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표 목사
[ 에베소서 6:5-9 ]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엡 6:5-9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본문 말씀에는 두 가지 신분이 나옵니다. 종과 상전입니다. 이 말씀이 기록된 때는 로마시대입니다. 당시 로마는 귀족과 자유시민, 노예로 구성된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로마에는 정복전쟁을 통해 유입된 수많은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이 노예들은 로마가 사회경제적으로 유지되도록 여러 가지 형태의 노동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할 당시에 에베소에도 인구의 1/3일 정도가 노예였다고 합니다. 노예들 중에는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자유로운 노예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노예들은 주인의 소유물로 여겨져 매매의 대상이 되었고, 주인들에게 착취를 당하였으며, 온갖 차별과 불평등, 비인간적인 대우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종과 상전은 적대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와 같이 일방적이며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종과 상전에게, 그들이 신앙인이라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신앙적 관점에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사회는 신분제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도상의 종과 상전의 신분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맺고 사는 인간관계 있어서는, 다양한 영역에서 마치 종과 상전의 관계와 같이 강자와 약자의 구도 속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흔히 갑과 을의 관계로 설명하기도 하지요. 가깝게는 가족 구성원사이에서, 그리고 학교와 직장과 기타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때로는 일시적으로, 때로는 지속적으로, 때로는 갑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을이 되기도 합니다. 때문에 오늘 말씀은 과거의 종과 상전에게만 해당이 되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서도 중요한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사람의 노력과 한계
인류 역사를 보면, 사람을 신분에 따라 계급으로 구분하는 사회는 사람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 부당함이 당연시 되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신분제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를 인식하고 신분제도를 해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신분제도의 정점에서 국가의 부와 권력을 독점한 왕과 귀족 계급을 몰아내고, 모든 사람들이 제도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사회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런 변화를 주도한 사람들은 ‘시민’으로 불리는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럽의 중세말기에 새롭게 형성된 도시에서 시민으로 성장한 새로운 계층의 사람들은, 구시대의 모순과 싸웠고,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왕권에 저항하여 마침내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만들었습니다. 그 계기가 된 중요한 사건들로 사람들은 세계 3대 시민혁명을 이야기 하지요. 영국의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그리고 프랑스혁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후 민주주의 정치제제는 세계 각국으로 전파되어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국민이 국가의 주권을 행사하는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우리는 인류 역사의 진보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진보와 함께 인간의 노력이 완전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민주주의가 시작된 영국에서조차 처음에는 여성들과 노동자들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대통령을 뽑은 미국도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이룩하였지만, 온갖 차별과 비인간적인 대우로 고통을 받았던 흑인 노예들이 존재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발전한 오늘날의 사회에도 비록 신분제도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각 사회마다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하며, 강자의 약자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자행되며,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범죄와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제도를 정비하고 새로운 법을 만들지만, 인간의 한계만 드러낼 뿐입니다. 인간 노력의 한계가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례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었고, 오늘날에도 국가와 국가, 사회와 사회, 개인과 개인 간의 차별과 갈등은 끊임이 없습니다.
본문의 가르침, 신분제도의 무력화
우리가 본문과 같이 종과 상전이라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인류역사에 교훈을 찾는다면, 종과 상전을 구별하는 신분제도 자체를 없애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다른 차원에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신분제도를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본문 5-7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엡 6:5-7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하나님은 종된 자들에게 상전을 대할 때, 주님께 하듯이 그를 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것은 그가 비록 사회제도상으로, 겉보기에는 상전의 종이지만, 그는 상전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상전을 섬기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그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임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상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9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엡 6: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라는 말씀은 상전들 역시 종을 대할 때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입니다. 상전들은 종들 위에 군림하고, 자신의 힘으로 위협하고 종을 업신여기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종들에게 하는 것을 주께 하듯 하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고 그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일깨워 주시는데, 그것은 그들 역시 하나님이라는 상전을 모시는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상전이 있는데 그 상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종과 상전을, 그들의 신분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시는데, 하나님이 종인 상전이 자신의 종을 차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의 신분제도가 아무리 견고해도, 그 안에 사는 종과 상전이 서로를 주께 하듯 한다면, 적어도 그 둘의 관계에서 만큼은 그 신분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신분제도는 무력화되고 그 관계에 존재하던 차별과 불평등은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우리는 타락한 세속의 삶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의하고 부조리하며 불합리하고 부당한 사회 관습과 제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잘못된 관습과 제도를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성경의 기본 사상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조들은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들을 기울였고, 실제 많은 열매를 맺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들어온 기독교 선교사들은 남녀차별을 무너뜨리고 양반과 상민과 천민의 벽을 허물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노력했던 것은 당장 제도를 바꾸기 위해 힘으로 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주께 하듯 약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내적으로 변화를 받아서 스스로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하는 일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들 모두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제도에서 비롯된 차별과 불평등을 근원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지혜와 노력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가르침의 놀라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적용할 때 주의할 점
그런데 주께 하듯 하라는 이 말씀에 순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본문 8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엡 6:8
주께 하듯 하라는 이 말씀을 보면서, 자신이 먼저 상대방을 주께 하듯 하기 보다는 상대방이 먼저 자신에게 주께 하듯 해주기를 바랍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노력의 대가를 상대방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이상, 상대방 하기에 따라 자신도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맺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8절에서 우리가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때, 그 순종의 대가는 그 상대방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내가 그를 주께 하듯 섬기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을 읽었을 때, 내가 주께 하듯 하고 있는가보다는 상대방이 나를 주께 하듯 대하고 있는가를 먼저 떠올린다면, 그것은 내 노력의 대가를 하나님이 아닌 상대방에서 받으려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내가 과연 상대방을 주께 하듯 대하고 있는가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나는 열심히 주께 하듯 상대방을 섬기는데, 상대방은 나를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면, 점점 지치고 힘들어지겠지요? 그럴 때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9]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하게도 우리는 종과 상전의 구분과 그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과 부당함이 있는 신분제 사회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종과 상전의 구도는 갑과 을과 관계 속에 지금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는 상전의 위치에서, 때로는 종의 위치에서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때로는 누군가를 무시하고 차별하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고 차별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로 교만하거나 혹은 마음이 위축되고 슬픔과 고독과 고통을 느낄 때,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상전의 위치에 있든지, 종의 위치에 있든지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상전으로 모시고 사는 종의 신분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상대가 누가 됐든,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위해서 우리도 사랑하고 화평을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그 삶이 지치고 힘들어서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요. 그 때마다 나에게 상 주시는 이는 그 상대방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때가 되어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하실 것임을 기억하며, 하루하루를 감사와 기쁨으로 마무리하는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