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갈라디아서 5장 13-15절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갈 5:13-15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이라고 하지요. 더욱이 넷플랙스에서 한국 드라마들을 많이 틀어주다 보니까, 저도 가끔 볼 기회가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어떻게 사나 하는 것들이 궁금한데요, 드라마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한국 사회를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들의 주된 주제가 뭘까요? 많은 주제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가장 대표적인 주제는 사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고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은 사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으신 본문은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갈 5:13-15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죠. 방금전 자유라는 말을 설명한 바울이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사랑이 바로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아는 그 사랑 맞나요? 일반적으로 흔하게 말하는 바로 그 사랑을 이야기 하는 건가요? 수없이 많은 문학 작품과 수없이 많은 유행가 가사에서, 또 수없이 많은 드라마 속에서 나오는 그 사랑을 이야기 하는 건가요? 우리의 인생속에 그렇게 예고 없이 훅 들어오는 사람들간의 사랑을 이야기 하는 건가요?
사실은 이렇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과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랑은 분명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먼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랑은 사람들에 따라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조차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정의내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사랑은 아픈거야, 사랑은 기쁜거야, 사랑은 연민이야, 사랑은 슬픈거야, 사랑은 변하지 않는거야, 사랑은 그리움이야 등등 사람에 따라서 그 사람들의 경험에 따라서 사랑에 대한 이해가 다르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사랑해서 함께 있고 어떤 사람은 사랑해서 떠납니다. 물론 흔하게들 하는 말로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어떤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의 깊이,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일, 어떤 대상으로 인해 생기는 기쁜 마음, 이런 것들을 사랑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랑의 표현방법에 대해서, 게리 채프먼이라는 사람은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에서 사랑의 표현방법으로서 인정하는 말과 감사,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십 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정의, 그리고 사랑의 표현 방식들이겠죠.
자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이런 사랑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그 사랑이 성경의 주제일까요. 사실 우리가 흔하게 알고 있는 사랑의 정의는 남녀간의 사랑에 매우 치우쳐 있습니다. 드라마도, 소설책도, 대중음악도, 그리고 연구 자료들도 주로 다루는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에 많이 집중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조금 더 간다면 부모자식간의 사랑 정도겠지요. 그래서 우리들의 사랑에 대한 개념도 매우 편협하게 치우쳐 있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로 성경의 사랑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는, 성경속 사랑에 대한 온전한 의미를 이해하기가 좀 어려워집니다. 왜 어려워 질까요?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첫째로, 사람마다 사랑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아는 사랑은 매우 편협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요, 내가 아는 사랑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성경속의 사랑을 보게되면, 성경속 사랑에 대해 오해를 하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온통 검죠. 빨간색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온통 빨갔습니다. 내 맘에 드는 색깔의 선글라스를 끼고 성경을 본다는 것은 온전한 색을 분간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직접 겪은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베드로 입니다. 나중에 초대 교회의 대표적인 리더이자 성경의 저자이기도 한 베드로가 얼마나 뛰어난 믿음과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내가 가진 믿음과 베드로의 믿음이 비교나 가능할까요? 그런데 이처럼 뛰어난 믿음을 가졌던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식사를 나누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5-17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이 말씀에 대한 해석과 이 말씀에 대한 주제는 여러분이 여러번 반복해서 들었을 줄로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사랑합니다. “사랑하느냐.. 사랑합니다” 의 이 단순한 대화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세번이나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다는 것이죠.
..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요 21:17
그렇죠, 세번이나 물어보셔서 근심했다고 나오죠. 그래서 이 구절에 대해 19세기의 신학자들의 해석은 헬라어 단어에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은 첫번째와 두번째 질문에서 “사랑하느냐” 라는 단어를 헬라어 “아가페” 라는 단어를 사용하셨고, 베드로는 계속해서 “필레오” 라는 단어로 대답했다는 것이죠.
