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목사

이인엽 목사

[ 출애굽기 3장 9-11절 ]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애굽기 3:9-11

요셉의 출세와 용서를 통하여 야곱과 그 자녀들은 기근을 피해  애굽 땅에 정착할수 있었습니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와 애굽에 정착한 이들은 요셉을 제외하고 모두 칠십 명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5). 처음 그들이 애굽땅에 정착할 때는 분위기가 좋았어요. 기근을 면하게 한 능력있는 총리의 가족을 누가 무시했겠습니까. 그들은 애굽이라는 강력한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성장해 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인큐베이터 (부화기) 같은 안전한 애굽 땅이 아닌 가나안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가나안 땅의 여러 부족들과 수도 없는 갈등과 전쟁을 거쳐야 했을겁니다. 자신들이 터를 잡을 만한 충분한 땅도 없이 외지에서 들어온 이들이 번창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여년 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한 가족의 규모를 넘어서 한 민족으로서 성장해 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출애굽기 1:7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전한 애굽 땅에서 매우 번성해 갔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복된 상황은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애굽을 다스리는 왕조가 바뀐 겁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출애굽기 1:8

원래 이스라엘의 가족들을 지원한 왕조는 힉소스 왕조였습니다. 힉소스라는 말은 ‘외국에서 온 지배자’ 라는 말인데, 이 왕조는 본토 애굽의 북동쪽으로 부터 쳐들어와서 애굽을 점령하고 다스리던 왕조였어요.

요셉이 워낙 뛰어나기도 했지만, 힉소스 왕조도 원래 외부로부터 애굽으로 들어온 왕조이다 보니 비슷한 처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욱 환대하게 되었던 거죠.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300여년 정도 살았을 무렵, 이들에게 우호적이던 힉소스 왕조는 애굽 본토 세력인 투트모세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그리고 힉소스와 우호적으로 지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까지 그 불똥이 튄거죠.

이 새 왕조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위험한 존재였던 겁니다. 경계하게 된 것이 당연했습니다. 핍박하는게 당연했던 겁니다. 자신들의 적이었던 힉소스 왕조와 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애굽을 통치했던 이전 이방 세력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학살을 시키지 않은게 오히려 다행인 상황이었을 겁니다.

이렇게 새롭게 시작한 애굽 왕조는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노예처럼 다루며 힘든 일을 시키기 시작한 겁니다. 평안한 번영의 시간이 가고 고통과 고단함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애굽왕조의 핍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이를 받는 산파를 시켜서 남자아이들은 출생하는 대로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명령이 잘 시행되지 않자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출애굽기 1:22

모세가 태어난 때는 바로 이런 때 였습니다. 레위지파였던 모세는 아버지인 아므람과 아므람의 고모인 동시에 아내인 요게벳 사이에서 아론의 동생으로 태어 났습니다. 모세는 탄생과 동시에 죽임을 당할 위기에 서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종종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나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세상의 어떤 힘도, 어떤 권세도 능가하시는 하나님, 초현실적인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

그런데 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다윗은 그 어려운 시간을 견뎌야 했고, 선지자들은 죽어 나가 떨어져 갔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힘들게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했을까?

그냥 흔히 쓰는 말대로 ‘한방’에 해결하지 않으시고 어떤 때는 수십년, 어떤 때는 수백년에 걸쳐서 일을 이루어 가시는 걸까요. 출애굽만 해도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한숨 푹 자고 일어났더니 고통 받던 애굽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평지로 이동해 왔더라..’ 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그럴까요. 왜 성도의 삶은 그렇게 시련이 많고, 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이렇게 고단하고, 왜 성화의 과정은 이렇게 험난한 걸까요. 왜, 이 모든 것들은 한방에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기적과 같은 강렬한 경험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보다 ‘아.. 지금 이 일이 하나님이 하신 건가? 아니면 그냥 우연인가?’ 하는 경험들을  훨씬 많이 겪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한 한방,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한 뚜렷한 기적, 항상 그런 일만 일어난다면 누가 하나님을 부정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역사하지 않으실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중요한 한가지 이유는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좋아하는 그 한방을 하나님은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출애굽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어마어마한 기적을 일으키시지만, 그러나 그 출애굽의 선봉에 서 있던 모세의 양육은 그렇게 엄청난 기적을 사용하셔서 하루 아침에 이루시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온 민족을 구할 만한 엄청난 능력이 생겼다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민족의 지도자가 된 모세를 아주 긴 시간을 들여서 양육하시죠. 모세는 낳자 마자 죽어야 하는 히브리 사람의 남자아이였어요. 하지만 그 죽음 앞에서 다른 히브리 엄마와 달리 모세의 엄마인 요게벳은 그렇게 쉽게 모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갈대상자를 가져다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여 물이 새어들지 않도록 아기를 위한 조그만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거기에 누이고 나일강가 갈대 사이에 두었죠. 별것 아니어 보이는 요게벳의 행동은 그러나 목숨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 할 수 있는 선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 자녀의 목숨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거는 담대함이 모세에게 전해지지 않았을리 없습니다.

