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2)>

이인엽 목사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창세기 12:6-10

오늘은 지난번 설교에 이어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계속 나누려고 합니다.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은 아버지인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 땅에 이르렀지요. 안타깝게도 아버지 데라는 길목인 하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죠, 믿음의 조상답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갔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창세기12:8)

아브라함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얼마나 뿌듯했겠습니까.

“해 냈다, 해 냈어!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험난한 길을 뚫고 가나안에 들어왔다. 승리하였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온 아브라함은 정말 큰 일을 해낸겁니다.

그러나 이런 감격도 잠깐,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원래 건조한 그 땅에 비가 조금만 덜 오면 말할 수 없는 기근이 찾아옵니다. 가축이 굶어죽고, 사람이 굶어죽고, 살길이 막막해지는 거지요.

아브라함이 얼마나 속상했을까요. 잘 될줄 알았는데. 고생 끝, 행복 시작일줄 알았는데. 하라는 것 다했는데. 여러분은 그런 신앙의 경험 없으신가요? 믿음을 따라 나갔는데 삶 속에서 철저히 실패하는 경험. 주를 따라 인내했는데 말할수 없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경험. 하라는대로 다 한것 같은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경험.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험앞에 무너져 내립니다. 아브라함도 예외는 아니었죠.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창12:10)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가나안에 들어섰던 아브라함은 갑자기 몰아닥친 기근을 피해 지금 애굽으로 피난가는 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랬을 것 같아요. ‘아유, 여기 살수가 없네.. 뭐가 이래.. 먹을것도 없고.. 여기 약속의 땅 맞아?’

아브라함이  실망한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거든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 12:2

이건 정말 엄청난 약속이지요. 이름이 복이 된데요. ‘아브라함’ 이러면 사람들이 ‘아.. 복’, ‘복 받은사람’ 이렇게 된다는 거죠. 소문날 만큼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된다는거 아닙니까. 거기다가 하나님은 또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세기 12:3

자 이쯤 되면 아브라함이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12:1)는 이 말씀만 듣고 떠난건지, 아니면 방금 말씀드린 축복의 약속때문에, 즉 보상을 위하여 떠나 간건지 조금 의심이 들지 않습니까?

이러한 지극히 상식적인 의구심에 확신을 심어주는 구절이 바로 창세기 12장10절의 말씀 아닌가요. 기근이 드니까 아브라함이 바로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거죠. ‘에구, 내가 속았구나.. 복의 근원은 무슨, 굶어죽게 생겼는데..’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창세기 12장4절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죠. 여기에서 ‘따라갔고’라는 말과, 창세기 12장10절의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말은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있습니다. 둘다 ‘갔다’라는 단어인데, 4절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으로 갈 때는 ‘동행한다’는 의미의 ‘갔고’ 라는 단어를 썼고요. 실망하고 배고파서 애굽으로 내려갈 때는 이 동행한다는 의미가 없어요. 그냥 ‘갔다’ 라는 단어를  쓰고 있어요.

이게 뭘 의미하냐 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에 어려움이 닥치니까 그 동행을 중단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가다가 어려움을 당하니까 싹 돌아서는 겁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아무런 기대없이 하나님의 명령만을 따라 나선 일이라면,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돌아설 이유는 없습니다. 뭘 기대했다고 돌아서겠습니까.

기대하는것이 틀렸기에 어려움 앞에 무너지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 하잖아요. ‘예수 믿으면  잘 된다’, ‘예수 믿으면 천국도 가지만 세상에서도 잘 산다’. 이 말이 꼭 틀린 말은 아닌데, 이걸 잘못 듣고, 잘못 전하고, 잘못 알아들으면 시련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는겁니다. 기대하는것이 틀렸던거죠.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하여 들어온 땅, 가나안에서 더 이상의 동행을 멈추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멈추어지자 아브라함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창세기 12장 11-16 절의 말씀입니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창세기 12:11-16

