이루지 못할 때, 그래서 남들과 비교해서 자신이 그들보다 적게 가졌다는 생각이 들 때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자신을 불행하다 여기며,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근대 사회는 물질문명의 발달로 과거보다도 훨씬 먹을 것, 입을 것이 풍부함에도 사람들은 과거보다 심리적으로 더 많은 빈곤과 배고픔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빈곤을 상대적 빈곤이라고 하지요.
이러한 사회에 사는 우리들도 얼마든지 상대적 빈곤에 우리 마음을 빼앗겨 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할 때에, 필요한 만큼 주심으로 배부르게 하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배고픈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마시고, 더 좋은 것을 입기 위해서 의를 위하여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도 중단하게 됩니다.

  • 하나님의 배부름을 느끼는 방법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는 마음, 즉,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꾸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을 끊어내야 합니다. 공중의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가 다른 새나 다른 꽃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나는 왜 이리 못나고 부족할까라는 생각에, 하나님께 더 많은 것을 달라고 요구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공중의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 그대로 자유롭게, 또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만으로도 공중의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는 만족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았던 사도 바울은 빌 4장에서 자신이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도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한 달 치 또는 일 년 치 양식을 미리 당겨서 달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필요할 때마다 먹이시고 입히시니, 우리들도 그때그때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이며, 바로 그것을 달라고 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에 만족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얼마든지 자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보면 비로소 하나님의 배부름이 느껴지고, 예수님의 팔복의 네 번째 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팔복의 네 번째 복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네 번째 복을 깨닫기 위해서는 배부름에 대한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배부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에 만족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배부름입니다. 그 배부름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가 평생 누리며 사는 배부름입니다. 이 배부름은 우리가 상대적 빈곤에서 벗어나면, 지금 이 순간 당장이라도 느낄 수 있는 배부름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배부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의 배부름으로 행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