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목사
[ 이사야 6장 6-11절 ]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사 6:6-11
오늘 저는 살고 죽는 문제, 심판과 구원의 문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한 이사야라는 사람에 대해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서를 기록한 이사야를 살펴보는 일은 책을 쓴 작가를 이해하는 일이기에, 집필 의도를 이해할수 있게 되는, 그래서 이사야서 전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어지는 일일 줄로 압니다.
구약의 후반부에 위치한 선지서들 중 하나인 이사야. 가장 중요한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불리우는 이사야는 누구입니까. 안타깝게도 성경에서 이사야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6장과 20장의 내용은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고 맡기신 일은 무엇인가, 또한 이사야는 그 일을 어떻게 감당했는가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남유다의 선지자였던 이사야의 어린시절에는 웃시야 왕이 유다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웃시야 왕은 유다왕국을 번영으로 이끌었고 종교개혁을 단행한 왕이었죠. 그리고 그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 장면이 이사야 6장의 내용들입니다. 그때부터 약 60여년간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그리고 므낫세 왕까지 이사야는 아주 긴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평생을 열심으로 목회하신 연로한 목사님과 같은 거죠.
더군다나 이사야가 살아간 시대는 남유다와 이스라엘 주변에서 앗수르, 바벨론, 애굽 등 큰 나라들이 서로 부딛히는 시대였어요.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인 유다가 그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 남으려고 이쪽으로 붙었다, 저쪽으로 붙었다 갈팡질팡 정신을 못차리던 시대였습니다. 나라가 서서히 망해가면서 극심한 혼란을 겪던 시대였던 거죠.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일을 맡기셨지요. 그 부르심에 이사야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이사야 6장과 20장에서는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이사야 20:2-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사야가 왕족이었을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읍니다. 게다가 이사야는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았죠.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체면, 명망은 이사야에게 작은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사야가 기록해 놓은 이사야서를 보아도 그가 얼마나 높은 수준의 언어를 사용했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만두고, 작은 교회의 담임을 맡은 목사님들도 혹시 내 행동때문에, 혹시 나의 부족함때문에, 혹시 나의 부끄러운 모습때문에 하나님께 누가되지는 않을까 많은 생각을 하며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이사야에게 벌거벗고 3년을 다니라는 수치스러운 명령이 내려지는거죠. 이걸 따르는게 이사야 입장에서 쉬운 일이었을까요. ‘차라리 죽을께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사야는 아무런 불평 한마디 없이 이 일을 감당합니다. 이사야의 이런 담대한 순종에 대해 학자들은 벌거벗다는 단어로 쓰인 “아롬” 이라는 단어에 집중합니다. 이 단어는 완전히 벌거 벗은 것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부분적으로 벗은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는 거죠. 그래서 이사야가 3년동안을 완전히 나체로 다닌 것이 아니라 그의 베, 그러니까 선지자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속옷에 맨발로 다녔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치스러운 모습이요, 애굽과 구스의 수치를 예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는 거지요.
이렇게 보는 이유는 완전히 벗는 것을 유다에서는 염치없고 방탕한 자의 행동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분아래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방탕하고 염치없는 짓을 할리가 없다는 거죠.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되 분별력있게 행동했다는 주장인 것입니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 아니면 이사야가 아예 나체로 다녔을 지는 그 당시의 모습을 보지 못한 우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구절을 그냥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벗었으면 벗은거지, 부분적으로 벗는 건 뭐고, 속옷만 입는건 뭐야, 그런게 어딨어”.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한거죠.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아주 위험한 이해입니다.
그 당시에 겉옷을 벗는 것만도 벌거벗은 것과 같은 수치스러움 이었다는 역사적인 이해나, 하나님의 일꾼인 선지자의 겉옷은 하나님의 사람임을 나타내는데, 그 겉옷을 벗는 것은 더러운 우리의 속사람이 들어내는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신학적인 이해를 포기한 것입니다. 원어에서 말하는 벗는다는 표현이 다 벗는것 만을 표현하지는 않는다는 원어적인 이해나,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 그 말씀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메세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없이, 그저 단순하게 그 말씀을 생각하는거죠.
