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수 목사

[ 출애굽기 4장 10-16절 ]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출애굽기 4:10-16

방금 읽은 성경본문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수 십 만 명의 동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에 하나입니다. 당시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 백 년 동안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모세는 이러한 피지배인으로서의 굴욕을 당하지 않고 성장하였습니다. 이집트인들의 이스라엘 민족 말살 기도를 피해 그의 어머니가 갓 태어난 그를 몰래 나일강에 띄어 이집트 왕실의 공주의 양자로 들여보낸 덕분이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이집트 제국의 왕자로서 젊은 시절을 호화스럽고 편안하게 보냈지만 모세는 히브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의 어머니가 유모가 되어 어린 모세에게 젖을 물리며 ‘너는 히브리 민족의 후손이다’라는 강한 민족의식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강한 민족정신 덕분에 모세는 40세 되던 때 젊은 혈기를 참지 못하고 히브리인들을 착취, 억압하는 이집트 지배자에 분개해 그를 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과격한 행동은 이집트인들은 물론, 히브리인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이집트 땅에서 쫓겨나 이후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돌보는 목자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초야에 묻었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의 말씀처럼 모세는 처음엔 그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단지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어도 타지 않는 것이 신기해 이 광경을 가까이 보려고 호렙산에 올랐을 뿐인데, 거기서 그는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모습에 모세는 두려워 얼굴을 가렸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다가와 “내가 선택한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의 지배하에서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으니 네가 가서 그들을 이끌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 하나님의 거룩하고 준엄한 명령을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모세가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간다는 것은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불성설이었습니다. 그는 동족 히브리인들이 애굽의 종살이로 고통당할 때 이들을 외면하고 호의호식한 민족적 배신자였고, 순간의 혈기를 참지 못해 사람을 죽인 살인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책임지지 못하고 도망쳐 나온 비겁자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현재 나이 80이 된 노인으로 젊은 시절의 뜨거운 열정과 패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거부하는 이유로 이러한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야훼’라는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과 각종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갖 핑계를 대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회피하려고만 했습니다.

특별히 본문 10절에서 보듯이, 모세는 자신의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여 말을 잘 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로 내세웠습니다. 나이 80에 말을 잘 못 한다는 것, 즉 언어장애가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사람의 몸이 노쇠해 가는 과정에서 언어장애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러한 언어 장애를 자신의 무능력과 직결시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모세의 변명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야훼가 아니냐(11절)”라고 말씀하시며, 모세의 내면에 있는 모든 불가능과 패배감, 좌절의식에서 벗어나, ‘가능’과 ‘긍정’의 인간으로 그를 세우시려고 했습니다. 모세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도하는 인간’으로 여기기를 바랐습니다. 자신의 장애 때문에 주저앉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노력과 도전으로 한계를 뛰어넘어’ 전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구원’과 ‘승리’를 일구어내는 위대한 지도자로 거듭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말을 잘 못한다고? 네 형 ‘아론’이 옆에 있지 않느냐?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14~15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인생의 동반자, 협력자를 옆에 붙여 그를 보좌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삶에 부족한 부분을 가진 채 어려운 일을 혼자 하려 하지 말고 네 주변에 있는 사람을 ‘파트너’로 삼아 도움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모세에게 깨우치신 것은 장애로 인해 네가 잃은 것은 단 한 부분(a part) 뿐이지 전부(all)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인생의 동반자를 통해서 채워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마침내 모세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의 장애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극히 작은 일부분일 뿐이며, 이 장애로 인해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회피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는 위대한 지도자의 길을 기꺼이 담대하게 걸어갔습니다.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지만, 1970, 80년대 한국의 상황에서 장애를 지닌 채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연속된 좌절과 절망, 불가능의 질곡이었습니다. 현재의 삶도 지극히 불편하고 어렵거니와 미래에 대한 어떤 꿈과 희망도 가질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저 역시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차별과 좌절을 겪으면서 ‘과연 내가 장래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사회에서 사람 구실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존재의 회의 속에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특별히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적 한계 때문에 당해야 하는 차별과 소외는 참으로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주변 아이들로부터 놀림과 따돌림을 당해 슬퍼하고 괴로워할 때마다 저의 어머니 저를 위해 눈물을 흘려 기도하시며, “준수야, 너는 낙오자가 아니야. 너도 잘 할 수 있어.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셔. 부디 지금 당하는 시련과 고난을 훌륭히 이겨내고 하늘의 별과 같은 사람이 되어라.”라고 항상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치 모세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젖을 물려주며 히브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한 것처럼 저 역시 제 어머니의 눈물어린 정성과 사랑, 용기 덕분에 지금껏 수많은 역경과 시련이 있었지만 이를 잘 이겨내고 나 자신을 온전히 세워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모세에게 형 아론을 협력자로 주셨듯이, 저에게도 제 아내를 반려자로 허락하셨기에 그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공부를 끝내고 목사안수도 받아 현재 부족하나마 사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이 보다 존중받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그들이 처한 환경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심신의 장애를 사회적 장애, 영혼의 장애로까지 악화시키는 억압적이고 비합리적인 제도와 규범, 인식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부터 장애를 불가능과 무능력으로 간주해버리는 자세가 우리 안에 있지 않는지 성찰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장애를 차별하지 말라,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외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과연 나는 장애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는가를 정직하게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말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사명을 외면하려 했던 모세처럼, 장애를 핑계로 자신의 무능력을 정당화하려는 모습이 나에게 있다면 바로 그것이 내 안에 있는 ‘차별’입니다. 장애를 무능력으로 바라보고 “Help me! Help me!”라고 외치지도 않는 내 안의 깊은 좌절감이 바로 차별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엄성을 지닌 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우리가 가장 먼저 떨쳐버러야 할 차별의식인 것입니다.

차별을 없애는 일은 장애인 외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나의 무의식 안에 깊게 깔려있는 ‘없음’과 ‘상실’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며 이런 나약하고 부정적인 생각에서 비롯되는 좌절감, 패배감, 포기 의식에서 벗어나는 일이 장애와 그로 인한 차별에서 해방되는 첫 발걸음입니다.

부디 자기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고 한탄만 하는 부정적인 삶을 살지 말고 비록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남겨주신 것들을 분명히 발견하고 충분히 활용하여 우리 인생의 모든 장애와 문제점들을 ‘기회와 가능성’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