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엽 목사
[ 마가복음 1장15절 ]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마가복음 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장 15절 말씀인데 사실상 예수님의 사상이 이 짦은 한 구절에 모두 요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가 이 한 구절의 구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며 별 감흥이 없습니다.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서 별 감흥이 없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 되지만 정작 심각한 문제는 이로인해 우리가 이 구절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는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며 대개는 ‘아 하나님 나라, 즉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죄를 뉘우치고) 복음 (성경 말씀)을 열심히 믿으라는 소리구나.. 이제부터라도 교회 안나간 것 반성하고 그동안 죄지은 것 다 회개하고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천국에 가야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 중에는 아니 목사님 그게 무슨 오해인가요? 그런 뜻이 아니면 무슨 뜻이라는 말인가요?
이렇게 반문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떤 오해가 있는지 본문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때가 찼고 하면 바로 그 시기, 기회, 찬스가 왔다라는 말입니다. 어떤 기회, 시기인고 하니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기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나라는 신약성경이 쓰인 헬라어로 바실레이아 라는 말입니다. 영어성경에는 킹덤으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나라 개념하고는 다릅니다. 우리는 흔히 나라 하면 국경를 가진, 영토를 지닌 국가를 떠올리는데 예수님 시대의 바실레이아, 킹덤은 국경을 지닌 국가의 개념보다는 통치자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을 뜻했습니다.
물리적인 국가의 개념보다는 지배자의 통치, 지배권 즉 질서의 적용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더 강한 단어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 The kingdom of God하면 하나님의 통치권, 하나님의 질서가 통용되는 영역,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영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여기서 가까이 왔다라는 말은 헬라어 엥기조 라는 말은 번역한 말이고 엥기조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누르다, 쥐어짜다 라는 말에서 유래된 말로써 손이 닿는 곳에, 공간적, 시간적으로 근처에, 바로 옆에 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의 뉘앙스는 하나님의 뜻, 질서가 이루어 지는 영역이 (우리가 알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이미 바로 우리 앞에, 우리 옆에, 손에 닿는 곳에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듯이 우주 멀리 있던 천국이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을 필두로 웅장하게 지상으로 내려 오고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본문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말합니다.
회개는 다들 아시다시피 메타노이아 라는 말의 번역입니다. 회개라는 말의 뜻을 정확히 아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회개라는 우리말, 번역어가 주는 어감때문에 정작 예수님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듯 합니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회개하고 반성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즉 회개는 무엇인가 잘못한 부분을 뉘우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의 고해성사에서는 자신이 지은 죄를 남김없이 고백해야 합니다. 남에게 거짓말한 것, 속으로 나쁜 생각을 한것, 부당한 이익을 취한 것 등등 살면서 저지르는 온갖 죄를 입술로 고백해서 죄사함을 받는 것을 회개로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회개로 번역된 메타노이아 라는 말의 원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메타 노이아는 메타와 노이아 두 단어가 합성된 단어인데 메타는 무엇인가를 뛰어넘는 초월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노이아는 헬라어 ‘누스’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말인데 헬라어 누스는 이성, 정신, 생각, 느낌, 판단, 개념등을 뜻하는 낱말입니다.
그러므로 메타노이아라는 말의 근본적 의미는 기존의 개념, 관념등을 초월하는, 뛰어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이 말이 맥락 속에서 기존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이킨다는 용례로 쓰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원적 의미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개념을 바꾸고, 관점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존에 이러이러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생각했던 것을 관점을 바꾸어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메타노이아는 관점의 변화, 가치관의 전도를 말합니다.
예를 든다면, 예전에는 돈이 인생의 전부인줄 알고 돈을 벌기위해서 온 인생을 바칠만큼 혈안이 되었던 사람이 어느 날 가치관이 바뀌어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가족과 여행을 하거나 독서를 하며 자기계발에 힘을 쓰게 되었다면 이사람은 ‘메타노이아’ 즉 회개를 한 것입니다. 즉 메타노이아는 죄를 뉘우친게 아니고 가치관이 변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치관이 변하면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립니다. 이것은 내 주위의 물리적 환경이 뒤바뀌어 다른 세상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내면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이런 종류의 가장 극적인 세상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 아마도 사랑을 하게 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평소 가슴 졸이며 썸을 타던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부터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그녀를 만나는 곳 100 미터 전부터 하늘의 구름이 솜사탕으로 변하고 어디한번 뛰어올라 볼까 .. 막 그러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인해서 세상이 변하는 메타노이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메타노이아의 정확한 뜻을 알게되면 그 뒤에 곧바로 나오는 ‘복음을 믿으라’는 말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됩니다.