자, 이렇게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2003년 2월 7일에 사이비 이단인 새일교 소속 목사 두 명이 대구와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종로일가 영풍문고 앞으로 갔어요. 이사야처럼 한국사람들에게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경고를 하시겠다고 완전히 나체로 트럭위에 서서 북한이 2월 20일에 쳐들어 온다고 자신들이 계시를 받았다고 소란을 피고 다닌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예언한 날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죠. 이들이 벌거벗은 이유는 이사야 20장에 대한 잘못된 이해였습니다.
또 종종 들리는 소식중 하나는 사도 바울이 뱀에 물려도 죽지 않았다고 따라서 하다가 누가 목숨을 잃었다더라, 하는 소식도 종종 듣게 됩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고 2000년동안 그 많은 분들이 애써서 많은 자료를 남겼는데도, 성경말씀을 보고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본다고 다 알고, 듣는다고 다 알수가 없다는 거지요.
이사야의 콜링받는 모습을 기록한 이사야 6장 9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9
왜 하나님의 말씀은 보고 듣는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없을까요. 왜 선하신 하나님은 모두가 무조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말씀을 전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바로 직전에 우리가 살펴본 이사야 20장조차 바르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왜 이사야서의 많은 부분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은유와 비유로 기록되어 있을까요. 왜 이사야는 메시야를 예언했는데 정작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였을까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뵈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 6:1-3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여기서 스랍은 히브리어 세라핌을 한국말로 음역한 건데요, 영어성경은 그냥 세라핌이라고 써있습니다. 세라핌은 불을 의미합니다. 불과 같은 존재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거죠. 이 엄청난 광경, 놀라운 광경을 본 이사야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사야는 무슨 마음이 들었을까요. “큰일났다, 망했다, 난 죽었다” 입니다. 이사야 정도면 “와우, 하나님, 정말 놀라우시네요! 와, 스랍들 좀 봐! 엄청난데. 야, 하나님의 영광이 이런 모습이시구나..” 할 것 같지 않나요. 그런데 이사야의 반응은 “큰일났다, 망했다, 난 죽었다” 였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 6:5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절대로 스스로 정결할 수 없는 죄인된 인간의 본질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이사야나 입술이 부정한 백성들이나 죄인되기는 거기서 거기라는 거죠. 죄인인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뵈면 바로 죽는다는 것을 모를리 없었던 이사야는 그러기에 큰일났다, 망했다, 죽었다는 생각을 한겁니다. 그러나 겸손히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는 이사야에게 무슨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이사야 6:6-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가 직접 가서 불붙은 숯을 집어서 자기 입에 대거나, 이사야가 스스로 자신의 부정함을 불로 씻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하던 스랍중 하나가 불을 가져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서 이사야의 죄를 사하여 주었습니다. 이 말씀속의 제단과 불은 희생 제사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준비한 희생 제사가 아닌, 하나님이 준비하신 희생제사를 통하여 이사야의 죄가 사하여 졌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각한다고 해도 우리가 준비한 희생제사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사함받을 수 있습니까? 없어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준비하신 희생제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거지요.
자, 이제 죄사함을 받은 이사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이사야 6장 8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사 6:8
죄사함을 받은 이사야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바를 이해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서 끝나는게 아니라, 그 말씀에 응답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죄사함을 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죄사함을 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죄사함을 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며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쓰시옵소서” 라는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자원하며 나오는 이사야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이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사야 6:9-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자, 우리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 아닙니까. 회개를 촉구하는 일 아닙니까. 한 명이라도 더 살리려고 세상 끝까지 달려가는 일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잘 알려주고 나누는 일 아닙니까. 자, 이 소망이 우리에게서 나왔습니까? 아니죠,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에 충성하는 마음으로 따르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돌아올까봐 걱정을 하시다니요.. 고침을 받을까 걱정을 하시다니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린 유다가 지금 이 말씀이 선포되는 시기에 어떤 상황이었나를 이해해야 합니다. 유다의 완악함은 여러번의 회개와 회복의 기회를 부셔 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완악한 유다에게 심판을 내리시기로 작정하셨고, 그 작정대로 유다는 곧 멸망하고 맙니다. 이처럼 돌이킬 기회를 상실한 완악한 유다를 상대로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는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씀일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긴 하되, 듣는 자가 알아들을 수 없게 전하는 걸까요. 어떻게 하면 완악한 그 백성이 심판으로 나갈 수밖에 없게 이 말씀이 전해져야 하는 걸까요.
