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엽 목사

요한일서 4장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지난 주 부터 아이들이 학교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대면수업을 시작한거죠. 막내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아내가 걱정이 많습니다. 아직 코로나가 진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늘 불안해 하고 걱정가운데 사는 걸까요?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요? 오늘은 삶 가운데 우리를 떠나지 않는 걱정과 근심, 불안과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합니다.

우리가 언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게 될까요? 막연한것 같지만 우리가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크게 보면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 불안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 잘 아는 것에는 별로 불안해 하거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지 잘 아는 사람을 두려워 하지는 않습니다. 어두운 밤길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어둠속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면 똑같은 어둠이라도 내 방 안에서의 어둠은 오히려 편안하게 잠잘 수 있는 환경이 됩니다. 우리가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는 이유는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 익숙하지 않은 것, 무지한 것에 대하여 불안해하거나 두려움을 느낍니다.

또 언제 우리가 불안감이나 두려움을 느끼는가 하면,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것, 우리 힘으로 어찌해 볼수 없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두려움을 느낍니다. 코로나를 두려워 하는 이유는 현대의학으로 코로나를 제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우리가 죽음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이 우리의 무지와 무능이라면 그 어느 인간도 불안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지하고 전능한 인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방금 무지와 무능이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이라고 했는데, 가만 보면 우리는 무지하기 때문에 무능합니다. 잘 아는 것은 통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은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결국 무지함이 (무지함 한가지가) 모든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해서, (무지의 반대인) 앎이 있다면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앎이란 도대체 무엇 일까요? 무엇에 대한 앎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앞서 먼저 성경은 불안과 두려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살펴보면 성경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무지가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이라고 했는데, 성경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무지와 온전한 사랑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오늘 성경 본문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말합니다. 왜 온전한 사랑이라고 했을까요?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전한 사랑은 어떤 상태를 말합니다. 온전히 하나인 상태, 한 몸을 이룬 상태를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주의할 점은, 하나인 상태는 하나됨의 상태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쉽게 하나인 상태 그러면 ‘아 하나됨, 한몸을 이루라는 거구나..’ 하면서 둘이 모여 하나가 되는 하나됨을 생각합니다. 즉 하나됨 이라하면 분리되어 있던 둘이 (조금씩 양보하여) 합쳐져 하나가 된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하나의 상태는 그런 느낌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개념입니다. 그저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이 ‘하나임’의 사랑의 완벽한 본보기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즉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하나입니다. 그 상태 자체가 바로 온전한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인 상태, 한 몸인 상태에서는 모름이 없습니다. 팔에 바늘이 찔리면 뇌는 금방 아픔을 느낍니다. 몸의 한 부위에 병에 걸리면 온 몸이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인 상태에서는 서로에 대한 무지함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에 대해 온전히 아는 상태가 곧 하나인 상태이며 이는 곧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의 온전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랑이란 하나된 상태에서의 온전한 앎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랑은 온전히 아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앎은 지식적인 앎이 아닌 체험적인 앎 입니다. 마치 한 몸을 이룬 부부가 서로에 대해서 안다고 했을때의 그러한 앎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온전한 사랑, 온전한 앎이 두려움을 내어 쫗는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무지가 불안과 두려움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와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결국 앎이 해답입니다.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답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알아야 한다는 거죠? 도대체 이 말씀을 우리의 삶가운데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다시 한번 가만히 우리의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건강에 대해, 미래에 대해, 그리고 통장잔고가 줄어드는 상황에 대해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안감은 모두 삶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감입니다. 즉  삶에 대한 불안감인 것입니다. 원하는 삶의 모습이 있는데, 삶이 그 모습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거죠. 바꿔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내가 이루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삶을 통해 내가 이루어야 할 어떤  목적, 목표가 있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바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삶을 내가 완성해 나가야 할 어떤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삶이 나의 계획과 나의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자꾸 예상치 않는 문제들이 발생하고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수입니다. 나의 계획대로 되지 않은 삶은 나의 과거에 쌓이고, 다시금 나는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미래의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래서 나의 삶은 늘 나의 과거에 있거나 혹은 나의 미래에 있게 됩니다. 즉 나의 삶은 늘 나와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지나간 과거는 내가 어떻게 콘트롤 할 수 없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내가 알 수가 없으니 우리는 늘 삶 가운데 불안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참된 모습, 실상이 아닙니다. 진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 오해와 무지로부터 우리를 구원합니다. 복음은 이렇게 삶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오해를 풀어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동안 무지와 오해로 인하여 삶 가운데 대책없이 당할수 밖에 없었던 걱정과 불안, 온갖 괴로음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복음은 그야말로 복음, 기쁜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삶이 나와 동떨어진, 나와 별개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삶은 내가 이루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 자신이 곧 나의 삶입니다. 나의 삶은 나와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의 삶은 내가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닙니다. 나의 삶은 내가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즉 나와 나의 삶은 하나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지금 나의 생각, 나의 선택,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이루어 나갑니다. 나의 삶을 이루어 나갑니다. 과거의 나의 생각과 선택과 행동이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었듯이, 지금의 나의 생각과 선택과 결단이 미래의 나를 있게 만들 것입니다. 이것들이 모여 나의 삶을 이루고 그것이 곧 나 입니다. 결국 나의 삶가운데 나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나의 삶에 대해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 자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삶이 곧 나 자신이라면 더이상 나는 삶과 대결할 필요가 없습니다. 삶을 통해 나를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나의 삶을 인정하면 됩니다. 그냥 나의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나의 미래, 나의 건강, 나의 재정상태가 (즉 나의 삶이) 나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주었다면 이제는 나의 미래, 나의 건강, 나의 재정상태는 그 자체로서 이미 나의 삶,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나의 미래, 나의 건강, 나의 재산등 나의 삶은 이미 내 안에 있습니다. 다만 아직 시간 속에 주름처럼 접혀져 있을 뿐입니다. 때가 되면 이 모든 것은 인생 가운데 펼쳐져 나올 것입니다. 이미 있지만 아직 드러나 있지 않을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온전한 사랑이란 바로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 앎이 있다면 우리는 더이상 삶을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 내용을 그동안  흔히 들어왔던 말로 바꿔 말하면 온전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흔들림 없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안에 있다면 더 이상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더이상 두려워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두려워 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우리는 처음에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을 우리의 무지함에서 찾았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 불안해 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성경은 통하여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데 그 온전한 사랑은 다름아닌 온전한 앎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르는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사랑가운데에 무지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사랑의 반대말은 두려움입니다)

