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창세기 47장7-10절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창세기 47:7-10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가나안으로 돌아온 야곱은 가나안 땅 세겜에서 땅을 사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잡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세타에 샀으며

창세기 33:18-19

야곱은 얼마나 큰 땅을 산 것일까요? 야곱이 산 땅의 크기를 정확히 알려면 우선 우린 백크세타가  어느 정도의 돈인 줄을 알아야 해요. 크세타는 보통 은으로 만든 동전같은 조각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어 성경이 100 pieces of silver 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일부성경에서는 그냥 은 일백개라고 번역을 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 크세타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는 다른 돈의 단위와는 달리 얼마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냥 단지 양 한마리 정도의 가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하는 정도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야곱이 얼마나 큰 땅을 샀는가는 잘 알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잘 알수 없는 이야기를 성경은 써 놨을까.

그건 야곱이 얼마나 큰 땅을 샀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관심을 가져야하는 포인트가 틀린거죠. 야곱이 산 땅의 크기는 별로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라는 거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몇평인지? 지금 가지고 있는 차가 얼마짜리인지? 지금 버는 돈이 얼마인지? 지금 내가 입은 옷이 명품인지 아닌지?

이런 일들은 사실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들은 아닙니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내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주님이 내게 맡기신 일들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가? 나는 오늘 예수님을 위해 누군가에게 선한 행동을 하였는가? 나는 구원을 확신하며 그 확신을 이웃에게 전하고 있는가? 나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이게 정말 중요한 문제 중요한 포인트 아닙니까.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요. 다 알고 있는 이야기 같아요. 그러나 우리가 잘하지 못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만약 성도들의 가치의 중심에 오직 예수, 오직 구원, 오직 복음, 오직 사랑이 뚜렷하게, 그 삶의 중심에 아주 뚜렷하게 서 있다면, 한국에 성도라고 불리는 사람이 그렇게 많고 미국 이민사회에 자신의 종교를 기독교로 적어내는 사람이 거의 다인데 한국의 사회가 또 미국의 한인교포 사회가 이렇게 이런 모습일 수는 없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전 저는 이곳에서 장애인 선교단체를 이끄시는 목사님 한분을 만났는데, 장애인들이 교회에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너무 안타까워 하시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통계상 한국이건 미국이건 장애인이 교회에 출석하는 비율은 1%가 훨씬 안된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안온다는 겁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못온다는 거죠.

관심을 가져야할 포인트를 놓친 사람들, 그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 놓은 교회에는 어찌보면 가장 약할 수밖에 없는 장애인들, 가난한 사람들, 실패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이 설자리가 없다는 겁니다.

참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참 창피한 일이에요, 참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예수님이 직접 초대하셨는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에 다니기 너무 불편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제 기능을 못한다는 겁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다 남들이 잘못해서 생긴 일일까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왜 우리는 이렇게 수치스러운 일을 겪는 성도가 되었을까요. 고민해봐야하는 문제 아닐까요.

우리가 오늘 수치스러움에 대해 고민하는 것과 같이 말할 수 없는 수치심, 창피함을 고민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예상하시다시피 그 사람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가나안 땅 세겜에 땅을 산 야곱은 아주 기뻤어요. ‘야! 역시 우리 하나님.. 날 너무 사랑하셔.. 하나님도 하나님이지만 나도 참 엄청난 사람이야.. 다 살렸어.. 한명도 잃지 않았어.. 이게 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해서.. 이게 다 내가 평소에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려서.. 하나님이 나를 도우셨어.. 이게 다 나의 탁월한 믿음덕이야..’

그리고 그 땅에서 하나님께 기쁜마음으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창세기 33:20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뜻이죠.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란 이야기예요. 별 문제가 없어보이죠.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에 자신감을 갖는 게 무슨 문제입니까. 하나님 잘 믿어 위기를 넘기고, 땅 사고 잘살게 됐는데 무슨 문제입니까.