여러분, 토마토 좋아하세요? 토마토가 몸에 좋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죠. 그런데 여기 단걸 좋아하는 아이가 있어요. 안달면 안먹어요. 엄마가 몸에 좋은 토마토를 이 아이에게 먹이고 싶은데 안달면 안먹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토마토에 설탕을 뿌립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먹여 보려는 거죠. 우리의 영과 육을 강건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런데 그냥 주면 달달한 세상 맛을 좋아하는 이들은 영 먹지를 않으니까 세상적인 달달함을 그 위에 뿌려 넣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목사님들은 웃기기도 하시고, 재미있는 예화도 많이 쓰시고, 그러는거 아닐까요. 설탕을 뿌려서라도 몸에 좋은 토마토를 먹이기 위해서죠.
그런데요 정말 나쁜 아이는 토마토와 설탕을 같이 먹지 않습니다. 그냥 설탕만 빨아 먹습니다. 지금 유다 백성의 상태가 설탕만 빨아먹는 아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너, 나가서 설탕뿌리려 애쓰지 말고 생 토마토 그냥 줘라.” “너, 나가서 세상 방법 쓰려고 애쓰지 말고 내 말을 그대로, 생으로 전해라” “너, 그들이 알아듣던 말던 기죽지 말고 내 말을 선포하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 이 명령을 들은 이사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전하는 동시에 심판받기로 결정된 악한 백성들의 마음을 둔하게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하기 위하여 이사야는 어떻게 했을까요. 마태복음 13장은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이사야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서 바닷가에 앉으시매
마 13:1
큰 무리가 모여들었고 예수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말씀하셨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도 말씀하셨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 13:9
아니, 쉽게 얘기하시지.. 아니,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를 하시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물어보지 않습니까. “아니, 왜 비유로 얘기하세요?” “아니, 누가 이 말을 알아들어요.” “아니, 왜 이러시는 겁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야 성경을 통하여 씨 뿌리는 자에 대한 해석도 볼 수 있고, 수없이 많은 설교와 해석을 통해 이 비유가 전혀 낯설지 않지만, 그날 거기서 예수님의 이 비유를 처음 들은 사람들은 이 말씀이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정말로 알아듣기 어렵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어보는 거예요. 예수님 왜 못 알아듣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제자들의 이 질문은 못 알아듣게 말씀을 전하라는 이사야 6장 9-10절의 말씀으로 볼 때, 우리가 가졌던 질문과 똑같지 않습니까? 그 물음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마 13:11-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하면요, 선택받은 자들, 선택받음으로 인해 믿음을 소유한 자들, 이들은 비유의 말씀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지만, 악한 자들이나 하나님을 거부한 자들, 세상 것에 목매는자들, 이적만을 찾아헤메이는 자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에서 벗어난 없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비유인 이유로 전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좀더 쉽게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아유, 그 사람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듣지 않아”. 자, 이 말이 무슨 말인 줄 아시죠.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다는 비유 잖아요. 한국 사람이라면 거의 다 아는 비유입니다. 그러나 콩으로 메주를 쑤는 건지, 팥으로 메주를 쑤는 건지 메주는 또 뭔지 알길이 없는 외국사람들에게 이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비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좀더 덧붙여 설명하시면서 이사야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3-15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완악함으로 인해 심판받기를 결정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비유로 선포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완성되어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얼핏보기에 참 이상한 하나님의 명령의 의미와 그 명령을 받은 이사야가 한 행동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이사야가 남긴 이사야서가 수많은 비유와 은유로 쓰여진 이유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완악한 유다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로 선포해야 했던 이사야의 안타까움과 그들 앞에 수치스러움을 무릎쓰고 벌거벗고 서야 했던 이사야의 고단한 사역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는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 문제 앞에서 혹시 나의 완악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앞에 가리워져 있지는 않은지 자복하는 마음으로 살펴보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