하나님과 동행이 멈추어 지자마자 아브라함은 참 기도안막힌 일을 저지르지요. 어떤 분들은 이 구절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행동을 애써 변명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아내를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참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나님과의 동행을 멈춘 아브라함은 그 속에 잠들어있던 악한 본성이 들어나기 시작했고, 결국 누가보아도 한심한 악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악한 일인가에 대해서 대부분 공감을 하시겠지만, 조금 더 자세히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역사의 한 부분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우리 한국의 역사속에는 참 어렵고 힘든 시기가 많았는데요. 1930년대말 일본의 식민지 착취가 극에 달할 무렵, 수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제일 큰 이슈였겠죠.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빈번히 신문지면을 차지하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래요.. ‘이모씨가, 김모씨가, 박모씨가 돈을 받고 아내를 팔았다’, ‘어떤 이가 돈을 받고 딸을 만주로 팔아넘겼다’. 아무리 어렵고 배고프고 위험하다고 한들, 남편이 아내를 파는 일, 아버지가 가족을 파는 일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은 신문에 날 만큼 기막히고 나쁜 일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겪은 기근이 아브라함의 그 행동을 정당화 시켜주지 못합니다. 그는 씻을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만약 1930년대말 가족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하던 한국의 한 가장이 이제 막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서 성경을 보는데, 성경에 나오는 이 구절을 읽는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성경을 펼쳐서 창세기부터 읽어 나가는데 아브라함이 아내를 팔았다라는 이 구절을 본다면,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이 한 행동이 조금 전 신문에서 본 기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성경을 덮겠죠. 상스러운 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동행이 멈추어진 아브라함은 누가보아도 손가락질 당할만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아마도 성경의 다음구절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과 저주가 바로 튀어나올 듯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질책하시는 구절을 발견할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애굽 왕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창세기 12:17

놀란 바로 왕이 사래를 돌려줬을 뿐만아니라 사래를 아내로 데려오면서 주었던 많은 것들을 다시 빼앗아 가지도 않았습니다.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창세기 12:19-20

악함을 이기지 못해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것을 회복하되, 오히려 넘치는 회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 방탕하게 살다가, 완전히 망해서 밥이나 얻어먹자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탕자가 멀리서 뛰어 와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한 것과 같이..

간음하다 잡혀와 꼼짝없이 군중에게 돌에 맞아 죽을 처지에 놓인 여인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며’ 예수께서 그 여인을 살리실 때에, 그 때 예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경험한 것과 같이..

예수를 부정하며 떠난 베드로가 다시 찾아오신 예수를 만나, 질책도 아니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것과 같이..

그 날 아브라함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의 죄를 기억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민망할 정도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난 버리고 떠나 갔는데.. 난 당신을 잊었는데.. 난 너무 어렵고 화가 나서, 그래서 당신을 원망했는데.. 왜!

내가 뭐라고.. 내가 뭐 잘한게 있다고.. 당신은 나를 다시 찾으시나요. 내가 뭐라고.. 당신은 날 다시 사랑하시나요. 

그 날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그 사랑! 놀라울 정도로 맹목적인 하나님의 그 사랑! 심지어 자신의 독생자도 내어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그 사랑! 자녀된 자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

오늘 우리도 똑같이 받고 있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죄를 졌으나 오히려 더욱 풍요로와진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

벧엘에 이르러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 13:3-4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한 아브라함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처음에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제단을 쌓고 예배드린 바로 그 장소에서 똑같이 제사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처음 하나님께 제사드린 아브라함과 지금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아브라함은 같은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구요? 아브라함이 변했는지 어떻게 아냐구요?

창세기 13장5절 이후로 나오는 조카인 롯과의 갈등을 풀어내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아브라함이 어떻게 변화되었는 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였습니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내까지 팔아버린 사람 아닙니까. 그런 그가 조카와의 갈등을 어떻게 풀고 있나요.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세기 13:8-9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변화받지 않았다면 절대로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절대적으로 양보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자, 완벽한 자, 항상 하나님과 동행한 자인 노아를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넘어지고, 우리처럼 의심하고, 우리처럼 실패하고, 우리처럼 때로는 악했던,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힘입어 다시 일어선 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부르는 겁니다.

노아가 아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이유로 저 처럼 악한 주의 종도 희망이 있는겁니다. 날마다 죄 앞에서 흔들리는 수많은 성도들도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질 희망이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을 경험한 아브라함이 사랑을 삶 속에서 실천한 것 같이,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그 안에 사는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갑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일서 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