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갈라디아서 2장 6-9절 ]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갈 2:6-9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오늘은 미국시간으로는 2023년이 끝나는 마지막 날입니다. 동시에 이 순간 한국은 2024년이 시작되는 아침이죠. 지금 이 순간 한해의 끝과 한해의 시작이 함께 모였습니다. 겨울이 시작되고 나무잎이 떨어지고 나무가 죽은 것처럼 가지만 앙상해졌다가 봄이 되면 다시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생명력을 회복한 듯 나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때나, 한해가 끝나는 시간이 다가오면 이것 저것 묵은 것들을 털어내고 마무리하는 등 분주하다가 말일이 지나가고 새해 아침이 되면 고요하고 평화롭고 모든 것이 새롭고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 산뜻함을 느낄 때마다 저는 사람의 죽음과 성도의 부활을 생각합니다.
자, 그런데 만약 밤이 되었는데 아침을 기대할 수 없다면 어떨까요. 얼마나 막막하고 답답할까요. 성도의 삶이 이 세상의 희노애락에만 잡혀있어서 육신의 죽음 이후의 부활과 영생을 기대할 수 없다면 얼마나 막막하고 답답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감사하게도 밤이 가면 아침이 오듯 성도의 육신의 마침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인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시작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있어요. 뭡니까?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믿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000년전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초대교회가 생겨 났습니다. 예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 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일어났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확신한 그들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당연히 구약성경입니다. 아직 신약성경이 만들어져있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구약과 유대인의 전통은 초기 기독교에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만약 우리가 구약성경을 깊이있게 살펴본다면 구약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구원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약성경을 깊이있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약은 마치 맹목적으로 율법을 요구하는 책, 행위를 요구하는 책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과는 다른 주장, 다른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문제,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느냐, 아니면 행위와 율법으로 구원을 얻느냐는 실질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요.
그런데 이 문제는요, 그저 그 옛날 초대교회에서만 있었던 문제가 아닙니다. 2000년 동안 이 문제는 늘 교회 안팎에서 다툼이 있었던 문제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갈라디아서를 보면서 구약 전체의 내용에 대한 이해와 신약 전체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하려구 하지는 않겠습니다. 사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작은 범위의 이야기, 우리가 구원을 얻고 천국을 가는 이야기, 거기에 연관된 우리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이야기 그것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갈 2:1-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언제부터 시작해서 14년 후라고 하는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일반적으로 바울의 이 방문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총 5번의 방문중 2번째 방문일것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자, 그렇다면 바울은 그 당시에 어디에서 뭘하고 있었습니까.
일찌기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로 파송하였습니다 (행 11:22).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생겨났나 하면요, 스데반 집사의 박해와 그 순교를 기점으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니까, 기독교인들이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도망가다 안디옥까지 가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받고 믿음을 가져서 교회가 세워진 겁니다.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식을 듣고서 바나바를 파송한거죠. 안디옥 교회로 간 바나바는 혼자 교회를 이끌어 간게 아니라 다소에 가서 바울을 초청해 왔고 그들은 함께 안디옥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 나갔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방인 선교의 리더로서 동역자 바나바와 함께 복음 전파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제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한 거죠.
말하자면 이방인 교회의 수장이 유대인 교회이자, 모든 교회들의 리더교회의 역할을 감당하던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한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간에는 조금 차이점이 있었어요. 그게 뭐였을까요? 어떤 차이가 있었던 건가요?
우리가 잘 아는바대로,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성도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는 얘기지요. 그러다 보니까 이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아브라함의 혈통, 율법과 할례 등의 것들이 그대로 그냥 남아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다가 그냥 예수그리스도의 복음만을 받아들인 이방인 교회와는 달랐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믿음과 율법을 같이 따라야 한다’ 이렇게 가르친 걸까요? 아니죠. 그냥 그들의 삶 속에 옛것들이 남아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 생각은 ‘예수님도 믿고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고 그래야 천국에 간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것을 오늘날 사람들의 이해에 맞게 이야기 한다면, ‘자, 우리가 우리의 육신의 죽음 뒤에 천국에 가고 싶다면, 예수님도 믿고 착한 일도 많이 하고 성도로서 경건하게 삶을 살아야 천국을 갈 수 있다’ 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믿는데 착하지 않았다든지, 예수님은 믿는데 경건하지 않다든지 이러면 천국 못 간다는거예요. 이게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의 생각이었던 겁니다.
얼핏보기 크게 틀릴 것도 없어보이는 이 생각을 바울은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아니다! 우리가 천국 구원을 얻는 문제는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는 일이다. 거기에 다른것을 더하지 마라. 거기에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더하지 마라.”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죠.
서로의 주장이 참 다르죠.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람과 믿음 더하기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람의 주장이 부딪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에 있던 리더들은 왜 이렇게 가르쳤을까요?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행위만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구원을 위해 믿음에 율법을 더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 리더들이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런 분들이 있으실 수 있습니다. ‘어, 야고보서의 말은 좀 다른데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약 2:24
얼핏보면 이 말씀은 믿음만 가지고는 의롭다 함을 못받는다는 말이잖아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도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십니까? 야고보는 정말 그렇게 가르친 것일까요? 성도 대부분이 유대인들이니까, 야고보도 유대인이었으니까, 믿음 하나 갖고는 안되고, 행위도 꼭 더해야 한다.. 이렇게 말한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로마서 3장 28절의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는 바울의 말과 야고보의 말은 정말 서로 달라 보입니다.