복음은 기쁜소식입니다 헬라어로는 유앙겔리온 인데 유(좋은) 앙겔리조 (알리다)라는 말의 합성어로써 말그대로 ‘좋은 소식,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라는 말은 애초에 우리 기독교에서만 쓰인 교회 전문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유앙겔리온)이라는말은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는 흔하게 쓰인 말입니다. 전쟁에서 이겼다는 소식, 즉 승전보가 바로 유앙겔이온 이었습니다. 당시 전쟁은 주로 공성전(성을 무너뜨리는) 이었는데 적들은 쳐들어오면 성을 빼앗기 위해 성을 포위하고 위협을 가합니다. 각 가정의 남자들은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우기 위해 나서고 부녀자들과 노약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성안 깊숙이 숨습니다.
어둠고 침침한 피난처에 벌벌 떨며 숨어서 기다리던 가족들은 누군가가 밖의 전쟁의 승패 소식을 전해줄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립니다. 참으로 불안하고 답답한 시간일 것입니다. 만일 전쟁에서 졌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절망입니다. 모두들 끌려 나와 노예로 팔리거나 무자비하게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만일 누군가 전쟁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전해 준다면 숨어있던 모든 사람들은 뛸듯이 기뻐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 기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일 것입니다.
이처럼 승전보는 그야말로 목숨이 달린 소식입니다.
이 승리의 소식이 바로 유앙겔리온, 즉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바로 그 단어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죽음이 코앞에 있는 사람에게 전하는 승리의 소식을 지금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복음이라는 단어를 회개하라는 단어와 연결하여 사용하십니다. 이 복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승전보를 전하는 대신에 믿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피난처에 숨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 즉 승전보는 평화로운 환경속에 있는 그들에게는 조금은 생뚱맞은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이라는 기쁜 소식을 듣고도 하나도 기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으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승전보는 믿는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 한가지는 지금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승전보)는 일반적인 승전보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첫째로 이 승전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투에서의 승리소식입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누군가와 싸워서 쟁취하는 승리가 아닙니다. 경기로 따지자면 누군가를 패배시켜야만 얻어지는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는) 승리가 아니라, 마라톤처럼 누구나 완주하면 승자가 되는 게임인 것입니다.
누구나 경기의 규칙을 이해하고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면 메달이 주어지는 승리인 것입니다. 즉 주어지는 승리를 믿음으로 확신하고 참여하는 모든 자의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경기와 승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남과 경쟁하여 그들을 패배시켜야 성공이 주어지는 그러한 삶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대로 되어지는 마라톤 경기라는 사실 이 사실 자체가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승리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진 자에게 그 믿음대로 승리가 주어진다는 이소식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메시지(복음)를 전하시기 위해서 늘 이적을 베푸시기 앞서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늘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문제는 이러한 진리가 지금 우리가 가진 관점과 가치관으로서는 도저히 이해도 안가고 납득이 안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회개 즉 메타노이아를 강조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메타노이아 해서 (관점을 초월하여) 새롭게 진리를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회개해야만, 메타노이아 해야만 복음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관점, 새로운 가치관으로 참된 진리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즉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이웃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몸이기에 애초부터 그들과 경쟁하여 그들의 것을 빼앗아 오는 게임이 아니라 서로를 도와 한 몸을 강건하게 하는 것이 곧 우리 인생의 목적이요 사명이라는 것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그 진리를 깨닫고 전쟁터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 참된 평안을 누리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비로소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복음,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구원받기 원하십니까?
아직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으십니까?
그러면 먼저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는 바를 (내가 구원받았음을) 삶가운데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가지는 ..
만족하며 누리는 자는 언제나 감사하게 되어있다라는 것입니다.
만일 구원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부터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거짓 믿음인 것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만일 여러분이 매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누리고 있는 사람이며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다면 더 이상 구원받기 위해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믿는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모두 이러한 메시지로 귀결됩니다. 믿음대로 될지어다.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나와 남을 한몸으로 여겨라, 이웃을 사랑하라. 오른빰을 치면 왼빰도 내주라. 겉옷을 요구하면 속옷까지 주라.
이 모든 말씀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열린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을 그대로 가지고서는 도무지 이해할수도 행할 수 도 없는 메시지 인 것입니다. 즉 회개한 사람 메타노이아 한 사람에게만 납득이 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여러분의 마음에 아직도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다면.. 아직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메시지는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관점을 새로이 해서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께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