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엽목사

이동엽 목사

[ 시편 63장 3-4절 ]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시편 63:3-4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 후
단 한주도 거르지 않고 매주 예배를 했다.

물론 30년이 넘도록 예배에 참석하면서
기쁨과 감격에 찬 순간들이 많았지만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창 뜨거웠던 초창기 시절을 제외하면
거의 습관적으로 주일 예배 시간을 지켜왔던 경우가
그렇지 않은 때보다 더 많았던 것 같다.

목사가 된 이후로도 그리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설교 준비와 목회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솔직한 고백이다.

물론 모든 예배 시간이 그러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기쁨과 감격에 찬 예배 시간 못지않게
그렇지 못한 시간도 많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는 한 동안 예배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물론 신학교에서 예배론에 대해 정식으로 배우기도 했고
예배와 목숨을 바꾼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지만..

정작 예배란 무엇이며,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가슴으로부터 동의할 만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저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그러하듯이
습관적으로 주일이면 예배 시간에 참석했다.

마치 눈뜨면 학교 가는 것이 당연한 학생들처럼 말이다.

우리가 주일 오전 정해진 시간에 (대개는 오전 11시..)
예배당에 모여 행하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예배 의식(ceremony)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예배는
주일 오전 11시에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예식, 의식’으로서의 예배는
‘주일’이라는 특정한 시간을 반드시 필요로
하기도 한다.

나에게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
셍떽쥐뻬리의 어린 왕자라는 책이다

이책은 내용이 동화스럽고
삽입된 그림도 예뻐서 어린아이들도 좋아하지만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이 아니다.

오히려 동화처럼 쓴 철학책에 가깝다

나는 이 책을 참 좋아한다.
그동안 아마 대여섯 번은 넘게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을 때마다 다가오는 부분이 달랐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초반에 나오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이야기라든지
무릎 높이에 오는 화산 이야기, 혹은
너무 빨리 자라서 없애지 않으면 조그만 별을
산산조각 낼 수도 있다는 바오밥 나무 이야기가
나의 어린 동심을 흔들어 놓았었다.

그러다 어른이 되어 사람들과의 관계에
이리저리 치일 때가 많아지게 되자
이 책속의 어린왕자와 장미와의 이야기가
눈에 띄게 되었다

보통은 이 부분을 어린 왕자와 장미와의
사랑이야기로 본다

그러나 어린 왕자와
그 별에 하나뿐인 장미꽃과의 스토리는

단순한 러브스토리 라기보다는
관계에 관한 메시지이다

작은 별을 떠나 지구에 도착한 어린 왕자는
자신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꽃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구별 어느 정원에서 5천 송이가 넘는 장미를 발견하고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장미가
그저 평범한 장미 한 송이 였음을 알고는

풀 숲에 엎드려 슬프게 운다

이때 사막의 여우가 나타나
울고 있는 어린 왕자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114
너의 장미가 너에게 그토록 중요한 것은
네가 장미에게 들인 시간 때문이야.”

나는 이 부분을 읽고서
사랑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나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설명하는 문장이 또 있을까 싶었다.

5천송이의 장미 때문에 우울해진
어린 왕자는 자신은 지금 몹씨 슬프니 친구 하자고 여우에게 말 한다.

그러나 여우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여우는 말한다.
우리는 길들인 것들만을
알 수 있다고.

어린 왕자는 ‘도대체 길들인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길들인 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여우는 답한다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어린 왕자가 묻자 여우는 또다시 이야기 한다

‘그래 지금 너는 나에게 수 많은 아이와 다름없는 작은 소년에 지나지 않아
난 네가 필요하지 않고 물론 너도 내가 필요하지 않지
나도 너에게 수 많은 여우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 다면 우리는 서로 필요한 존재가 되는 거야
나한테 너라는 존재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거고
너한테 나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되는 거니까’

지금 셍떽쥐뻬리라는 작가는
여우의 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사랑에 대해
관계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가 되어달라고 하는 어린 왕자에게
서로 길들여지지 않으면 친구가 될수 없고
길들여진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인데
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서로에게 들인 시간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함께 함으로써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서로에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내심이 필요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대로 있어.
말은 수많은 오해의 원인이 되거든..”
“매일 같은 시각에 오는 게 좋을 거야.
만일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4시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중략)
“그런데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언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잖아.
그래서 ‘의식'(세레모니)이 필요한 거야”
의식이 뭐냐고 묻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답한다.

