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삭 >

이인엽 목사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창세기 26:12-14

잘 산다는 것의 의미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겠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잘 사는 것.. 그걸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잘 살고 싶다는 소망, 그것은 거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잘 산다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던 간에 잘 산다는 단어가 가진 물질적인 지향성으로 인해 자주 신앙적 고민에 빠지곤 하지요.

이거 내가 바래도 되는건가, 내가 너무 욕심이 많은 건 아닌가.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크리스챤이던 아니던 간에 이렇게 물어본다면 무슨 대답이 나올까요. “무슨 소원을 가지고 계십니까?” “당신의  소원은 뭡니까?”

“저요, 부자가 되고 싶어요, 예쁘고 착한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가족의 건강이요, 취업이요, 사업이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표현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결국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잘살고 싶어요“ 라는 답이 나오겠지요.

여러분은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성도라면 어떤 답이 합당한 대답일까요. 보통 사람이든, 성직자이든, 위대한 인물이던, 연약한 사람이든 간에 누구나 똑같이 가지는 마음.. “잘 살고 싶다. 나도 남들처럼 잘 살고 싶다” 그 마음을 우리 대부분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부분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요한복음 6:27

오병이어의 물질적인 기적에 감격해서 예수님을 쫓아온 무리에게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신약성경만 이런 말을 할까요? 아니죠.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이사야 40:8

이사야 40:8절의 말씀입니다. 물질적인 영화와 풍요,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잘 산다는 것이 다 부질없음을 알리는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가 잡아야 할것은 물질적 영화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본능에 가까운 잘 살고 싶다는 소망은 죄일까요? 저주받은 사단의 본성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본능을 주셨고 그 본능은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식욕을 주셔서 먹고 힘을 내게 하시고, 수면욕을 주셔서 잠들어 쉬게 하시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가정을 만들게 하시고, 성취욕을 주셔서 열심히 일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본능에 가까운 잘 살고 싶다는 마음과 잘 사는 것 자체는 죄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문제는 잘 사는 것 자체에 있지 않아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사람의 태도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감사하며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풍요의 복을 인생 최고의 목적으로 삼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인생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잘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죠.

잘 사는 것 자체는 분명 축복이지만 잘 산다고 해서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많은 경우 풍요로운 삶이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삶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삭의 삶을 통하여 이것을 확인해 보려 합니다.

이삭은 아주 잘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창세기 26:12-13

우리말 성경에 “창대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가달” 이라는 단어에서 온 말인데, 이것은 그냥 돈만 많은 번성함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그리고 물질적 번성함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우리가 흔히 이삭을 그저 아브라함의 아들로 거의 죽을 뻔하다 간신히 살아난 아이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런 그가 요즘으로 치면 엄청 잘생기고, 엄청 건강하고, 똑똑한데 사회적인 명성에다가 대인관계도 뛰어나고 또 거기다 인성도 흠잡을 것이없고 그리고 알고보니 재벌이더라..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라 그의 아내 리브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라고 창세기 24:16 이 말해줍니다.

이건 어디 드라마에나 나올 듯한 인물이 바로 이삭인거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그렇게 잘나고 잘사는 이유가 여호와 하나님이 복 주셔서 그렇다는 겁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삭이 누린 이 복이 본인이 뛰어난 믿음을 가져서라기 보다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아서 그 덕에 이 복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창세기 26:3-5

가나안 땅에 다시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도망가려는 이삭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야!  이삭아 그냥 가만히 있어, 어디 가지말고 그냥 여기에 있어. 그러면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아버지를 봐서 네게 복을 줄께. 넌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되!!”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습니까. 이삭의 아들 야곱은 또 얼마나 힘들게 평생을 보냈습니까. 야곱이 이런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창세기47:9

야곱의 아들 요셉은 또 어떻습니까. 그가 처음부터 애굽의 총리였습니까? 형들에게 버림받고,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열심히 일하다 모함받아 감옥살이 하고.. 이삭같이 평탄하고 풍요로운 사람이 전으로도 후로도 없는 겁니다. 이삭의 삶 속에 약간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평안하고 순탄하게, 풍요롭게 살아간 인물이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의 삶 참 부러운 삶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복, 평안히 잘 사는 복을 받은 이삭은 그 복을 누리는 태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찾아주기 위하여 자신의 심복 종을 부르지요. 그리고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창세기 24:3-4

사랑하는 아들 이삭의 아내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심복 종을 맹세시키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소망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 앞에 맹세하고 떠난 그 심복 종은 또 어땠습니까? 리브가를 만난 후 그는 이렇게 했습니다.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창세기 24:26-27

