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창세기 28장 10-19절]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창세기 28:10-19
사랑하는 좋은친구교회 성도 여러분, 한 주간도 주님이 허락하신 은혜 속에 평안하셨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사랑하심이 여러분의 삶 속에 늘 충만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저는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좀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만족 하십니까? 여러분이 아시는데로 제 이름은 이인엽입니다. 이인엽.. 발음하기가 조금 어렵죠. 한국에 있을때 어디가서 사람들이 제 이름을 물어봐서 대답하면 보통 사람들이 제 이름을 ‘이인영’, 아니면 ‘이인협’, 가끔은 ‘이민협’이라고 적을 때가 많았어요. 조금 불편하죠, 하지만 저는 제이름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호세아 6:6절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라는 구절에서 인애라는 단어에 쓰인 어질 인(仁) 이라는 한자가 제 이름에 있는 한자와 똑같아서 더욱 제 이름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쓰인 인애라는 단어는 헤세드라는 말을 번역한 단어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 이웃을 사랑이라는 두 가지 뜻을 함께 갖고 있는 단어이거든요. 그러니 참 감사한 일이지요. 가끔 제 이름을 생각하면서 ‘그래, 이름처럼 살아야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름은 이처럼 한 사람의 정체성을 넘어서 삶의 방향성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자녀를 향한 소망을 담아서 좋은 이름을 지어주려고 많이 노력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 이상하게, 말도 안되게 어이없는 이름들을 가진 사람들을 가끔 만나게 되지요. 옛날에 제 친구 이름은 ‘한만운’이었어요… 이상하죠. ‘양동희’라는 분도 계셨어요. 또 정부의 높은 직책에 있는데 이름이 이상한 분들도 꽤 있죠.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개명신청을 한 사람들의 이름들을 보니까 정말 엉뚱한 이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엉뚱한 이름을 가지고 어렸을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친구들이 맨날 놀리고… 제 이름 가지고도 엽차라고 많이 놀렸는데..
그런데 오늘 성경에도 이렇게 이상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이름은 야곱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맞아서 쌍둥이 아들을 낳았는데, 형의 이름은 에서이고 동생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창25:25-26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를 든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이게 뭐가 문제일까요. 생각해 보세요. 걸어가다 발꿈치가 갑자기 들리면 어떻게 됩니까, 엎어지죠. 그래서 야곱이라는 단어는 의롭지 못하게 남의 뒤를 친다, 속인다 라는 뜻입니다. 좀더 쉽게 얘기하면 사기꾼이라는 단어지요. 아니, 자녀를 달라고 기도를 해서 얻은 쌍둥이 아들의 이름을 사기꾼이라고 짓다니 이해가 안가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야곱은 그런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 초기에 그 이름과 같은 행동을 저지르지요.
사냥에서 돌아와 피곤하고 배고픈 형 에서에게 야곱은 팥죽 한그릇으로 에서의 장자권을 빼았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장자의 권한은 절대적이었어요. 더욱이 이삭은 큰 부자였어요. 거부 아들의 장자권은 팥죽 한 그릇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의 이름에 걸맞는 행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유언과도 같은 축복을 에서인척 속여서 모두 차지해 버리쟎아요. 완전한 사기극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야곱의 행동을 두고 에서는 이렇게 비판합니다.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창세기 27:36
형제간이라도, 친한 친구사이라도 자꾸 사기를 치면 온전한 관계가 유지될리 없지 않습니까. 에서가 야곱을 미워한것은 그럴만도 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야곱의 시작은 이 모양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우스꽝스러운 이름은 가진 남자, 에서와는 다른 나약한 남자, 텐트에 머물며 팥죽이나 쓰고 슬슬 거짓말이나 하는 형편없는 인물..
야곱이라는 그의 이름은 그가 누구였었는지를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야곱처럼 타고난 결점과 악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입만 열면 거짓말하는 사람들, 아무 죄의식없이 남의 것을 빼앗고 훔치는 사람들, 남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들, 도박에 인이 박힌 사람들, 음란함에 집착하는 사람들, 돈 밖에 모르는 사람들, 끊임없이 남을 미워하는 사람들,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 수없이 많은 야곱들..
타고난 죄성으로 헤매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참 섬뜩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그런데 더 무서운 사실은 뭔지 아십니까. 내 이름도 사실은 야곱이었다는 겁니다. 나도 야곱이었다는 거죠.
타고난 죄성에 빠져있는 삶, 처음부터 내 안에 있던, 아주 어려서부터 내 안에 있던, 남들은 잘 모르는 나의 죄성.. 나의 이름도 야곱이었다는 겁니다. 나의 정체성도, 나의 삶의 방향성도 야곱과 같았다는 겁니다.
야곱은 이러한 자신의 죄성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소망했지만 축복은 커녕 에서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멋져 보이던 에서의 장자권도, 아버지 이삭에게 물려받을 축복과 풍요도, 모두 빼앗아 보려 애썼지만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야곱은 아무것도 갖지 못했어요.