이러한 요게벳을 통하여 모세는 어린시절 양육을 받지요. 요게벳의 기본적인 성향과 성품이 모세에게 녹아들어가 그의 평생의 인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후에 모세는 바로의 딸 핫셉수트에 의해 성장하게 됩니다. 애굽의 역사를 보면 모세의 양 어머니였던 핫셉수트는 그냥 수많은 공주 중의 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핫셉수트는 무려 21년이나 실질적으로 애굽을 통치한 여왕과도 같은 사람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모세를 제외하고 직접 낳은 아들이 없었어요.

그렇다면 모세의 위치는 어땠을까요. 애굽의 궁 안에서 모세는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요. 모세가 받았을 교육은 애굽의 왕이 되는 교육이었습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문물을 자랑하는 애굽, 당시 마치 신과 동일시되는 왕권, 그 안에서 어쩌면 왕이 될 수도 있는 모세가 받았을 교육의 수준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렇게 키우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방법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양육방법은 우리가 어디서 많이 본것 같지 않습니까?

어느 넉넉한 집안에 산모가 있어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태교를 위하여 클래식 음악을 듣고요. 아이의 선한 인성을 위해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으려고 노력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의 성격을 위하여, 두뇌 발달을 위하여 세상의 좋은 것들을 열심히 찾아 아이를 양육시킵니다. 그리고 아이가 조금 크면 일찌감치 조기유학을 시켜서 견문을 넓혀 주지요.

하나님이 모세를 양육한것이나, 오늘날 자녀를 사랑하는 적극적인 부모가 어떻게 해서든지 더 좋은 것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나 별로 다를 게 없어보입니다.

모세는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졌어요. 모세는 가장 높은 자리에 서있었습니다. 모세는 남들은 상상도 못하고 보통 히브리인들은 맛보지도 못할 최고의 것을 갖았습니다. 이런 모세가 지금 당장 애굽의 왕이 된다 해도 아무것도 부족할 것은 없었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자라나 훌륭한 인성을 가지고 수준 높은 교육과 남들이 접하지 못한 깊고 넓은 안목을 지닌 사람들에게 무엇을 맡긴 들 못하겠습니까. 기업을 맡긴 들, 나라를 맡긴 들 뭘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훌륭하게 교육받은 모세에게 아무 것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모세에게 맡기신 것은 자신의 것도 아닌 장인 이드로의 양떼 였습니다. 애굽을 다스리고도 남을 능력을 가진 모세에게 이드로의 양떼를 맡기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양육과는 다른 하나님의 양육법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사람들을 키우고 쓰는 사람의 방법과는 다른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영보다는 육이 훨씬 강한 우리의 생각으로는 모세가 40세 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가나안으로 나간다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에 그런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세상을 움직일 능력과 힘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 서있던 모세, 어쩌면 금시 애굽의 왕이라도 될 것 같았던 모세는 일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혈기 왕성했던 레위의 피를 이어받은 탓이었을까요. 모세는 핍박받는 히브리인을 위해 살인을 저지릅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출애굽기 2:11-12

그러나 감춘 것은 드러나게 되고 바로는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 당시 왕권이 아주 강했던 시대에 왕자가 사람 하나 죽였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갈 만큼 큰 일이었을까요. 그 일은 얼마든지 수습이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든든한 후원자, 모세를 키워준 어머니 합세수트는 이제 점점 쇠약해져 그 권력이 아주 쇠퇴해 있었고, 모세의 양 어머니 합세수트의 사위이자 정적이었던 투트모세 3세가 강력히 부상하여 바로가 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막 권력을 가진 투트모세 3세에게 모세는 필히 제거해야 하는 아주 위험한 존재였던거죠.