그런데, 이런 야곱의 인생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창세기 34:1-2

참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였습니다. 디나를 욕보인 세겜은 자신의 아버지인 하몰에게 디나와 결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조릅니다. 그리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아주 뻔뻔스럽게 야곱을 찾아옵니다. ‘저기!!   야곱양반.. 일이 좀 이상하게 됬어 응.. 애들이 다 그렇지 뭐, 디나가 먼저 좋아서 그랬다는 애기도 있고.. 시골에 살던 애들이 여기 오면 들떠서 가끔 그래.. 하여간 일이 이렇게 된 걸 어쩌겠어.. 우리 아들 좋다는 애들 많아.. 사방에서 우리 아들에게 딸 주려고 난리야.. 근데 내가 우리 애를 못이기겠네, 우리애가 디나만 좋아한다네.. 그냥 결혼 시킵시다.’ 어떠한 사과도, 어떠한 찔림도, 어떠한 반성도 없었어요. 너무나 당당하고 너무도 뻔뻔하게 그렇게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엘엘로헤이스라엘을 외친 야곱앞에 선겁니다.

충격! 충격이죠. ‘하나님이 나를 지키셨는데.. 하나님이 나를 도우셨는데.. 하나님이 내 기를 살려주시고 내게 가정을 세워주시고 맨손에서 큰 부를 일으키시고 위기에서 나를 살리셨는데.. 그리고 내가 방금 제단을 쌓았는데.. 이건 지금 무슨일인가.. 왜 나를 이 수치스러움 속에 던져 두시는가.. 그것도 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야곱은 한 마디도 할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세겜땅에서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습니다.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 야곱과는 달리, 장성한 아들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계획은 아주 치밀했습니다. 디나를 달라는 하몰에게 그들은 이렇게 말하죠.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너희가 만일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

창세기 34:15-17

그럴듯 했죠.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이 완전히 넘어갑니다. 피는 못속인다는 말이 맞을까요. 야곱의 아들들이 목숨을 건 사기를 칩니다. 야곱은 이미 하나님을 만나 진작에 버린 사기극을 아들들이 벌입니다.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이 온 성읍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계몽하죠. ‘할례받자고.. 우리 다 할례받자고.. 그 뭐 별거 아니야.. 그거 받으면 부자된다고.. 그거 잠깐 견디면, 야곱과 사돈지간이 되고, 그들의 부유함이 우리의 부유함이 된다고..’

간단히 말하면 ‘할례받으면 부자된다’ 입니다. 이 어감이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같습니다. 할례가 뭡니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세기 17:7-11

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자손들 간의 약속의 표징입니다. 결코 부유함을 약속받는 조건 정도로 전락할 대상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할례받으면 부자된다..’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겁니다. 

교회 다니고 예수믿으면 부자되고 잘 산다는 얘기는 할례받으면 부자될 수 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부자가 되는 것 일상에서 잘 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믿음도 없이 교회를 나가는 사람들처럼, 하몰과 그 세겜성읍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을 통하여 몰살을 당하지요

제 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이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창세기 34:25-26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아무말도 못했던 아버지 야곱과 달리 야곱의 아들들은 완벽한 복수를 했습니다. 세겜 온 마을이 완전히 붕괴하였습니다. 초토화가 됬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들들의 복수를 보고 또다시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갖게되었습니다. ‘너희가 이 땅 주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아들들이 버린 복수는 정당한 전쟁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죽음의 사기극을 벌였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사용한 도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의 징표인 할례였습니다. 가장 귀중한 것을 들어서 가장 더럽게 사용한 것입니다.

야곱은 너무 창피했어요. ‘아, 하나님의 권위가 어떻게 이렇게 땅에 떨어지나.. 이건 정말 아닌데.. 아, 이러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수 있을까.. 아, 이게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걸까..’ 그 노여움에 그 창피함에 아들들을 야단치죠.

요즘에야 아버지가 야단치면 장성한 아들들이 ‘네—’ 하고 듣나요. 대들기 쉽상이죠. 하지만 

그 시대는 아니었어요. 가부장적인 시대에, 더군다나 야곱입니다. 온 가정을 풍요롭게 이끌고 죽음의 위험에서 앞장서 구해낸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그 야곱의 아들들이 야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함이 옳으니이까

창세기 34:31

대드는 아들들 앞에서 야곱은 또 다시 수치스러웠습니다. 누가 볼까 창피한 순간이죠. 야곱은 연달아 3타를  맞았습니다. 자신만만 기세등등하던 야곱. 하나님 나의 하나님.. 엘엘로헤이스라엘을 외쳤던 야곱은 완전히 주저 앉았습니다. ‘뭐가 잘못된 걸까.. 내가 뭘 잘못한 것일까..’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이 오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낮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세기 35:1

세겜이나 벧엘이나 모두 가나안 땅입니다. 단지 세겜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더 멀리 북쪽에 있죠. 그렇다면 벧엘은 야곱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요. 왜 하나님은 거기서 거기나 마찬가지인 지역으로의 이동을 요구하시는 걸까요. 