그저 목숨이라도 건지려고 이제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도망갑니다. 그때, 야곱이 에서의 칼날을 피해 하란땅으로 도망갈 때에 그의 나이는 77세로 추정됩니다. 창세기 47장 28절에서 성경은 야곱이 147세에 죽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77세면 인생의 절반을 넘긴 나이죠.
요즘 나이로 치면 40대 초반, 중반.. 안되는건 아닌데, 아주 못할 일은 아닌데, 가지고 있던 모든 기반을 잃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엔 참 막막한 나이입니다.
더욱이 야곱은 처음부터 어려운 어린시절을 겪은게 아니잖아요. 잘사는 집안 자식으로 엄마 리브가의 사랑을 받는 부자집 귀한 아들이었지요. 그런 야곱이 기를 써 보았지만, 무언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애를 써 보았지만, 좋은 것을 더 얻기는 커녕, 때로는 지루하기조차 했던 평안한 풍요로운 일상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망한 거예요 지금 야곱은.
그런 야곱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창세기 28:10-11
야곱은 제대로된 침구하나 가지지 못하고 도망가고 있습니다. 야곱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완전히 망한자입니다. 야곱은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야곱은 너무 외롭고, 가난하고, 두렵습니다. 넓은 광야 한복판에 사막의 차가운 밤기운 아래 야곱은 그렇게 쓸쓸하고 처량하게 놓여져 있습니다. 야곱이 그 절망감에 얼마나 울었을까요. 그 황당한 상황속에서 얼마나 후회를 했을까요.
여러분의 삶 속에는 이렇게 야곱과 같이 절망스러운 순간이 없으셨습니까.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본 적이 없으십니까. 사람들의 외면속에 고립감을 느끼신 적이 없으십니까. 광야를 걸어가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순간이 없으셨나요. 모든걸 잃은데다 생존조차 위협받는 순간이 없으셨습니까. 그저 인생속에 승승장구만 하셨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인생의 절망스러운 순간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막막한 순간이 있습니다. 돌베개를 베어야하는 불편하고 힘든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들은 대부분 그런 순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밑바닥, 가장 형편없는 그 순간에 야곱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창세기 28:12-13
절망의 나락가운데 있던 야곱이 꿈속에서 본 이 장면은 무었입니까.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는 무엇입니까. 그 사닥다리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하나님의 사자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은 친절하게 이장면을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51
예수님이 나다니엘과의 대화속에서 하신 말씀이지요.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야곱이 꿈속에서 본 사닥다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꿈속에서 본 그 사다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로 인한 실패와 좌절속에 고통받는 야곱앞에 우리의 구원자 되신 야곱의 사다리, 즉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겁니다. 죄 많은 세상속의 수많은 야곱들과 하늘을 이어주시는 천국의 통로되시는 예수께서 그날 거기 광야 속의 좌절한 야곱에게 또 오늘 세상속의 수많은 고통받는 야곱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인자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일을 의미합니다. 독생자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 뜻과 일이 이루어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통속에서 무엇을 붙잡으십니까. 고난과 외로움 속에서 무엇을 통하여 위로를 얻으십니까. 좌절하고 실패하고, 불안함과 근심이 엄습할때, 인생살이가 광야를 걷는 것 같이 고단할때, 여러분은 무엇을 보며 무엇을 힘입어 그 길을 넘어가십니까.
오직 예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십시요. 돌베개를 베고 잠든 야곱이 만났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이제 한참 좌절해있는 야곱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세기 28:13-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약속은 오늘 이 자리 예수를 사랑하여 우리가 모인 이 자리에 야곱과 같이 타고난 죄성으로 인하여 좌절하고 실패한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입니다.
믿음으로 이 약속을 여러분의 것으로 소유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좌절과 외로움에 고통받던 야곱은 이제 달라 졌습니다. 그의 물질적인 환경은 전혀 변함이 없었고 그는 아직도 도망자였습니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갖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이름은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화 되었습니다.
고통의 상징인 돌베개를 가져다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부어 하나님께 단을 쌓았습니다. 야곱의 죄값, 고통의 상징이었던 그의 돌베개는 이제 그의 믿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고통을 가지고 침몰하지 마십시요. 예수님의 현현인 사다리를 바라보며 여호와의 말씀에 힘입어 자신의 고통의 상징을 믿음의 상징으로 바꾸어 놓은 야곱과 같이 여러분 삶의 고통의 상징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상징으로 변화시켜 봅시다.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변함없는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믿어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 봅시다. 변화된 환경을 통해 믿음을 가지려고 기다리지 말고, 믿음을 가져 삶을 변화시켜 봅시다.
야곱이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을 향하여 나아간 것 같이, 여러분도 새로운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야곱이 그랬던것 같이 예수를 사랑하는 우리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타고난 연약함과 악함을 넘어 승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