“의식이라는 것은
어느 날을 평소와 다르게,
어느 시간을 평소의 시간보다
특별하게 만드는 거야.”

바로 이 부분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의식’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우쳐주고 있었다.
여우가 설명하는 ‘의식’의 의미는 너무도 자명했다.

설레임이다.

“만일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4시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여우는 밀밭과 아무 상관이 없지만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 왕자와 관계를 맺게 되면
그 순간부터 여우는
밀밭의 황금 빛 출렁임에도
설레게 된다고 말한다.

예배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
혼돈스러워했던 나에게
여우의 이 말은 마치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왔다.

물론 각 교단마다 저마다의 예배의 정의가 있고
그 중요성과 당위성에 대해
나름의 근거와 주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목말라했던 것은
그러한 신학적/교리적/이성적 설명이 아니라
가슴으로 동의할 수 있는
예배의 의미였다.

예배 때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왜 그 시간을 지키는 것이 목숨과도 바꿀 가치가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그 답에 대한
마음속 깊은 동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여우의 대답으로부터 깨닫게 된
예배의 의미는 ‘관계’였다.

예배라는 의식은 단순한 예식의 의미를 넘어서
예배하는 대상에 대한 설렘을 품고 있을 때에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예배하는 대상과의 관계가
예배 의식의 본질적인 측면이라는 것이다.

< 예배는 관계에 관한 것 >

기독교인이란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관계가 너무도 중요해서
자신의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주일 오전의 예배 시간은
그 특별한 대상과의 약속된 시간이며
그 관계를 확인하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소 주일 전날에는 마음이 설레어야 한다.

이것이 너무 심하다면
최소한 주일 오전 예배 30분 전부터라도
마음가짐이라고 달라져야 한다.
관계를 맺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 예배 시간에는 과연 어떤 깨우침이 있을까?
어떤 은혜가 있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배당 풍경은 이런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대개는 예배당 문이 닫히기 직전에
허겁지겁 들어서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마치 마라톤 선수가 파이널 선 끊듯이
닫히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와 안도의 숨을 내 쉬며

“아직 설교 전이네..” 하며 안도하는 모습은
주일 오전이면 어느 교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예배에는 반드시 성도 간의 교제가 있어야 한다.
삶의 나눔이 있어야 한다.
함께하는 시간에 대한 설레임과 기대가 있어야 한자

그래야 참된 교회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다.
그저 설교 말씀 듣고 은혜받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라는 소리다.

우리는 예배 자체를 예배해서는 안된다.
(주일 오전) 의식으로서의 예배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위한
하나의 도구요 수단일 뿐이다.

우상 숭배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도구와 수단을 본질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예배를 강조하는 것이
우상 숭배와 무슨 관계가 있겠나 싶겠지만

성경의 대표적인 우상숭배 사건이었던
아론의 금송아지 숭배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면,

아론은 금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이라 부르며
자기 나름대로의 예배를 행했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예배의 본질은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의식을 행하게 되면 어느 평범한 시간이 특별한 시간으로 변하게 된다.
그 특별한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관계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의식이다.
예배 시간을 통해 주일 오전의 평범한 시간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시간으로 변하게 된다.
우리는 그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친구와의 약속시간이 그렇고
사랑하는 연인과의 데이트 시간이 그렇다.

약속을 정한 후 정작 만나서 하는 것은 별것 없다.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함께 밥도 먹고 그동안 쌓인 이야기도 하고
그저 함께하는 시간을 즐긴다.. 관계를 쌓아간다.

그러나
정작 행복한 시간은 약속시간까지 기다림의 시간이다
그 약속시간이 다가올수록 설레임이 커진다.
무슨 옷을 입고 나갈까?
어떤 말을 나눌까? 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설레는 시간 자체가 행복한 시간이고 의미 있는 시간이다.

오늘 성경 본문은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고 노래한다
우리의 예배 시간이 바로 그러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