하나의 상태에는 온전한 앎이 있고 온전한 앎에는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두려움 가운데 있다면 이는 곧 하나가 아닌 상태, 나와 남이 분리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분리, 하나님과의 단절 이것이 곧 우리가 지닌 원죄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나와 남을 분리하여 판단하고 정죄하기 시작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서로를 하나로 여기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가 곧 우리의 원죄요 우리의 믿음없음 입니다. 먼길을 돌아 왔지만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가운데 불안과 걱정 근심 두려움이 있다면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풍랑이는 바닷가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고 꾸짖으셨습니다. 두려움의 이유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폭풍가운데 두려우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하나님이 나의 내면에 계심을 깨달으십시오. 풍랑이 일 때, 거대한 파도를 바라보지 말고 시선을 돌이켜 나의 내면에 깊이 닷을 내리십시오. 나의 내면속에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임을 입술로 고백하십시오. 내면에 닻을 내리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그저 눈을 감은 채 마음을 향하여 침묵가운데 잠잠히 기도하십시오. 기도할 때 골방을 찾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하실로 내려가라는 말이 아니라 나의 내면 속 깊이 내려가 하나님께 집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을 통해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도가운데 나와 남은 하나이며 (나와 남과의 관계로 이루어진) 나의 삶은 나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게 된다면… 이 진리를 소유하게 된다면 저와 여러분은 더이상 불안과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앎이,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기쁨을 누리는 한 주간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