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엽 목사

이동엽 목사

[ 마가복음 1장 15절 ]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15

<왜 믿으라고 했을까?>

왜 복음을 믿으라 라고 했을까요?

복음이라하면 기쁜 소식인데 이것을
들어라.. 기뻐하고 누려라. .. 해야 하는데

왜 믿어라 했을까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을 뿐
아직 완전히 오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안에 있을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다 하더라도
아직 그 안에 있지 못하다면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믿음이라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치 처음 보는 어떤 음식이 있는데
그 맛이 어떤지를 맛 보려면, 누리려면
용기를 내어서 한입 먹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아무리 음식이 코앞에 가까이 있어도
내가 먹지 않으면 맛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음식의 맛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음식이 맛이 있다고, 비싸 보이지만 공짜라고
이야기 해주는 기쁜 소식을
먼저 믿어야 하는 것이죠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가 >

어째든 예수는 지금 복음을,
기쁜 소식을 무리에게 전하며
믿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가 이스라엘 군중에게 믿으라고 전한
기쁜 소식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그 내용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기쁜 소식은 맥락에 따라…
기쁜 소식을 듣고있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기쁜 소식.. 밥먹어라 밥 사줄께
벌 서고 있는 사람.. 그만 팔내려
감방에 있는 사람에겐… 너 석방이야
짝 사랑.. 니 맘 받아줄게. 나도 사실은 너 좋아해
식민지 배성에게. 해방, 구원이 기쁜 소식
로마제국의 식민지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란
민족의 해방, 독립이 멀지 않았다.. 등의 말이었을 것입니다

독립, 해방은 억압으로부터의 벗어남을 뜻합니다.
곧 자유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음(기쁜 소식)이란
억압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
해방, 구원, 즉’자유’에 관한 말씀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제 곧 누구나 ‘자유로움’을 얻게 될 것임을,
그 기쁜 소삭을
믿으라고 선포하고 계신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실제로 누가복음 4장은 예수님의 첫 설교가
억눌린 자의 자유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기록한)
구약 성경 구절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쁜 소식은 자유 : 주체로서 서는 것>

우리는 누구나 자유를 꿈꿉니다
그런데 이 자유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낭만적이거나 기분 좋은 말만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자유는
신체적 자유(장애인이 원하는)나 혹은

그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그러한 자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고
그런 방종을 방치하면 사회악이 되고 말것입니다

사실 자유는 무거운 주제입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또 하나의 커다란 주제인)
사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 또한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것처럼
달달하거나, 가슴 뜨겁거나 혹은
가슴 시린, 그런 감정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도 포기한다지만
경우에 따라서 그런 왜곡된 사랑은
끔찍한 스토킹이 될 수 도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사랑이나 자유의 개념은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그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는 것이나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사랑이나 자유는
‘주체로서 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주체로서 행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만이
자신이 행한 일에 기꺼이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이 주체로서 서는 행위입니다

여자들이 마마 보이를 싫어 하는 것은
마마 보이는 주체로서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 너랑 결혼하지 말래..)

‘자유’ 나 ‘사랑’ 의 뜻이
‘주체로서 서는 것’이라는 말의 뜻이
잘 이해가 안된다면

그 이유는 참다운 자유와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달달한 믹스커피의 맛에 길들여진 사람은
원두를 갈아만든 쌉쌀한 블랙 커피를 즐기기 힘듭니다
경험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믹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잘못됬고
블랙 커피 마시는 사람이 옳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미국에 온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블랙 커피보다는 믹스 커피가 더 맛있습니다
그 맛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주체로서 서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을 지기 보다는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기 보다는

늘 남의 결정과 판단을
그저 따르거나, 혹은 비판합니다

그게 훨씬 안전하고 편합니다
훨씬 쉽고도, 훨씬 더 돋 보일 수 있습니다

도전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유를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편한하게…
마음껏 하는 것으로 여기는 한 우리는
참다운 자유를 맛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겐 자유가 너무나 버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주인이 주는 따뜻한 밥에 길들여진 애완 동물에겐
야생의 자유가 달갑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말은 애완 동물의 삶이 틀렸다거나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길들여진 애완 동물에게는
야생의 자유가 버거울 뿐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책임이 따르는 자유보다는
배부르고 등 따뜻한 편안한 삶을 원할 수 도 있습니다
쌉쌀하고 번거로운 원두 커피보다는 저처럼
달달하고 간편한 믹스커피를 더 좋아 할수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배부르고 등 따뜻한 상황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목줄이 없고 주인에게 애교 부릴 필요도 없는
자유를 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믹스 커피를 머시면서 건강해지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런 것을 일컬어 욕심이라고 부릅니다

아이가 공부도 안하고 맨날 게임만 하면서
전교 1등을 하기 원하는 것이 욕심입니다

시험 공부 하나도 안하고
하나님께 시험 잘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그런 기도는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해주시지 않습니다

참다운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란
참다운 복음을 누리는 사람이란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그 선택의 결과에 만족해 하는 사람입니다
그 선택에 대한 후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책임과 희생이 배제된 사랑은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단지 내가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
사랑이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상대에 대한 책임을 다할 때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가 없고 만족해 힐때
비로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자면
복음이란 자유를 선포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 자유란
‘주체로서 서는 것’ 을 의미합니다

즉 책임을 동반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떠하든간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만족해 하며
기쁨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는 말의 뜻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을 누린다는 것은,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그리 낭만적인 일만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참된 자유를 선포하시면서
당시에 백성들의 자유를 억누르고 있었던
율법을 (바리새인들의 성경 해석을)
전통이 아닌, 예수 자신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옛 성경에 이르되 이러이러 .. 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저러저러 하다고 달리 가르친다… 산상수훈의 요점들)

그러나 사람들은
끝내 그 자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옛 전통과 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 주체로서 서라는 …
예수의 가르침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전한 복음,
예수가 전한 자유는
십자가를 통해 더욱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스스로가 바로 그 십자가에서
참된 ‘자유’를 누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선택했고
그 결과를 후회없이,
‘다 이루었다’고 만족해 하며
그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지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 자유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유는
십자가 정도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도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름아닌
복음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말은 단순히
종교 지도자들을 믿고 따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뜻) 말씀처럼
내 안의 성령 하나님과 함께
(종교 지도자, 제사장, 목사를 통하지 않고)
내가 주체로서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예수께서 선포하신 자유와 구원은,
복음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누르고 있었던)

종교적 전통과 율법으로부터의 구원이았고
동시에
산헤드린 공의회, 종교 지도자들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의 구원이었던 셈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기쁜 소식은

이제는 더이상 우리를 옭아 매고 있는
낡은 권위와 관습과
남들의 시선과 판단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입니다

그러한 사회적 제도적 억압으로부터의 구원이
가장 1차원적 의미로서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너무 부담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예수와 함께 지는 멍에는 무겁지만
자유라는 멍에는 무겁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것
오히려 그 멍에를 메면 쉼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는 복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주체로서 책임을 가지고 누려야 하는
수준 높은 것임을 깨닫고

예수의 제자로서 수준 높은
자유를 누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