그러던 차에 모세가 섣부른 행동으로 제거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참 소설과 같은 이야기 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극적인 이야기는 모세를 광야로 내모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속에서 차근차근 진행되어져 나갑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는 그저 좋은 것, 풍요로운 것, 아름다운 것, 편안한 것만 있기를 기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로 전혀 다른 방법과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고 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장 큰 풍요로움과 화려함으로 40여년간 모세를 양육시키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미디안 땅에서 가장 지루함과 초라함으로 40년간 모세를 변화시켜 가십니다. 

모세가 도망간 미디안 땅은 오늘날 시나이 반도의 건너편 아라비아의 북서쪽에 위치한 광야입니다. 그곳에는 아브라함과 말년에 얻은 첩 그두라 사이에서 태어난 미디안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고, 모세는 양떼를 치는 제사장의 딸인 십보라를 도운 인연으로 십보라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진작에 살펴본 야곱의 인생 과도 비슷한 모세의 인생은 그러나 야곱과 같이 역동감 넘치는 번영의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양떼 몰고 나가서 풀 뜯기고, 우물 찾아가 물 먹이고..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양떼 몰고 나가 풀 뜯기고, 우물 찾아가 물 먹이고..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양떼 몰고 나가 풀 뜯기고, 우물 찾아가 물 먹이고..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고, 작년이 올해 같고 십년전이 오년전과 똑같은 인생.. 게다가 모래 바람만 풀풀 날리는 광야.. 

모세의 머리속에 뭐가 남았겠습니까. 애굽 왕실에 있던 달콤한 음식의 기억이 남아 있었을까요. 애굽 왕실의 포근한 잠자리의 기억이 남아 있었을까요. 애굽 왕실에서 읽던 재미있는 책들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었을까요. 그곳에서 배운 지혜와 지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을까요. 그럴리 없잖아요. 자그마치 40년 입니다. 하루종일 매.. 매.. 양소리만 듣던 모세에게 무슨 기억과 생각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억이 남아 있었다면, 오히려 그 기억들이 뚜렷 했더라면, 모세는 아마 미쳤을 겁니다. 사람들은 가끔 모세의 왕실 생활이 모세의 리더로서의 능력을 굳게 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다 비워버렸다.. 다 지워버렸다.. 애굽 왕실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일을 조금도 감당해낼 수 없다는 거지요.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세가 애굽 왕실에서 배운 능력이 필요하셨다면, 모세 나이 마흔에 바로 쓰는것이 맞습니다. 어떤 요리사가 칼을 잘 갈아놓고 40년을 녹슬게 한 다음 요리를 하겠다고 집어 들겠습니까.

모세는 텅텅 비어버렸어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왜 왔다가 이렇게 초라하게 사라져 가는가.. 아무런 존재가치도 느낄 수 없는 모세 앞에 여호와 하나님 서십니다.

호렙산, 불붙었으나 타지않는 떨기나무를 보러 다가오는 모세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출애굽기 3장  4-10 절은 그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세가 대답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모세는 뭐라고 답하고 있습니까. ‘뭐라구요 ? 뭘 하라구요? 내가 누구라고 이스라엘 자손을 구해요.. 나 완전히 깡통이에요.. 나 이제 말도 잘 안나와요.. 누가 내 말을 들어줘요.. 바로가 누구라고 내가 거길가요..’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애굽기 3:11

자신의 동족을 위하여 의기양양하던 모세, 의분으로 애굽 사람을 때려 죽이던 모세는 더 이상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40년 전과 똑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는 일이 자신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흔들리는 모세, 이제 아무런 능력도 남아있지 않기에, 전혀 자신이 없는 모세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는 그 일을 맡기십니다. “너는 가라..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애굽기 3:10).

빈깡통 처럼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던 모세.

그 모세에게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이로서 모세는 하나님께 붙들림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민족을 구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합니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나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온전히 주님께 내어 드리 십시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나로부터 찾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린 모세가 민족의 지도자로 우뚝 선것과 같이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붙들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존재의 가치를 드러 내십시오.

당신은 주님의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