우선, 벧엘은 세겜보다 야곱이 태어난 곳에서 더욱 가까운 곳입니다. 세겜에서 벧엘로의 이동은 가까이, 더 가까이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더 가까이, 우리의 긴 신앙 여정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주를 향하여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가는 여정인 것입니다.

또한 벧엘은 야곱이 삶의 맨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뜨거운 감동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첫사랑이 시작된 곳입니다. 벧엘로의 이동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의 회복, 더욱 적극적이고 온전한 믿음을 상징합니다. 수치심에 쌓여있던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가까이, 더 가까이.. 뜨겁게, 더 뜨겁게.. 순수하게, 더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온전한 자녀가 되어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해한 야곱, 자신이 겪은 수치스러움의 원인을 이해한 야곱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창세기 35:2-5

신앙의 회복을 위하여, 그리고 더욱 더 정결한 믿음을 위하여 야곱은 자신이 처음 산 그 땅을 버렸습니다. 야곱과 그 모든 일행들은 자신들의 소소한 욕망과 우상들, 작은 더러움들까지도 내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새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화라고 합니다. 이미 믿음을 가진 자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것, 이미 구원을 약속받은 자가 자신을 더욱 정결케 하며 더욱 순수한 믿음을 키워가는 것, 이것이 성화입니다. 이러한 성화의 노력들은 수치스러움을 넘어 온전한 교회를 세우는 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야곱은 정말 놀라운 믿음의 아버지가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이스라엘이라 할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야곱에게 성화의 과정은 아직도 넘어서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화되어 간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라헬을 향한 편애, 그녀의 자녀들을 향한 편애, 야곱의 편애는 시기심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시기심으로 갈등할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요셉을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자신이 시작한 그 편애로 인하여 야곱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는 고통을 겪습니다. 요셉을 잃은 야곱은 통곡을 하지요.

창세기 37:33-35 야곱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창세기 37:33-35

자신도 아들을 따라 죽고 싶다는 겁니다. 요셉을 잃고 다시 야곱이 요셉을 만날때까지 22년동안 야곱은 가장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슬픔속에 살아갑니다. 얼마나 여러번 울었겠습니까. 얼마나 그리워 했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사랑은 이제 라헬의 마지막 아들 베냐민을 향합니다. 베냐민을 향한 편애와 집착,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마지막 남은 그 집착을 인생 시련을 통하여 꺽으십니다. 야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창세기 43:14

이 말과 함께 야곱은 마지막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 놓습니다. 야곱의 믿음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던 아브라함의 믿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완벽한 내려놓음, 완전한 신뢰, 완전한 의탁이 야곱의 믿음속에 나타났습니다. 야곱은 참된 성화를 이루었고 진정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 야곱은 잃었던 아들 요셉을 만났고 이스라엘 모든 족속들을 구하는 놀라운 일을 다시 한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 이스라엘은 다듬어진 믿음, 성화된 삶의 끝에 자칭 신이라 주장하는 애굽의 왕 바로를 축복합니다. 축복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거지요. 야곱은 지금으로 말하면 난민입니다.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흘러들어온 난민이지요. 그 난민, 누추한 노인이 신이라 자칭하는 자 바로왕을 축복한다는 건 말이 안되는 겁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창세기 47:7-8

세상 최고의 권력, 엄청난 제국 애굽의 왕 바로를 축복하는 야곱을 보고 바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어, 이 노인네가 하하.. 노망이 들었나.. 어이, 영감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셨어, 허허허’ 그러나 야곱의 이 행동은 노망난 노인의 실수가 아닙니다.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 오직 유일한 신되신 엘로힘 하나님, 야곱을 선택하시고 다듬어가신 만유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 하나님과 동행한 이스라엘이었기에 그 높으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바로왕 조차 축복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좋은친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도 모든 더러움과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주께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가는 성화의 삶을 삽시다. 그리하여 주께서 피값 주고 사신 이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세상의 모든 권세를 향하여 담대해 축복을 선포하는 능력의 교회가 되게 노력합시다.

우리 모두가 그 노력에 동참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