참 감동적인 기도의 모습 아닙니까?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어땠을까요? 며칠 더 머물다 떠나라는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체없이 아브라함의 심복을 따라 나섬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지체없이 행동하는 성숙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그럼 정작 본인의 아내를 위하여 이삭은 뭘 했을까요? 자신의 아내를 위하여 뭘하고 있었을까요?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창세기24:63

이 구절은 이제 이삭과 결혼하기 위해 오는 리브가와 이삭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 속에 묵상하다는 단어는 해석이 아주 어려운 단어입니다. 이게 기도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냥 상념에 잠겨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삭의 행동이 선명하지 않아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는지, 그냥 멍하게 있었는지 선명하지 않다는 겁니다. 분명한 것은 그의 행동이 아브라함의 절실함, 심복의 넘치는 감사, 리브가의 결단에 비해 많이 부족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열심이 없어요. 열정이 없다는 말입니다. 뭘 하긴 하는 것 같은데 열심과 열정이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잘 먹고 잘 사는데 주님을 향한 감사와 헌신과 기도와 열정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아버지 덕에 남들보다 몇배, 몇백배를 받았는데 그냥 거기서 끝인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았는데 그냥 거기서 끝인 것이죠. 창세기는 즉 성경은 이런 이삭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아 하나님이 직접 이삭을 만나주시고 약속도 주시고 이삭이 제단도 쌓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아브라함에 비해 야곱에 비해 그리고 요셉에 비해 영적으로 너무 빈곤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역경을 이기는 이가 100명이라면 풍요를 이기는 이는 하나도 안된다“ (토마스 칼라일) 라는 어느 영국 사상가의 말은 빈말이 아니어 보입니다. 또한 이삭은 이미 물질적인 복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것을 계속 원하며  찾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삭에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었죠. 큰아들은 “에서”, 작은 아들은 “야곱”이었습니다. 둘은 좀 다르게 생겼었나봐요. 그런데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는 이 쌍둥이 아들들을 각자 편애하였습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창세기 25:27-28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는데, 그 이유는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였습니다. 이삭이 이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다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아하브”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게 여기서 어떤 어감이냐면, “이삭이 고기를 좋아해..” 정도가 아니라 “아, 나 고기 정말 너무 사랑해, 나는 고기 먹는 게 제일 좋아”라는 어감입니다. 집착과 습관이 섞여있는 단어란 말이지요. 물질을 향한 집착과 습관이 섞여 있었다는 거지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데 아들이 가져오는 고기가 좋아서 사랑한다면 문제가 좀 있지 않습니까. 잘 사는 복을 누렸으나 물질에 집착하는 이삭의 모습을 성경은 가감없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삭은 나이가 들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형편에서 자녀에 대한 축복을 준비하지요.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창세기 27:1-4

별 문제없어 보이는 이 구절들은 그러나 이삭의 믿음의 상태를 여실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에서는 헷 족속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는 바람에 이삭과 리브가가 마음에 큰 근심을 갖고 있었죠. 믿음의 순수성이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흔들린 겁니다.

자, 그렇다면 믿음의 순수성이 흔들린 에서를 하나님 앞에서 축복하는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야곱을 축복해야 하는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삭은 에서를 부릅니다. 장자라는 형식이 중요한거죠. 장자를 축복하는 전통이 중요한 겁니다. 마치 예수를 잊어버리고 형식에 갇혀 방황했던 풍요로운 가톨릭 교회처럼, 마치 성경 자체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요란한 행사와 이벤트에 집착하는 풍요로운 교회들처럼, 이삭의 영적인 눈은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뻔뻔스럽게 이렇게 이야기하죠.

“별미를 가져와라”, “내가 즐기는 별미를 먹고 축복하리라”.

“돈을 가져오세요. 죄를 사하여 드릴께요”.면죄부 판매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지체없이 따라나선 믿음의 딸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이 일을 막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두려워하는 야곱에게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창세기 27:13

풍요에 찌들어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이삭의 계획을 막으려는 리브가의 담대함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영적 담대함 이었습니다.

아주 잘 살았던 이삭

너무나 풍요로왔던 이삭

그러나 그는 영적 열심도 없었고

풍요로운데도 더 많은 풍요에 집착하였고

신앙적 본질보다 형식과 욕심에 눈 멀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소망하는 잘 사는 것, 성공하는 것, 부유한 것의 위험성을 우리는 이삭의 삶을 통하여 이해하게 됩니다. 잘사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지만, 그 복을 받은 자가 영적으로 눈멀지 않기 위하여 날마다 얼마나 많은 영적 노력이 필요한지 그리고 나는 얼마나 깨어 있는가를 이삭의 삶을 보시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