얼핏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율법주의자들과 사도 바울의 갈등은 야고보와 바울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구약은 그만두고, 오늘날 신약만 읽어본 성도들이라도 야고보의 주장과 바울의 주장을 볼 때면 ‘아니, 뭐가 맞는거야?’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를 흔들어 놓았던 이들 율법주의자들의 생각은 야고보의 가르침에서 나왔을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바울의 주장과 야고보의 주장이 어떻게 상반되는 이야기가 아닌지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우리가 실제 생활속에서 믿음과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까지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절의 말씀입니다.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갈 2:2
계시에 따라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도, 지금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것도 사람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인도하셔서 예루살렘으로 보내심으로 바울과 야고보의 신앙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이들, 그러니까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납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학,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예루살렘 교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전한게 아니라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에게 조용히 알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수의 율법주의자들이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 거기서 바울이 자신의 믿음과 신학을 이야기 하였다가는 호응을 얻기는 커녕,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과 앞으로 할일까지 훼방을 받기 딱 알맞은 상황이었던 거죠.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에게 개인적으로 전했습니다. 오직 믿음, 예수를 향한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전한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들은 야고보는 어땠을까요? 얼핏보기에 믿음만으로는 안되고 행위도 있어야한다고 말하는 것 같은 야고보는 ‘믿음이면 충분하다,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 는 이 말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갈 2:6-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바울선생, 무슨말이야, 그래도 율법도 지켜야 천국가지.. 그래도 행위를 잘해야 천국가지..” 이러지 않았는 말입니다. 야고보가 바울의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부정하지 않고 바울의 사역을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갈 2:9
무슨 말이냐 하면요, 이신칭의 –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다 – 는 바울의 주장이 야고보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의 문제가 율법주의자들의 말하는 행위의 문제와 같지 않다는 말인거죠. 표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전도의 대상에 따른 접근법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길과 야고보를 포함한 사도들이 말하는 구원의 길이 서로 같았다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의 주장과 믿음만으로는 안되고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같아 보이는 야고보의 주장이 어떻게 같은 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는 친교의 악수를 했습니다. 다른 주장을 하는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는 친교의 악수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가 왜 같은 이야기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우선 바울의 이해입니다.
“사람의 선행과 의지는 사람을 구원으로 견인해가지 못한다. 거꾸로 사람의 악함과 부족함은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의 선함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바울의 주장에 대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이해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요, 우리가 아무리 착한 척하고 우리가 아무리 경건한 척하고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만큼 충분하지가 못하다는 겁니다. 어린 아이가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장정의 힘을 넘어설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선한 사람도 자신을 구원으로 이끌만큼 선할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구약성경을 통하여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구원이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했다고 해서, 행위에 대한 부분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을까요? 아니죠. 바울이 남긴 성경구절을 살펴보면 어떨 땐 이건 정말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라고 권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디도서 1:16
바울이 한 이 말씀은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딤후 4:7-8) 이 구절에 나오는 선한 싸움이라는 단어의 원어를 살펴보면 복싱이나 레슬링을 의미하는 단어를 썼습니다. 복싱 선수가 링위에 올라가서 가만히 서있습니까? 레슬링 선수가 자기가 힘이 있다고 경기 중에 손놓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까? 아무리 힘이 센 선수라도, 아무리 잘싸우는 복싱 선수라도 이기기 위해서 경기시간 내내 최선을 다해 움직이며 싸우지 않겠습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 바울은 인간이 인간의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온 인생동안 그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며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의 주장을 예수님을 믿은 후에 그저 게으르고 나태하게 하고 싶은 대로 자신의 욕망이나 채우며 편안하게 살아도 그만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런 이들에게 바울이 전한 구원은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야고보는 어떨까요.
야고보는 그저 행위만 강조한 것일까요? 그럴리가 없죠.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20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야고보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이 있다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온전한 행위가 묻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행함은, 믿음은 없이 행함만 있는 회칠한 무덤같은 율법주의자들의 행위와는 구분되는 행함인 것입니다. 야고보의 이 주장은 마태복음 7장 16-20절,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믿음을 좋은 열매는 그 믿음을 기초로 하는 좋은 행위,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열매들을 말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 이제, 여러분 충분히 이해가 되십니까.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은 좋은 나무를 이야기하느냐 좋은 나무에서 열린 열매를 이야기하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믿은 후에 그저 손 놓고 있는 죽은 믿음이 아닙니다. 날마다 좀더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 죄성가득한 나의 욕망과 싸우는 살아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신칭의 –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 는 말을 전하기 전에, 야고보와의 친교의 악수를 소개함으로써 오늘 우리에게 참된 믿음의 의미와 그 믿음이 오늘 우리의 일상의 삶속에서 무슨 일을 만들어 내는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좋은친구교회 성도 여러분,
또한 유튜브로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
이제 한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더욱 더 살아있는 믿음으로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맺으시는 한해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