헬라어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네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첫째는 신적인 사랑 아가페, 둘째는 친구간의 우정인 필레오, 셋째는 가족간의 사랑인 스테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녀간의 육체적인 사랑은 에로스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해에 따라 이 구절을 이해하면, 예수께서 아가페, 즉 하나님의 사랑을 요구했으나 베드로가 계속해서 인간의 사랑인 필레오로 이야기를 하니까 결국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게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 라고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매우 그럴듯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근대 신학자들에 의해 부정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헬라어로 베드로와 대화하지 않으셨을 거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아람어를 쓰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죠. 그런데 아람어는 사랑을 헬라어처럼 구분해 쓰지 않습니다. 우리말로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건, 친구간의 사랑이건, 가족에 대한 사랑이건, 남녀간의 사랑이건 다같이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만 쓰는 것처럼, 아람어도 사랑이란 단어를 ‘아하브’ 하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에서 사랑을 이야기할 때, 떄로는 사람의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아가페라는 단어를 쓰던지,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하는데 필레오라는 단어를 쓰던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놓고 헬라어적인 단어의 차이를 기초로 이해하는건 옳지 않다고 주장을 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맞을까요? 신학자들의 주장이 어떻든 간에, 그리고 여러분이 어떤 신학자들의 주장을 신뢰하던 간에, 분명한 것은 요한이 이 구절을 쓸 때에는 단어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말하시는 사랑과 베드로가 이해하는 사랑에 차이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즉, 베드로는 아직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걸 표현한다는 거지요. 베드로는 자신의 색안경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둘째로, 이 대화속에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내 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계속해서 자신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만 하죠.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에만 집중해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내 양을..” 이라는 말씀에는 전혀 집중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나의 색안경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보면, 나의 이해와 나의 편협함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시려고 하는 성경의 참의미,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려고 계획하신 온전한 길들과 같이 중요한 것들을 볼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우리들이 평상시에 이해하고 있는 그런 사랑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율법의 완성으로 표현하는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속에 녹아있는 자기중심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육체를 가진 우리들로서는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사랑보다 훨씬 더 도달하기 어려운 그런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성으로 인하여 우리의 노력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그 사랑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죄성이 가득한 사람이 죄성이 아주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노력으로 따라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길은 처음부터 막혀있는 길이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사랑도 노력으로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노력으로 이루겠다는 생각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사람이 열심으로 행함으로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열심으로 행함으로 의지로 그 사랑을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그 사랑에 대해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으십니다. 그 많은 구절 중에서도, 사랑장이라고도 하는 고린도전서 13장은 아가페, 즉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이 구절뿐만 아니라 더 많은 성경구절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더 넓은 이해가 있으시기를 소망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에서 “사랑으로” 에 사용된 단어는 아가페 입니다. 원어에 따라 이해하면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 는 뜻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 4절, “사랑은 오래참고..” 로 시작되는 구절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또한 “아가페” 라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헤 아가페 ..”, 즉 “하나님의 사랑은..” 이라고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좀 주의하실 점은, “하나님의 사랑은” 이란 말을 하나님이 하신 사랑으로 이해하시는 것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은” 이라고 이해하시는 것이 본문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구절들은 하나님께 받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성령의 은사로 받은 사랑은..” , 또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행하는 사랑은..” 이렇게 이해하시는 것이 맞다는 말입니다.
제가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을 원문의 뜻을 조금 첨가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고 하나님의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만의 이익을 구하게 만들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우리로 하여금 악한 것을 생각하게 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그 사랑에 힘입어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그 사랑에 힘입어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인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니라”
이것이 성도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 성령의 은사로 성령님께서 우리 손에 쥐어주신 사랑,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우리에게 이 사랑이 정말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를 보내실 일이 없으셨고, 예수가 없었다면, 우리가 죽음을 넘어 구원을 얻을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이제 우리가 먼저 살펴보았던 베드로를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던 베드로는,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여러 형제 자매들과 함께 성령의 세례,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 이제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는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놀라운 기적을 행하였고 초대교회를 세우는 반석으로서 그 역활을 다할 수 있었는데요. 이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가 그 이전과 똑같았을까요? 성령충만 이전과 이후가 똑같았을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완전히 변한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무슨 이야기를 남깁니까?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베드로가 이제는 도리어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 4:7-10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서로 사랑할지니, 서로 봉사하라” 는 베드로의 말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는 갈라디아서 5장13절의 말과 매우 유사합니다. “종 노릇하라” 는 단어 둘로스나 “봉사하라” 는 단어 디아코네오는 둘 다 “섬기다” 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갈라디아서를 쓴 바울이나, 베드로전서를 쓴 베드로나 사랑으로 하는 일이 바로 섬기는 일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섬김의 일이, 바로 그 섬김의 사랑이 예수님이 하신 사랑,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그런데 베드로는 뜨겁게 서로 사랑하고 섬기라는 말에 이어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 4:11
사랑을 해서 서로 섬기는데,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 그러니까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내 삶 속에 이루어 내라는 말씀입니다.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율법을 이루어서 구원을 받는다면 예수님이 뭐하러 오셨겠습니까? 그러기에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겠다는 시도가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사랑을 만들어 내고 행할 수 있다면, 예수께서 뭐하러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그 사랑을 구현해 내셨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오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내 힘으로 사랑을 이루어 낼수 있다는 말은 내 힘으로 율법을 완성해 낼 수 있다는 말과 뭐가 다른 말이겠습니까? 아니, 구약의 율법도 우리 힘으로 완전히 이룰자가 없다고 하셨는데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우리 힘으로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겸손한 마음으로 주앞에 무릎 꿇음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은사인 사랑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은사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을 돌려 드리 십시오.
정신차리고 기도하라는 베드로의 외침과, 사랑의 구현인 십자가 달리심에 앞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예수를 생각하며, 헛된 망상에서 벗어나 자복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성령의 은사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소망하십시요. 그것이 말세를 살아내는 온전한 성도의 모습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